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42
제241화
어느새 정맹의 영토를 벗어나 중립지대에 들어섰다.
예전과 달리 중립지대의 폭은 겨우 팔십여 리에 지나지 않았다. 일각도 지나지 않아 중립지대를 통과해 사벌의 영역에 들어선 진천은 갈등했다. 여기서 방향을 조금만 오른쪽으로 틀면 성주가 나올 터였다.
남천도왕은 벽력도문으로 귀환하지 않고 성주의 사벌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어쩌면 그의 제이차 침공에 대비해 마왕을 불렀을 지도 몰랐다.
경공의 속도를 줄인 진천은 마지막 과제로서 남천도왕을 제거할 것인지를 두고 고심했다. 고민은 짧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남천도왕은 필히 바짝 긴장해서는 단단히 대비하고 있을 것이었다. 암습이 여의치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그와 일대일로 싸울 수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 팔극부나 금면수라 같은 사파의 거두들이 그에게 합세한다면 오히려 당할 공산이 컸다.
진천은 심중에서 올라오는 유혹을 물리쳤다. 전력도 약세였지만 무엇보다 갑작스러운 발작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 심장에 문제가 생기면 만사휴의였다.
욕심을 내려놓은 진천은 원래 가고자 했던 곳으로 방향을 고정했다. 그곳에 간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으로선 기대볼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이었다. 그것마저 무위로 돌아가면 깨끗이 삶을 마감해야 했다.
멀고도 먼 길이었다.
명과 헤어진 영흥에서 창인까지는 직선거리로만 오천 리가 넘었다. 기실 명을 삼보장에 데려다주고 친인들과 작별인사를 나눈 후 창인으로 떠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천은 그러한 경로를 택하면 창인으로 출발할 기회 자체가 사라지리라 예감했다. 영흥에서 주안까지도 물경 사천 리에 달했다. 삼보장에 당도한 후엔 주안에서 다시 육천 리 길인 창인으로 떠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십중팔구 그곳에서 운명을 고해야 할 터였다.
친인들에게 둘러싸여 최후를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진심으로 원하는 바였다. 하지만 진천은 개인적인 바람을 억누르고 실낱같은 희망에 운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것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자세였다.
검은 장막처럼 드리워진 어둠 끝자락에 풍만한 여인의 유방처럼 불룩 솟은 두 개의 둔덕이 보였다. 나산(裸山)이었다. 한 그루의 나무도 없는 나산 너머엔 창인이 있었다.
풀 한 포기조차 자라지 않은 삭막한 광야 위를 질주하며 진천은 자신의 몸이 조금만 더 견뎌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미 한계에 봉착한 그의 육신은 주인의 간청을 외면할 것을 강력히 경고했다. 진천은 도저히 창인에 이를 수 없음을 직감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진천은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원천지기까지 쥐어짜 천공으로 치솟은 진천은 나산을 향해 비스듬히 하강했다. 그의 목표물은 산기슭의 흔들바위였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바위에 이르기도 전에 심장에 격통을 느낀 진천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러나 그의 의지력은 몸의 저항을 이기지 못했다. 공중에서 정신을 잃은 진천은 속절없이 추락했다.
그로서는 천만다행히도 혼절한 상태임에도 방향과 속도를 유지했기에 그의 동체가 흔들바위의 중앙에 정확히 충돌했다. 호신강기를 두를 여력이 없었기에 뼈가 으깨졌으나 진천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에게 일격을 맞은 황소만한 바위가 비탈을 굴러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구르릉, 구르릉, 굉음을 일으키며.
진천은 기시감이 들었다.
아무 감각도 느낄 수 없었지만 의식은 또렷했다. 소암봉에서 설경을 보기 직전의 상태와 흡사했다. 그렇다면 혼이 아직 이승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었다.
짐작이 옳았다. 서서히 하나의 감각이 돌아왔다. 청력이었다. 진천은 그의 고막을 간질이는 소리의 주인공이 공 노인임을 알았다.
“내 말이 들리느냐?”
진천은 입을 열어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럴 것을 알았는지 공 노인이 바로 말을 이었다.
“극약처방으로 네 몸을 마비시키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숨도 쉬지 않고 맥박도 뛰지 않으니 돌팔이들이 보았다면 필시 사망했다고 판정했을 게다. 실제로 시체와 다를 바가 없다. 너는 말하자면 목내이가 된 게야.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만…….”
