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44
제243화
천하의 정세가 급변했다.
반백 년 동안 존속했던 중립지대를 단 며칠 만에 무너뜨리고 저마다의 몫을 차지했던 사패(四覇)는 십이월 십이일을 기해 전격적으로 그들이 장악했던 지역으로부터 철수했다. 하루아침에 복원되었지만 중립지대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특히 마련과 사벌이 점령했던 곳들은 예외 없이 극심한 혼란이 발생했다. 과거에 그곳들을 다스리던 지배방파들이 대부분 멸문의 참화를 입은 후과였다.
공백을 틈타 터전을 마련하고자 하는 사마(邪魔)의 무리들이 중립지대를 횡행하며 판을 쳤다. 그러나 그들의 발호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탕마멸사(蕩魔滅邪)의 기치를 내건 세평회의 고수들이 전면에 나서 그들을 쓸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태극마선에서 태극선군으로 별호가 바뀐 여상구를 필두로 한때 장마로 불렸던 태양장(太陽掌) 소중걸, 자하검선 팽하연, 하남편봉 하수린, 그리고 금강권 고량은 중립지대 전역을 누비며 마련의 외마(外魔)들과 사파의 악종들을 무자비하게 사냥했다. 불과 한 달 새 그들에게 걸려 횡액을 당한 자들의 수가 육백에 육박했다. 초절정의 강자만 셋인데다 나머지 두 사람도 절정의 강호인지라 아무도 그들을 대적하지 못했다.
세평회는 사패를 발아래 두는 천하제일세(天下第一勢)로 군림했다. 이는 전적으로 신황 진천의 존재 덕분이었다. 사패가 중립지대라는 노다지를 포기하고 철수한 것도 그의 강요로 인한 결정이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사패를 굴복시킨 신황은 일천 년 무림사를 통틀어 오직 천무대제만이 도달했다는 초월지경에 도전하기 위해 십 년을 기한으로 폐관수련에 들었다고 알려졌다.
설사 신황이 아니더라도 세평회가 단일 세력으로는 지상 최강이라는데 이견이 없었다. 권왕이 도사리고 있는데다 사파 무림의 이인자인 개산철권과 평수를 이루었던 소신녀(小神女)까지 품고 있어서였다.
소신녀는 세평회의 다른 인사들과 달리 악인들을 처단하러 출전하지 않고 줄곧 삼보장에 머물렀다. 권왕에게 권공을 전수받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녀가 검후와 검왕에 이어 권왕의 사승을 잇게 되었다고 알려지자 온 천하가 경동했다. 세인들은 소신녀가 장차 신황의 유일한 경쟁자가 될 거라고 수군거렸다.
해가 바뀌기도 전에 세평회는 중립지대의 맹주로 자리매김했다. 사벌과 마련이 차지했던 땅엔 정파 성향이 강한 무인들이 주축을 이룬 방파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세평회는 엄격한 심사를 거쳐 그들과 함께 할 이들을 벗으로 받아들였다. 절대다수가 정파 출신이었으나 흑창 동이승이나 반뇌(反腦) 조칠(趙七) 같은 사파의 명사들도 끼어있었다. 극소수이긴 하나 마련을 떠난 마인들 중 일부도 세평회의 우군이 되었다.
세평회를 중심으로 한 신흥문파 연합은 일백 일도 지나지 않아 완벽하게 중립지대의 패권을 틀어쥐었다. 그들의 위세에 눌려 사마 무림의 잔당들은 중립지대 근처엔 얼씬거리지도 못하고 몸을 사렸다. 바야흐로 세평회의 전성시대가 펼쳐질 참이었다.
봄바람이 남녘의 꽃망울부터 터뜨리며 서서히 북상했다. 겨우내 기승을 부리던 동장군은 끈질기게 버티다 천리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퇴군해야만 했다.
천하에 그득한 봄기운이 사람들의 마음도 부드럽게 풀어주었으나 대륙 곳곳엔 아직 꽁꽁 얼어붙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마련 창립 기념일을 맞아 마원(魔原)에 운집한 삼백여 마두(魔頭)들도 거기에 속했다.
사파의 무인들과 마찬가지로 마련의 마인들은 지난 넉 달 내내 공포에 시달렸다. 신황이 폐관수련을 마치고 세상에 다시 나오는 날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불문가지였다. 신황의 행적과 성향을 감안하면 마도의 붕괴는 필연지사였다.
