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4
제23화
비가 내렸다.
진천과 대웅이 포성 인근의 협곡에서 비무를 벌이고 열흘, 노덕이 그의 비사를 대웅에게 털어놓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세 사람은 경치가 수려하기로 유명한 양자호반(羊蔗湖畔)을 지나는 중이었다. 고적한 호숫가를 따라 수령이 오백 년은 될 법한 은행나무들이 기다랗게 늘어선 풍광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겨울비가 제법 세차게 내리는 데다 바람마저 심하게 불어 절경을 감상하러 나온 이들은 많지 않았다.
진천 일행은 둔덕에 튀어나온 바위 아래에 쪼그려 앉아 비를 그었다. 정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지만 이미 다른 이들이 차지하고 있었기에 남은 곳이 없었다.
“젠장, 이게 무슨 궁상이야. 가서 확 뺏어 버리자니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정자 쪽을 노려보며 대웅이 투덜거렸다.
“아서라.”
대웅이 실제로 그런 짓을 할 가능성이 희박함을 알면서도 진천이 말리는 시늉을 했다.
“시끄러워 죽겠네. 모조리 주둥이를 꿰매 버릴까 보다.”
대웅이 뒤끝을 보였지만 진천은 이번엔 대응하지 않고 못 들은 척했다.
그들로부터 칠 장가량 떨어진 육각정 위에는 술판이 한창이었다. 공히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세 사내가 각각 두 명의 미희를 양옆에 끼고 한 손으로는 술을 마시고 다른 손으로는 여인들을 주무르며 질탕한 환락을 만끽하고 있었다. 날씨가 쌀쌀함에도 여인들은 음모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나삼 차림이었다.
싸구려 음담패설을 경쟁적으로 쏟아 내며 자신들의 우스개에 취해 정자가 흔들릴 정도로 광소를 터뜨리는 사내들을 못마땅한 눈으로 쏘아보던 대웅이 문득 한숨을 쉬었다.
“부럽군, 제길.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엔 미인과 더불어 음주가무를 즐기는 게 천상의 낙인데. 안 그래?”
대웅의 질문에 진천이 평소와 달리 무뚝뚝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관심 없다.”
둥근 눈을 가늘게 뜨며 대웅이 혀를 찼다.
“쯧, 하긴 너나 노인네나 여자라면 학을 떼는 사람들이니.”
진천과 노덕의 표정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노덕의 고백을 들은 후 대웅은 이때다 싶었는지 진천의 과거사도 꼬치꼬치 캐물었다. 하도 집요하게 파내는 통에 진천은 하나만 빼고 그에 관한 모든 사실을 내주어야 했다. 덕분에 옆에서 같이 듣던 노덕은 차마 진천에게 묻지 못했던 사연들도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모친의 죽음에 얽힌 참사였다.
진천이 무공을 익히고 난 후 매질로는 충분한 고통을 주지 못하자 그녀는 자신의 목에 비수를 들이대고 자진하겠다 협박하는 방식으로 그를 통제하려 들었다. 그녀가 위협을 실행하고도 남을 여인이었기에 진천은 매번 자신의 의사에 반해 그녀에게 굴종해야 했다. 비극이 발생한 날은 오 년 전이었다.
잔귀쌍마의 무공을 전수받은 진천은 놀랍게도 단 삼 년 만에 대왕객잔의 장초를 꺾는 기염을 토하며 창인의 최강자로 등극했다. 그즈음 광기가 극에 달했던 진천의 모친은 그에게 벼르고 별렀던 요구를 했다. 그녀가 눈엣가시로 여겼던 허 노야, 즉 조인상을 살해하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살인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거니와 조인상을 정신적 스승으로 받들고 있던 진천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이었다. 자기와 조인상의 목숨을 두고 양자택일을 강요하던 그의 모친은 무슨 짓이든 할 테니 살명(殺命)만은 거두어 달라고 간청하는 진천의 목전에서 목을 그었다.
엎드려 있었기에 미처 그녀를 제지하지 못했던 진천은 망연자실했다. 잘린 부위에서 피 분수를 뽑아내는 와중에도 그녀는 비명 대신 ‘어미를 죽인 패륜아’라는 저주를 아들에게 유언처럼 남기고는 한 많은 생을 접었다.
진천이 그런 악녀를 원망하기는커녕 심신이 아픈 모친을 잘 돌보지 못한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했다는 조인상의 전언이 떠오른 노덕은 착잡할 따름이었다.
진천과 노덕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웅이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 방면으로는 참 운이 좋아. 내 주위에는 다 좋은 여자들뿐이니까. 어머니는 자애롭기 이를 데 없고 세 누이도 나한테 끔찍하게 잘해…….”
말을 하다 말고 목이 메는지 대웅이 울먹거렸다.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헛기침을 한 노덕이 화제를 바꾸었다.
