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43
제242화
명을 태운 마차는 영흥을 출발한 지 사흘하고도 반나절이 지나서야 주안에 들어섰다.
금방이라도 바퀴가 빠질 듯 낡은 마차의 앞뒤로는 두 대의 특급마차가 달리고 있었다. 그 마차들이 고암 설가의 독문표기를 달고 있었기에 대로를 오가는 마차들은 황급히 길을 비켜주어야 했다.
고암 설가의 무인들이 마차를 호위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영흥에서 육백 리 떨어진 자원(紫原)의 마방에서 지친 말들을 교체하려던 장초는 그곳을 지배하는 고암 설가 소속 순찰대의 검문을 받았다. 그의 설명을 들은 고암 설가의 무사들은 코웃음을 쳤다. 신황의 부탁을 받고 그의 친인을 주안 삼보장으로 모시고 가는 중이라니.
하지만 순찰대장 설성연(薛盛演)은 신중한 인물이었다. 황당한 헛소리를 내뱉는 마부를 혼내기에 앞서 마차 안을 들여다 본 그는 거지보다 나을 게 없는 허름한 행색의 소녀가 맹인임을 알고는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쩌면 그 소녀는 정말로 소신녀(小神女)일지도 몰랐다. 그냥 소경이 아니라 안구가 없는 소경이었다. 더욱이 엄동설한에 얇은 마의 한 벌만 걸치고 있으면서도 떠는 기색이 없었다. 소녀에게선 한줌의 무기(武氣)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녀가 반박귀진의 경지에 이르렀다면 수긍할 만한 일이었다.
맹인소녀에게 간단한 질문을 던져보려던 설성연은 소신녀가 벙어리이기도 하다는 소문을 상기하고는 조용히 마차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마부를 멀찍이 데려가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제법 강단이 있는 마부는 크게 긴장하지 않고 그날 오전 영흥 마방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고했다.
설성연은 마부의 말에 신빙성이 상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부는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언변에도 조리가 있었다. 어째서 신황이 한낱 소읍의 마인(馬人) 따위에게 귀빈을 맡겼는지 납득하기 어려웠으나 하잘것없는 종자들에게도 하대하는 법이 없다는 그에 관한 풍문을 생각하면 아주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마부의 진술이 사실이라 판단한 설성연은 즉시 상부에 보고했다. 자원을 다스리는 고암 설가의 중진 설구민은 즉시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마차 안을 들여다보고는 처음 여인을 품었던 사십 년 전의 그날처럼 심장이 뛰었다. 소신녀가 확실했다. 용모화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다. 설구만은 뜻밖의 횡재에 쾌재를 불렀다. 신황과 인연을 맺을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진 행운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신녀는 그녀를 대접할 영광을 허락해 달라는 그의 청을 거절했다. 말을 하진 못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젓는 걸 보면 말귀를 알아듣는 건 분명했다. 소신녀는 그러면 편안한 마차로 옮기는 게 어떠냐는 권유도 뿌리쳤다.
소신녀가 너무 작아 앙증맞아 보이기까지 한 손을 내젓자 설구민은 할 수 없이 그녀가 탄 마차에 호위대를 붙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어쨌거나 그 덕분에 장초가 모는 마차는 주안까지 한 번의 검문에도 걸리지 않고 내달을 수 있었다.
자갈길을 울리는 요란한 마차소리가 다가오자 삼보장 경내를 돌며 등을 내걸던 차소영과 고량이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석 대의 마차가 열린 대문을 통과해 마당으로 들어왔다. 마차들의 이질적인 구성에 고개를 갸웃거린 고량은 차소영에게 두 대의 특급마차에 꽂힌 깃발이 고암 설가의 표식임을 알려주었다.
마차에서 분분히 뛰어내린 고암 설가의 무인들이 고량과 차소영을 향해 포권하며 신분을 밝혔다. 두 사람이 그들에게 답례하고 있는데 낡은 마차에서 명이 내렸다. 명을 본 차소영이 그녀에게 달려갔다. 자신에게로 접근하는 인영이 차소영임을 인지한 명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지하연무장과 청와옥에서 여러 사람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명을 발견한 여상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와 함께 지하연무장에서 올라왔던 팽하연은 진천이 보이지 않아 의아해했다. 그러나 주위에 외인들이 있었기에 그에 대한 질문을 자제했다.