마인들은 작년 가을 세평회의 인사들을 대동한 신황이 오양과 용천, 그리고 자성과 문천 등지에서 벌인 학살극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폐관수련을 통해 무적의 무위에 이른 신황은 단숨에 마련을 짓밟고 마인들을 몰살하려 들 것이었다. 예견된 미래였지만 예방할 방도가 없었기에 마인들로서는 그저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축제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절망의 기운만 안개처럼 퍼진 들판에서 사마류의 마인들은 그들의 무기력한 수장을 쏘아보았다. 원래는 각지에서 진상한 상품(上品)들을 서넛씩 옆에 끼고 광란의 난장을 즐겨야 했으나 계집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여자를 겁간한 자들은 무조건 사형에 처한다는 세평회의 준칙을 의식한 탓이었다.
제 땅에서도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없는 처지가 심히 황당하고도 서러웠으나 그나마 목숨을 보전할 희망을 가지려면 자중해야만 했다. 폐관수련에 들기 전 신황이 악인일지라도 죄를 뉘우치고 개전의 정을 보이는 이들에겐 출관 후 선처를 베풀겠다고 공언했다는 풍문이 퍼진 후 벌레만도 못한 노예들조차도 함부로 죽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욕구불만에 가득한 삼백이십 쌍의 눈총을 한 몸에 받고 선 마왕 권상명이 무거운 입술을 벌렸다.
“오늘 우리는 선대의 전통을 되살려 실전대결로써 진짜 서열을 가릴 것이다.”
김빠진 한숨들이 도처에서 새어나왔다. 수하들의 불량한 행동에 분기가 치솟은 마왕이 살벌한 마기를 분출했다. 하지만 권위가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기에 마인들은 삐딱한 태도를 바로잡지 않고 버텼다. 그들을 상대로 드잡이 질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마왕은 노기를 억눌러야만 했다.
“예고했던 대로 사마류에서 스물다섯 명씩 나와…….”
도마(刀魔) 단리중이 마왕의 말을 끊었다.
“일일이 설명할 것 없소, 련주. 모두들 백마지쟁(百魔之爭)의 형식과 내용을 숙지하고 있으니. 그보다…….”
이번에는 독마(毒魔) 연지강이 도마의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무엄하다, 도마. 련주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감히…….”
도마도 독마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감히? 지금 나한테 ‘감히’라고 했느냐, 연가야? 련주면 몰라도 너 따위가…….”
배신자 소중걸에 이어 장마(掌魔)가 된 화염장 기상길이 다급히 사십 년을 견원지간으로 지낸 두 앙숙 사이에 끼어들었다.
“왜들 이러는가. 진정들 하게. 이러려고 모인 게 아니잖은가. 이러다가 우리끼리…….”
장마도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그의 발언을 중단시킨 이는 초극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던 마왕이었다.
“다들 닥쳐라. 이제부터 내 허락 없이 주둥이를 여는 자는 여덟 조각의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들개들에게 던져줄 것이다.”
살기가 깃든 마왕의 안광에 도마가 못 이긴 척 눈을 떨구었다. 경고를 무시하고 다시 선을 넘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협박으로써 도마를 제압한 마왕이 하던 말을 계속했다.
“사마류에서 각각 스물다섯 명이 나와서 미리 짜두었던 대진표에 따라 차례로…….”
마왕이 갑자기 말을 멈추자 마인들은 어리둥절했다. 아무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지 않은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마인들이 마왕의 시선을 따라 눈을 올렸다. 그러고는 마왕이 입을 다문 까닭을 알았다. 천공 저편에서 두 개의 인영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장내에 떨어져 내린 이들은 일남일녀였다.
그들을 본 마인들이 크게 웅성거렸다. 사내가 누군지는 불분명했지만 여인의 정체는 확실했다.
면사 위에 녹색의 수정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 절대지경의 무존(武尊)들만이 시현할 수 있다는 육지비행술. 그 두 가지 사실을 결합하고서도 하나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바보나 진배없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음에도 숨이 멎을 듯한 미색을 뿜어내는 여인은 독후(毒后) 연진진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약관 어림으로 보이는 사내는 누구란 말인가. 다들 처음엔 신황 진천이 도래한 줄 알고 간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자세히 보니 그는 아니었다. 특징이 없는 용모지만 신황은 눈꼬리가 처져 유순한 인상이라고 했다. 그러나 목전의 청년은 완연한 뱀눈이었다. 눈빛도 정심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괴청년의 정체가 무엇이건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그 나이에 그 정도의 경공을 구사할 수 있는 이는 신황 밖에 없었다.
