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38
제237화
사상 최연소 천하제일인의 방문에 정맹이 떠들썩했다.
하지만 막상 그가 탄 금기마차가 서문(西門)에 들어서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수많은 눈들이 비워 둔 대로를 거침없이 내달리는 마차를 주시했다. 유감스럽게도 마차 안에 들었을 신황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마차는 정무전(正武殿)에 이르러 속도를 줄였다. 정파제일검으로 불리는 유운검군 팽자방을 필두로 정심원의 원로들이 전각 앞에 나와 진천을 맞이했다.
마차에서 내린 진천은 열세 명의 노인들에게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세평회의 진천이 어르신들을 뵙습니다.”
내년이면 아흔이 되는 팽자방이 정심원을 대표해 진천을 반겼다.
“어서 오시게나, 신황.”
진천은 팽자방을 시작으로 오대세가의 일이인자들과 정파 무림의 명숙들에게 차례로 인사했다. 고암 설가의 설국환은 순서가 뒤로 밀리자 내심 불만이었으나 속내를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다른 이들이 민망할 정도로 진천에게 굽실거렸다. 그의 경박하면서도 얄팍한 처세에 쓴웃음이 났으나 진천은 좀 더 시간을 할애한 답례로써 그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진천은 명을 검후의 제자가 아니라 권왕의 후인으로 소개했다. 모두들 새삼스러운 눈으로 명을 주목했다. 사벌에서 올라온 충격적인 소문이 사실이라면 목전의 말라깽이 소녀는 신황 못지않은 괴물이었다. 정심원의 원로들 중 누구도 그녀가 정면충돌에서 무릎을 꿇렸다는 개산철권 맹찬을 상대로 우위를 점할 거라 장담할 수 없었다. 맹인 소녀의 무위가 최소한 그들과 동급이거나 그들을 능가한다는 뜻이었다.
사파 무림의 간담을 서늘케 한 무용담을 들려달라는 창천도군 문찬경의 청에 얼굴을 붉히며 난감해 하는 진천의 모습은 정심원의 원로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반 시진가량 원로들과 담소를 나눈 진천은 그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정무전을 나섰다. 진천이 제일 먼저 정무전에 들러 예를 차렸기에 원로들은 불쾌하게 여기지 않고 그를 보내주었다.
기실 원로들은 대만족이었다. 진천이 시종여일 겸손한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이었다. 진천의 언사와 몸가짐은 하남신룡으로서 정맹을 찾았던 첫 번째 방문 때나 절대천룡으로 왔었던 두 번째 방문 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더욱이 진천이 곧 강호를 떠날 거라는 전날의 공언을 되풀이하자 원로들은 하나같이 안도했다. 신황이 구(舊) 사왕(四王)처럼 무림의 패권에 무관심한 성정이라는 사실은 그들에겐 축복이나 마찬가지였다.
흡족한 기색을 만면에 드리우며 정무전 경내 바깥까지 배웅 나온 원로들을 뒤로 하고 진천과 명을 태운 마차는 집보각을 향해 질주했다. 집보각에는 진천이 진짜로 만나고 싶었던 인물이 있었다.
이십일 만의 재회였다.
직방형의 탁자를 사이에 두고 진천과 마주보고 앉은 육순의 문사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 이유를 짐작하기에 진천은 고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전날 집보각에서 무림을 횡행하는 악인들에 관한 방대하고도 자세한 정보를 훑어본 진천은 집보각주 문중석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필사해달라고 부탁했다. 밤새 진천의 시중을 든 것으로도 모자라 상당한 분량의 자료를 베껴야했기에 문중석은 탈진지경에 이르렀다. 그로서는 실로 고역이었을 터였다. 그러니 그에겐 진천이 반가운 손님일 리가 없었다.
진천은 속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문중석의 배짱에 감탄했다. 기실 지난번에도 문중석은 그에게 공손한 편은 아니었다. 불퉁스러웠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의 진천은 그때와는 위상이 전혀 달랐다. 지금의 그는 무림의 지존이라고 해도 아무도 이견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문중석에게서는 위축된 분위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개인지 오기인지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진천은 전자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구태여 부정적으로 해석할 까닭이 없어서였다.