보름만의 귀환이었지만 명을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진천이 그녀와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명을 데리고 온 손님들은 삼보장에 들지 못하고 나가야 했다. 다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차소영은 영흥에서부터 명을 싣고 왔다는 털보 마부에게 감사인사와 더불어 후한 사례금을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고생한 고암 설가의 무인들을 쫓아내듯 내보낸 삼보장 인사들은 청와옥의 다연실에 모여들었다. 거동이 불편한 권왕까지 일층으로 내려왔다. 원형 탁자에 둘러앉은 오남사녀(五男四女)는 노미현을 통역 삼아 맨 먼저 진천의 안부부터 물었다. 명은 울음을 터뜨림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권왕과 여상구, 그리고 소중걸과 노미현의 낯빛이 공히 창백해졌다. 진천의 내밀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팽하연과 노덕 등도 표정이 심각해졌다.
눈썹으로 이마에 갈매기를 그린 하수린이 다그치듯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명? 서벌에서 신위를 보이고 월교에서도 검후를 꺾었다며? 닷새 전에 정맹에 들렀다는 소식까지 받았는데 왜 너만 돌아온 거야? 그는 어디 갔어? 어서 말해 봐, 명.”
옆에 앉은 노미현의 품에 안겨 흐느끼던 명이 조금씩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을 전하면서 노미현도 계속 눈물을 흘렸기에 전언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진천에게 비극이 일어났음을 좌중이 알아차리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비통한 공기가 다연실을 가득 채운 가운데 현실을 부정하는 하수린의 날카로운 음성이 정적을 찢었다.
“말도 안 돼. 지금 그가 죽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사벌에서 치른 사투에서 입은 내상의 여파로? 그렇다면 월교는 왜 갔으며 검후는 어떻게 이겼어? 그리고 정맹엔 뭣 때문에 들렀어? 그럴 여력이 있었으면 이리로 곧장 오지 않고? 나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어. 솔직히 털어놔, 명. 지금 심한 장난을 치는 거지?”
소중걸이 흥분하는 하수린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의 만류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고 말았다. 하수린이 명에게 더욱 공격적인 언사를 퍼붓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의 사나운 어투에 명이 안면을 일그러뜨리자 모두들 좌불안석이 되었다. 자칫하다간 두 여인 사이에 싸움이 벌어질 판이었다. 그리 되면 결과는 뻔했다. 하수린은 절정의 강자였으나 진천과 팔대무왕을 제외하면 당금 무림의 최강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개산철권과 평수를 이루었다는 명에겐 역부족이었다. 권왕이 벽력도문으로의 출정에서 당했던 중상에서 회복되지 않았기에 명이 분노하면 그녀를 말릴 수 있는 이도 없었다.
긴박한 상황을 수습한 이는 침중한 심정을 만면에 드리운 채 침묵을 지키고 있던 권왕이었다.
“그만 해라. 저 아이를 몰아붙일 일이 아니다.”
감히 권왕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거니와 초절정 극상의 무위를 지닌 명과 대립해서 이로울 게 없었기에 하수린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권왕이 명에게 물었다.
“아우의 임종을 지켰느냐?”
아직도 눈가에 물기가 고인 노미현이 ‘어버버’하는 명의 말을 옮겨주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면서 떠났대요.”
“어디로?”
“그건 모른데요. 그냥 아주 급하다고만 했대요.”
권왕은 일자 눈을 질끈 감았다. 진천이 남천도왕을 처리하기 위해 사벌로 갔으리라고 여긴 것이었다. 사벌에서 아무런 소식이 올라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리로 가던 도중 어딘가에서 진천의 숨이 끊어졌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한 권왕의 눈에서 진물 같은 누런 눈물이 흘러내렸다. 위대한 무존(武尊)이 떨구는 눈물에 좌중이 숙연해졌다.
여상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성통곡했다. 다른 이들은 소리 죽여 울었다. 권왕이 여상구에게 호통 쳤다.
“추태부리지 마라, 아우야.”
경황 중에도 여상구는 귀를 의심했다.
“지금 제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어르신?”