마인들 중 몇몇은 팔대무왕 중 경신에 관해서는 으뜸으로 평가받는 독후가 청년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날아온 건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다가 근처에 와서 청년을 놓아주었다면 그들이 본 광경은 납득할 만한 것이었다.
미지의 청년을 일별한 마왕이 독후에게 알은 체를 했다.
“오랜 만이오, 독후. 여긴 어쩐 일이오?”
독후는 마왕의 질문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마왕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지난 몇 달 간 눌러두었던 울화가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마왕이 독후고 나발이고 막말을 쏟아내려는 찰나 마인들 중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저자는 벽력도문의 몰살도(沒殺刀)다!”
독후와 일전도 불사하려던 마왕이 시선을 청년에게로 옮겼다. 다른 마인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눈에도 짙은 의구심이 떠올라 있었다.
남천도왕의 손자이자 사파 무림의 미래로 불렸던 몰살도 곽건은 명성을 얻고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작년 십일월 초하루 양자호에서 신황과 비무를 치르다 단전이 파괴되는 중상을 당해 폐인이 되었다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어떻게 무왕들이나 가능한 육지비행술을 펼쳐 보이며 천공을 날아올 수 있었단 말인가.
뒷짐을 지고서 마왕을 깔보듯 쳐다보던 곽건이 방금 전 눈썰미 좋은 마인이 외친 별호를 정정했다.
“나를 알아보다니 기특하긴 하지만, 본좌는 몰살도가 아니라 신마(神魔)다.”
독후 대신 곽건에게 방문의 목적을 물으려던 마왕은 입을 닫았다. 어이가 없으면 말문이 막히는 법이었다. 신마라니. 너무나 광오한 명호가 아닌가.
마왕에게서 눈을 돌린 곽건은 마인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표정마다 당혹감과 조소와 (그가 아니라 아마도 독후로 인한)불안감이 섞여 있었지만 경외감을 드리운 면상은 하나도 없었다. 상관없었다. 이제 곧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가 그를 경배하게 될 것이었다. 본보기로 염왕전에 보낼 몇 명만 빼고.
삼천리 대막(大漠)을 건너 어젯밤 산서 무림에 들어선 곽건은 오늘 오전 백원(白原)의 흑문 분타에서 그가 중원을 떠났던 지난 다섯 달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파악했다. 천하가 원수의 수중에 떨어졌음을 알게 됐지만 분노보다는 쾌감이 일었다. 썩 잘 된 일이었다. 높은 곳에 있을수록 추락의 고통이 클 것이었다.
원수에 대한 압도적인 우세를 확신하면서도 곽건은 한편으로는 간담이 서늘했다. 그의 원수는 실로 무서운 자였다. 팔대무왕을 능가하는 무력을 현시했다니. 언젠가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오면 실제로 초월지경의 무위에 이르러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더라도 설마 질 일이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의 기회마저도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했다. 아울러 소신녀라는 어린 괴물도 반드시 손을 보아야 했다. 구태여 후환의 씨앗을 남겨둘 까닭이 없었다.
주안으로 직행하지 않고 마원에 들른 건 무림의 사정과 원수의 근황에 대해 알아보는 와중에 엉뚱한 정보를 접해서였다. 백마지쟁이라니. 초인시대 마도의 유물이 아닌가.
곽건은 마련이 어째서 뜬금없이 단절된 지 오래된 전통을 되살리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원수가 두려워 몇 달 내내 난장을 피우지 못한 마인들은 자기들끼리 내부에 쌓인 살육의 욕구를 해소하려는 것이었다. 궁여지책이었을 터이나 우스꽝스럽고도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었다.
곽건은 원수를 치러 삼보장에 가는 길에 마원을 경유하기로 했다. 크게 우회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일정에는 별 지장이 없을 터였다. 백마지쟁에 모습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은 건 단순한 장난은 아니었다. 마치 그의 귀환을 환영하기라도 하듯 사마류의 상위 마인들이 마원에 총집결한다니 머리라도 쓰다듬어주고 가는 게 예의였다.
곽건은 원수에게 신황이란 가당찮은 별호를 선사했던 소위 ‘사벌대첩(邪閥大捷)’을 마련의 마인들을 상대로 재현할 속셈이었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절대지존(絶對至尊)이 왕림했음을 만천하에 알릴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