공 노인이 말을 마무리 짓지 않고 도중에 멈췄다. 확정적인 발언을 꺼려서가 아니라 누군가 그를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징징대지 마라, 동생아. 그나마 나니까 이 녀석 명줄을 붙어놓은 거다. 이만큼 한 것도 기적이란 말이다. 대라신선이 와도 이 녀석을 회생시킬 수 없다고.”
진천은 할 수만 있다면 빙그레 웃고 싶었다. 공 노인이 동생이라 칭한 이는 가린이었다. 진천은 행운에 감사했다. 그의 의도대로 가린이 그를 구해준 것이었다. 나산에서 창인의 지하미로까지는 상당한 거리였지만 진천은 가린이라면 수백 장 밖에서 전해지는 기음을 포착할 수 있으리라 보았다.
잠시 공 노인과 가린이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입씨름의 승자는 공 노인이었다.
“이 녀석에게 할 얘기가 태산이니 그 튀어나온 주둥이 다물고 얌전히 있는 게 어떠냐. 네가 떠들면 방해만 될 뿐이야.”
진천은 가린이 그를 생각해 물러섰음을 알았다. 가린이 고마웠다. 손가락 하나만으로 짓눌러 죽일 수 있는 평범한 인간에게 양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어떻게 공 노인과 가린이 친해졌는지 궁금했다. 진천이 알기에 선인과 요괴는 상극이었다. 공 노인에 따르면 그들은 서로의 체취(體臭)를 지독한 악취로 여긴다고 했다. 그래서 전날 가린을 창인으로 보내며 진천은 공 노인을 만날 시 반감을 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었다.
가린이 공 노인을 ‘형’이라고 부르지 않는 걸로 보아 둘이 합의 하에 서열을 정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마 공 노인은 중원의 관습에 따라 나이로 자신이 윗사람임을 우겼을 터였다. 이 점에서는 가린이 억울할 법했다. 가린은 스스로를 백 살이라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많을 터였다. 올해로 정확히 일백하고도 십 년을 산 공 노인보다 연상일지도 몰랐다.
진천은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가린을 위해 두 노장을 형, 아우가 아니라 또래의 친구로 관계를 재설정해주고 싶었으나 참견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에 잠자코 있어야 했다.
공 노인이 푸념했다.
“고작 한 달이다. 내가 비록 선맥(仙脈) 역사 상 으뜸가는 약선(藥仙)임을 자부하지만 그 고약한 독을 해독하는데 한 달은 터무니없이 짧은 기간이 아니더냐? 나는 네 녀석이 적어도 서너 달은 버틸 줄 알았다. 뭐, 솔직히 말해 내년 이삼월까지 용을 쓴들 해약을 조제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한 달은 너무하지 않으냐?”
진천은 대꾸할 말도, 힘도 없었다.
공 노인의 변명이 이어졌다.
“원래 약이 독보다 시간이 배로 걸리는 법이다. 그 썩을 놈이 독정을 만드는 데 십 년 이상 공을 들였다지 않았더냐? 그러니 정상적이라면 내게 이십 년은 주어야 공평한 게야. 하지만 네 목숨이 경각에 달린지라 나는 지난 달포 내내 눈도 거의 붙이지 못하고 이 일에 매달렸느니라. 하지만 독정에 들어갔다는 팔십여 종의 독초 중에서 내가 가려낸 건 겨우 열일곱 개뿐이다. 그마저도 어느 정도의 비율로 들어갔는지는 아직 감조차 못 잡았다. 그러니 해독제는 요원…….”
참지 못하고 가린이 끼어들었다. 그의 비난에 늘 태평스러운 공 노인이 버럭 화를 냈다.
“내 말을 코로 들었냐? 나도 죽을힘을 다했다니까? 이 녀석 살리려다 내가 먼저 염왕을 보러 갈 판이었다고. 답답해도 내가 더 답답하고 괴로워도 내가 더 괴롭다. 그러니 나에게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말고 닥치고 있어라, 동생아.”
진천은 가슴이 저몄다. 공 노인을 원망하는 마음은 먼지 한 톨만큼도 없었다. 괜한 노고를 끼친 것 같아 미안할 따름이었다.