“험, 화목한 집안에서 자랐구먼. 그런데 내가 알기로 사벌의 중추인 사파칠문(邪派六門)에는 대씨(大氏) 성을 가진 주인은 없는 걸로…….”
노덕은 말을 잇지 못했다. 대웅이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비를 막던 바위에 머리를 부딪치며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었다.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화공이 구겨 버린 화선지처럼 대웅의 안면이 찌그러졌다.
“어떻게 알았소, 노인네?”
손바닥으로 정수리를 문지르며 대웅이 큼직한 눈을 부라렸다. 노덕이 고소를 지었다.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자네는 존귀한 신분이라면서? 그런데 여인들을 전리품 취급하는 무리로 둘러싸여 있다면 정파의 오대세가는 아닐 테고 마련은 특정한 가문이 지배력을 행사하지 않으니 사파칠문밖에 더 있겠는가. 물론 사벌에는 칠문 외에도 유력한 방파들이 적지 않지만 자네 나이에 하남신룡에 버금가는 무력을 가진 젊은이는 칠문이라 해도 결코 흔치 않을 걸세. 더욱이 칠문 정도가 아니고서야 ‘존귀’ 운운하기는 어렵지 않겠나?”
대웅이 콧바람을 날리며 평정을 가장했다.
“흥,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그러나 헛다리 짚은 거요. 칠문 중에 곤(棍)을 병기로 쓰는 곳이 있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진천이 했다.
“네 몽둥이질은 도법(刀法)의 변형…….”
화들짝 놀란 대웅이 진천의 말을 막았다.
“야, 그렇게 따지면 네 수공(手功)도 원래는 칼질이었잖아. 잔살광마의 흔적을 지우려고 네가 이리저리 비틀고 바꾼…….”
대웅은 스스로 말을 줄였다. 제 입으로 노덕의 추론이 옳았음을 시인한 꼴이 되었음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생각이 표정에 드러나는 대웅을 지그시 바라보며 노덕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리도 순진해서야, 원.
“자네는 이미 우리의 개인사를 낱낱이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도 자네의 사정을 들을 권리가 있다고 보네만. 어떤가?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속 시원히 털어놓는 게.”
대웅은 은근슬쩍 진천에게 짐을 떠넘겼다.
“틀렸소, 노인네. ‘낱낱이’는 무슨. 나는 아직 이 친구가 어떤 ‘고귀한 혈통’인지 알지 못하오.”
진천이 허둥지둥 변명했다.
“말했잖아. 어머니와의 약속이라고. 용호가 되면 그때 가서 말해 주마.”
미끼를 문 진천을 기특한 눈으로 바라보며 대웅이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바로 그거야. 네 뜻을 존중해 나도 그것만은 양보했잖아. 그렇다면 너나 노인네도 마땅히 그래야지.”
“뭘?”
“뭐긴 뭐야. 나와 내 어머님 간의 약속이지. 나는 때가 무르익지 않으면 절대로 내 신분을 드러내지 않기로 어머님께 약조했다. 그러니 더 이상 조르지 마라. 꼭 알고 싶으면 너부터 혈통에 대해 털어놓든가.”
“언제 무르익는데?”
“난들 아냐? 하늘이 결정할 일이니 나로서는 기다릴 수밖에.”
억지 논리였지만 진천은 반박하지 않았고 노덕도 자중했다. 기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사파칠문 중 도(刀)를 특장기로 하는 문파는 한 곳뿐이었다.
* * *
빗줄기가 약해지자 세 사람은 바위를 나왔다.
그들이 정자 옆을 지나가자 세 사내의 대소(大笑)와 여섯 여인의 교성으로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일순 조용해졌다. 사내 중 가장 우락부락하게 생긴 자가 진천 등을 불렀다.
“어이, 거기.”
진천 일행이 일제히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들을 부른 사내가 인상을 썼다.
“아까부터 거슬렸어. 본 공자들이 바쁜 일상을 벗어나 모처럼 풍류를 즐기고 있는데 바로 근처에 죽치고 앉아서는 종알종알 시끄럽게 굴다니. 맞아 죽고 싶어 환장한 게냐?”
여인들이 불쌍하니 봐주라며 깔깔거렸다. 문사건(文士巾)을 쓴 사내가 동료를 말렸다.
“진정하게, 마충(馬忠). 잘못하면 경을 치르는 수가 있어. 저 말라깽이가 멘 몽둥이 안 보이나?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군. 아이고, 무서워.”
문사건이 몸을 부르르 떨며 엄살을 부리자 여인들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말상을 가진 나머지 한 사내도 질세라 수작을 보탰다.
“희한한 패거리군. 거지 둘에 광대 하나라. 근데 그 몽둥이 칠을 그럴싸하게 했구나, 해골. 얼핏 보면 진짜 쇠 같아. 하긴 밥벌이일 테니 정성을 들이긴 했겠지. 어디 재롱 한번 부려 봐라. 원래는 마 형 말대로 치도곤을 내려야 할 터이지만 네 몽둥이춤이 마음에 들면 술을 내려 주마.”