진천은 얇은 입술을 고집스럽게 꾹 다물고 있는 문중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추위를 많이 타는지 솜옷을 겹겹이 껴입어 뚱뚱해보이지만 소매 밖으로 나온 손은 앙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진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문중석이 그를 직시했다. 그의 눈에서 어서 용건을 꺼내라는 촉구를 읽은 진천은 쓰게 웃었다.
“일전에는 폐를 끼쳤습니다.”
“정맹의 녹을 먹는 자로서 진 공자가 요구하는 바를 들어주라는 맹주의 지시를 받았으니 응당 할 일이었소. 오늘은 어쩐 일이시오?”
“문 각주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았습니다.”
냉담하던 문중석의 눈빛에 호기심이 어렸다. 진천이 말을 잇지 않자 문중석이 선수를 쳤다.
“진 학사에 관해 물어보려는 게요?”
진천의 처진 눈꼬리가 올라갔다.
“제 선친을 아십니까?”
“면식은 있으나 친분이 있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소.”
진천은 문중석이 어떻게 부친에 대해 추론했는지 알 것 같았다. 모친과 일사부에 따르면 부친은 학림에서 명망이 드높았던 문사였다고 했다. 문중석은 그가 원주 강가의 글 선생으로 갔다는 풍문을 접했을 것이었다. 진천의 외가와 성씨를 결합하면 그의 부친이 무량서원의 진서(秦瑞)임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을 터였다.
문중석이 그의 방문 목적을 잘못 짚었으나 진천은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부친을 소재 삼아 잠시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전에 이곳에 왔을 때는 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묻지 않았잖소?”
문중석의 반문에 진천은 말문이 막혔다. 집보각주는 누구에게도 아부하지 않는다는 평판이 자자했다. 하지만 이쯤 되면 평판에 갇힌 결벽증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터였다.
쓰게 웃으며 진천이 질문을 이었다.
“제 선친은 어떤 분이셨는지요?”
“대단한 천재였소. 대학(大學)들마저 그에게 가르침을 청한다는 소문이 파다할 만큼. 덕망도 높은 탓에 모두를 고대의 성현이 재림했다고 떠들어댔소. 하도 유명해서 내가 수학했던 서관에서도 그를 보러 양현(養峴)까지 찾아간 자들이 부지기수였소. 물론 나는 그런 적이 없소.”
문중석은 흑산(黑山)의 귀곡서관(鬼谷書館)) 출신이었다. 그리고 양현은 학림의 육대본산 중 하나인 무량서원이 자리 잡은 고을이었다.
진천은 문중석 또한 젊은 시절부터 비상한 기재로서 명성을 떨쳤음을 알고 있었다. 다만 문중석이 부친을 경쟁자로 여겼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열 살의 나이 차이 탓이 아니라 부친과는 추구하는 학문의 방향이 워낙 달랐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진 학사가 나를 보러 흑산에 왔다는 말은 아니오. 그를 만난 건 현현서각(玄玄書閣)에서였소. 서로의 존재를 알았지만 어울리지는 않았소. 나는 병략과 귀계에 관한 고서들을 탐독한 반면 그는 고문(古文)으로 된 비서(祕書)의 해독에 열중한 탓에 서가에서 마주칠 일도 없었소.”
진천은 귀가 솔깃했다. 현현서각은 부친이 팔영보의 비급을 발견한 곳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그 이후로 이어진 모든 인연의 시발점이었을 지도 몰랐다.
“딱 한 번이었소. 그와 말을 섞은 건. 하지만 일 각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길이 다르다는 걸 알았소. 그래서 쌍방 미련 없이 등을 돌렸소. 그게 전부요.”
“그렇군요.”
너무 쌀쌀맞게 굴었다고 여겼는지 문중석이 말을 덧붙였다.
“부전자전이라더니 진 공자는 그와 많이 닮았소. 처진 눈하며, 웃을 때 왼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 하며.”
진천은 본 적 없는 부친이 그리웠다.
“진 학사는 원주 강가에서 병사했다고 들었소만…….”