‘저를 위해 애써주셔서 고마워요, 할아버지.’
진천은 그의 마음의 소리가 공 노인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랐다.
공 노인의 역정에도 불구하고 가린이 진천을 살려내라며 집요하게 압박을 가했다. 진천은 흥분한 가린이 공 노인에게 위해를 가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가린이 살짝 치기만 해도 공 노인은 즉사를 면치 못할 터였다.
‘제발 그러지 마, 가린.’
가린은 진천의 호소를 외면하고 거듭 공 노인을 몰아붙였다. 가린이 발산하는 흉포한 기세에 겁을 먹어서가 아니라 무력감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던 공 노인이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그래, 이놈아. 어디 한 번 미쳐보자꾸나. 어차피 이렇게 내버려두면 서서히 썩다가 한 줌 흙이 될 게 뻔하다. 그렇게 가나 불덩이가 되어 사그라지나 매한가지일 터. 정말로 미친 짓이지만 까짓것 시도나 해보자.”
진천은 공 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안이 남아있단 말인가. 다행히 공 노인이 진천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전날 네 문제를 해결할 기본적인 방침이 이독제독이라고 했던 거 기억하느냐? 말은 쉽지만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다. 특히 네 심장에 들었던 독정처럼 복잡한 귀물에 대응하는 보물을 제조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솔직히 시간이 충분했더라도 해독제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거라 장담할 수 없다.
하여 가끔 내 뇌리에 악마가 속삭이더구나. 불덩이를 끌 물을 만드는 건 가능치 않으니 아예 용암에 던져 넣으라고. 백이면 백, 천이면 천이 실패하기에 약문에서 금기시하는 수법이지만 아주 운이 좋으면 기사회생의 비법이 될 수도 있다. 만에 하나 꼴로 말이다.
남해에 가면 수많은 섬들이 떠있다. 그 중 이족이 ‘피안’이라고 부르는 섬이 있는데 거기에 천지간에 가장 강한 독성을 지닌 독물(毒物)이 산다. 섬이 아니라 깊은 바다 속에. 홍린사(紅鱗蛇)라 부르는 귀물(鬼物)이다.
그 뱀의 독 한 방울이면 일백 마리의 고래를 독살시킬 수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어떤 약문과 독문도 홍린사의 독을 추출해 이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독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네 심장이 품었던 독정도 실로 극악한 물건이다. 아마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독물일 게다.
내 복안은 이렇다. 둘을 붙이자꾸나. 좀 전에 말했듯 불을 끈답시고 용암에 던져 넣는 격이겠지만 달리 방법이 없지 않으냐? 홍린사의 독이 들어오면 그 역천기결이란 것으로 혈류를 조정해 네 체내의 독을 모조리 끌어 모아 대적하려무나. 네 몸뚱이가 버틸 수 있을는지 의문이지만 하늘의 보살핌이 따른다면 두 마리 맹수를 몸 밖으로 몰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라건대 기적이 일어나면 네 생명을 좀 더 연장할 수 있을 게야.”
진천은 암담했다.
단순히 명줄을 보전하려고 창인 행을 결심하고 결행한 것은 아니었다. 설사 목숨을 건지더라도 무력을 잃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는 장차 제이의 천마가 되어 중원에 도래할 무황을 막는데 힘을 보탤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천은 곧 생각을 바꿔 먹었다. 숨만 붙어있는 운신불능의 몸이 되더라도 무언가 할 일이 있을 것이었다. 머리만 온전하다면 위난에 대비한 방책을 짜내는 데 일정한 도움을 줄 수 있을 터였다. 어쨌거나 아직 살아있으니 섣불리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했다.
마음을 다잡은 진천은 집중했다. 중요한 것은 항상 지금 이 순간이었다. 현재의 조건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했다. 창인에서 남해까지는 못 잡아도 삼천리가 넘을 터였다. 가린이 그와 공 노인을 안고 가겠지만 며칠 이내에 당도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어쩌면 보름 이상 걸릴 지도 몰랐다. 홍린사의 독이 들어올 때까지 시체 노릇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진천은 남해에 가는 동안 몰두할 무언가를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그러고는 바로 과제에 착수했다. 그 결정이 자신과 세상의 운명을 바꿀 것임을 꿈에서도 알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