“추태 부리지 말라고 했다. 막내아우가 네 꼴을 보면 얼마나 실망하겠느냐? 우리가 할 일은 상갓집의 상주마냥 허망한 눈물이나 질질 짜는 게 아니라 그 아이의 유지를 받들어 죽는 날까지 파사현정의 대업에 헌신하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이니라. 그리고 앞으로는 내게 어르신이라고 부르지 마라. 형님에게 그런 호칭은 하는 법이 아니다.”
여상구는 감읍했다. 그와 권왕은 각각 진천과 형제결의를 한 바가 있으나 권왕은 그에게 냉랭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랬던 권왕이 방금 그를 의제(義弟)로 삼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형님. 아우님의 뜻과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목숨을 바쳐 사마의 무리를 이 땅에서 쓸어버리겠습니다.”
여상구에 이어 너도나도 결의를 밝혔다.
좌우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던 권왕이 명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우가 떠나기 전에 우리에게 남긴 말이 없더냐?”
기다렸다는 듯 명의 삐뚠 입술에서 터진 봇물처럼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노미현은 명의 말을 옮기는데 몹시 애를 먹었다.
양도 많았거니와 순서가 뒤죽박죽 섞여있어 맥락을 짚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 연유로 세평회 인사들은 밤이 이슥해서야 이야기의 윤곽을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명은 진천이 집보각주 문중석과 나눈 대화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야 했다. 권왕을 비롯한 모두의 표정이 더 없이 심각해졌다.
“허어, 어째 이런 일이…….”
권왕이 마무리 짓지 못한 감상은 모두의 심경을 대변한 것이었다. 무황의 부활만 해도 믿기 어렵거늘 난데없이 천마라니. 만약 무황이 정말로 삼백 년 전 수백만의 인명을 무참히 학살했던 악마의 무력을 가지고 돌아온다면 천하는 감당불가의 위난에 처할 터였다. 문중석의 분석에 따르면 최소한 사왕(四王)이 연수해야 그 괴물과 대적할 수 있다지 않은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위였다.
“서둘러 대책을 세워야겠구나. 우선 사패의 주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아니 남천도왕은 빼야겠구나. 제 손자의 껍질을 쓰고 올 무황, 아니 천마던가, 아무튼 남천도왕 그 위인이 협조를 할 리가 없으니. 일단 강 맹주와 검후에게, 아니, 아니다. 소 형이 호야곡에 있다고 했지? 당장 그에게 가서…….”
휘파람 같은 명의 목소리가 권왕의 횡설수설을 중단시켰다. 맞은편에 앉은 명을 쏘아본 권왕이 노미현에게 눈을 돌렸다.
“저 아이가 뭐라는 게냐?”
명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은 노미현이 가지런히 뻗은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진 공자가 이 부분에 관해 따로 언질을 준 모양이에요. 검왕 어르신을 설득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니 그냥 두어야 한다는 군요.”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게냐?”
명이 바로 답을 주었다. 모두들 노미현이 옮기는 그녀의 말, 보다 정확하게는 진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육천 리 북녘에서 친인들이 그가 명을 통해 전한 당부를 가슴에 새기는 동안 진천은 가린의 팔에 안겨 밀림에 들어서고 있었다.
진천은 오감 중 유일하게 남아있던 청각마저 닫고서 의식을 한 군데에 모았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환인의 비술을 그의 무영에 접목시켜 새로운 지평을 여는데 오롯이 몰두할 참이었다.
신기하게도 궁구에 들자마자 ‘뼈를 긁어내고 싶은’ 가려움이 일었다. 감각이 마비된 육신에서 올라왔을 리는 만무하니 그의 정신에서 움튼 욕망일 터였다. 가려움은 어지러움으로 대체되었다. 수많은 면과 선과 점 들이 온갖 형태를 그려내며 그의 머릿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기형(奇形)들과 씨름하며 진천은 몰아지경에 빠졌다. 진천은 의식 속에 명멸하는 점과 선 들을 일일이 살펴가며 무한히 펼쳐진 공간을 꾸준히 나아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가 유영하고 있는 곳이 자신의 내부임을 깨닫고는 소스라쳤다. 광대한 우주에서 그의 몸은 티끌보다 작은 미물일 터이지만 그 자체로 작은 우주이기도 했다. 그것은 만물을 품고 있으면서도 텅 비어 있는 우주였다.
진천은 갈구했다. 전후좌우의 구별이 무의미한 우주지만 그 안에서 올바른 방향을 찾을 수 있기를.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다른 차원의 경계를 만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