말끝을 흐리는 문중석을 보며 진천은 그저 쓰게 웃었다. 부친에게 일어난 비극을 그에게 시시콜콜히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외숙부의 칼을 빌어 자진해야 했던 부친의 마지막을 떠올린 진천은 심란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대화의 물꼬가 트이자 딱딱했던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기에 진천은 문중석을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제가 몇 가지 정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것들을 취합하면 어떤 결론이 나오는지 가르쳐주시길 바랍니다.”
입 속에 공기를 집어넣은 문중석이 강퍅한 뺨을 부풀렸다.
“나를 시험하려는 게요?”
“무슨 말씀입니까?”
“진 공자의 지모가 하늘에 닿았다고 들었소. 굳이 이 늙은이의 굳은 머리를 써 먹을 까닭이 없을 듯싶소만.”
진천이 다시 삐딱하게 굴기 시작한 문중석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엄중해지자 문중석이 당황했다.
“나는 진 공자를 안다고 자부하오. 본각에는 이월에 하남 무림의 팔정포에서 하남편봉을 상대로 강호 초출을 알린 이래 진 공자가 행한 모든 언행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소. 그를 바탕으로 나는 진 공자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했소. 예컨대 진 공자가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육식을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삼보장 지하에 연무장을 건설할 당시 천민촌에서 끌어온 일꾼들에게 시종일관 경어를 쓰며 존대했다는 것도 아오. 그에 비춰 보건대 진 공자는 설사 내가 오만방자하게 굴거나 하대를 한다고 해도 화를 낼 사람이 아니오. 천인공노할 악한이 아닌 이상.”
“…….”
“이런 자질구레한 얘기를 늘어놓는 연유는 내가 진 공자에 대해 진 공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잘 알고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이오. 나는 진 공자가 명석할뿐더러 암계에도 능한 분이라 확신하오. 어떤 정보들이 의미하는 바를 두고 내 의견을 구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오.”
문중석의 사설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은 진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부친이 목전의 노인과 친교를 맺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이군요. 저는 다만 문 각주께 고견을 청하고자 할 뿐입니다. 몇 개의 구슬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을 꿰면 어떤 모양이 나올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사에 해박하시다는 문 각주님이라면 정확한 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뵌 것입니다.”
문중석의 비위를 맞추려는 빈말이 아니었다. 집보각주 문중석은 만박자(萬博子)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다. 진천이 필요로 하는 것은 그의 지혜가 아니라 그가 갖고 있을 지식과 그것들을 활용한 판단이었다.
진천의 정중한 태도에 일순지간 피어올랐던 두려움이 가라앉은 문중석이 냉정을 되찾았다.
“내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봅시다.”
진천은 호야곡 비사부터 꺼내놓았다.
문중석은 경청했다. 강호의 일이라면 모르는 게 없다는 그로서도 처음 듣는 비화일 터였다. 그러나 그에겐 흥분의 기미가 없었다. 진천은 문중석이 정파 무림 최고의 책사라는 명성에 걸맞게 무황을 제거했다고 주장했던 호련사성의 이후 행보를 통해 무황이 살아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무황과 구(舊) 사왕에 얽힌 이야기를 마친 진천은 독후에 관한 부분으로 넘어갔다. 삼보장을 찾은 그녀가 진천과 검왕에게 남겼던 말들을 전하자 어두워졌던 문중석의 안색이 다음 대목에 이르러서는 새파래졌다. 진천은 그가 구슬들을 꿰었음을 직감했다.
문중석이 방금 들은 내용을 확인했다.
“독후가 벽력도문에서 몰살도(沒殺刀)를 데려간 게 확실하오?”
“십 할의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독후 어르신이 벽력도문을 방문하셨을 당시 곽건을 현천각에 부르신 건 틀림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삼보장을 떠나신 독후께서 다시 벽력도문에 들러 그를 데려가셨을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정황 상 그의 실종과 독후 어르신이 저나 검왕 어르신에게 주었던 언질 사이엔 상당한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진천은 문중석에게 장고할 여유를 주지 않고 착수를 채근했다.
“방금 말씀 드린 사실들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즉답을 주지 않고 침묵하던 문중석이 무거운 음성을 토해내었다.
“아무래도 무황이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되는 괴물을 깨운 것 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