“어머, 강 공자님은 너무 관대해서 탈이셔.”
여인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쓴웃음을 공유한 진천과 노덕이 말릴 새도 없이 대웅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등에 멘 철곤을 꺼냈다.
“재주를 부려 보라고? 그러지.”
대웅의 반말에 호통을 치려던 세 사내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오는 대신 안구가 튀어나왔다.
대웅이 호수를 향해 내리친 철곤이 수면을 찍더니 움푹 팬 양쪽으로 거대한 물기둥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삐쩍 마른 사내가 엄청난 고수임을 깨달은 삼 인의 한량은 혼비백산했다.
“너무 시시한가? 다른 걸 보여 줘?”
동시에 오체투지를 한 정자 위의 삼남육녀가 ‘귀인을 몰라보고 죽을죄를 졌지만 제발 살려 달라.’는 상투적인 문구를 이구동성으로 부르짖었다. 대웅이 느물거렸다.
“세상 참 불공평하군. 누구는 비를 맞고 누구는 지붕 아래서 편안하게 엎드려 있다니.”
아홉 남녀가 후다닥 정자를 내려와 진흙탕에 이마를 박았다. 그러고는 좀 전의 말을 되풀이하며 구명을 간청했다.
“그만하고 가자.”
진천이 소매를 잡아끌었지만 대웅이 뿌리쳤다. 그러고는 방금 전에 여인들이 ‘강 공자’란 자에게 했던 말을 차용했다.
“천이 너는 너무 관대해서 탈이야. 이런 놈들은 확실히 짓밟고 가야 돼. 그래야 나중에라도 엄한 이들이 요 쥐새끼들에게 봉변을 당하지 않지. 일단 제일 재수 없는 종자의 머리통부터 부수고 시작해 볼까?”
원색적인 협박에 우락부락한 마충과 멀건 문사건 사내가 그대로 까무러쳤다. 셋 중엔 그나마 말상이 강단이 있는 모양이었다. 유일하게 혼절하지 않았지만 말상도 반쯤 얼이 빠져서는 하의를 오줌으로 적셨다. 여인들은 그저 벌벌 떨었다.
“으이그, 너무 한심해서 턱이 빠질 지경이군. 간덩이 크기가 코흘리개들 코딱지만큼도 안 되는 종자들이 지나가는 염왕의 수염을 뽑으려 들었단 말인가. 어이, 정신 차려, 인마. 안 그러면 진짜 머리를 터뜨려 버릴 테다.”
극심한 공포로 정신이 혼미해진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생존의 빛이 내려왔음을 감지한 말상이 퍼뜩 동공에 초점을 잡았다.
“무엇이든 하명만 하십시오. 뼈가 가루가 되도록 받들겠나이다.”
대웅이 큰 눈을 실그러뜨렸다.
“받들긴 뭘 받들어, 인마. 누가 네 뼈다귀를 디디겠대? 일단 두 가지만 실행하자. 첫째, 당장 저놈들하고 네놈 옷을 벗겨 이 여인들에게 줘라. 지들은 두껍게 껴입고 저들은 이 엄동설한에 나삼만 걸치게 하다니, 나쁜 새끼들.”
대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말상이 사타구니를 가리는 천 조각 하나만 남기고 동료들과 자신의 의복을 여인들에게 건네주었다.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여인들이 옷들을 받아서는 주섬주섬 덧입었다.
대웅이 말을 이었다.
“둘째, 이 여인들에게 얼마를 주기로 했든 두 배, 아니 세 배로 내라. 네놈들 비위를 맞추느라 이 추위에 야외에 나와서 얼마나 고생했겠냐?”
말상이 마을로 돌아가는 대로 다섯 배의 대금을 지불하겠다고 말하며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조상까지 들먹이며 맹세했다. 여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사내들에게 동조한 자신들의 잘못을 사죄하고 대웅의 덕을 칭송했다.
“그대들에게 무슨 과오가 있겠소? 다 먹고 살자고 한 짓인데. 여자 소중한 줄 모르고 껄떡거리며 침만 질질 흘리는 저 개새끼들이 문제지 그대들은 아무 죄도 없소. 나는 그저 그대들이 가여울 뿐이오.”
기루에서 닳고 닳은 여인들은 속으로는 ‘불알 달린 족속은 다 똑같아.’라는 그들 세계의 금언을 되새기며 가소롭게 여기면서도 겉으로는 감동의 눈물을 쏟아 냈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진천조차도 어렵지 않게 그들의 속마음을 간파할 수 있었지만 대웅은 만면에 흐뭇한 표정을 담았다.
그러나 진천은 대웅의 처사를 비웃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짙은 호감을 느꼈다. 그의 언행이 여인들 앞에서 잘난 체를 하기 위해 떠는 가식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대웅이 정말로 사파 출신인지 의구심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