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45
제244화
곽건이 마인들을 둘러보며 이죽거렸다.
“듣자하니 하남 무림에서 기어 나온 쥐새끼가 무서워서 빼앗았던 땅을 스스로 내주고 도망쳐왔다면서? 자기 소굴로 들어와서도 행여나 쥐새끼 심기를 건드릴까봐 꼬리를 바짝 내리고 낑낑거리고 있었다며? 명색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하며 닥치는 대로 사는 족속인데 그래서야 체면이 서겠어? 다들 다리 사이에 달린 걸 떼지 그래? 우선 너부터. 저 한심한 개떼의 대가리니까.”
기묘한 정적이 평원에 깔렸다. 마왕을 포함해 곽건의 발언에 분개하는 마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남천도왕의 손자가 단단히 미쳤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렇더라도 광언을 용인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미친놈이라도 제 말에 책임을 져야했다. 그리고 미친놈은 불문곡직 때려죽이는 게 마인의 방식이었다.
마도의 율법을 집행하기 전에 마왕은 정지작업을 했다. 천지를 모르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를 짓이기는 거야 손바닥 뒤집기만큼이나 쉬운 일이지만 두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하나는 남천도왕이고 다른 하나는 독후였다.
“네 할아비를 믿고 까부는 모양인데 상대를 잘못 골랐다, 애송이. 혀를 함부로 놀린 죄를 물어 일단 다리를 분지르고…….”
곽건의 광소가 마왕의 엄포를 중단시켰다.
“쿠하하핫, 제법 웃길 줄 아는구나. 할아비? 그래, 맞다. 그는 내 할아비지. 하지만 그 역시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나를 경배하게 될 것이다. 할아비가 아니라 할아비의 할아비라도…….”
곽건을 무시하고 마왕이 독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도 정도가 있소. 나는 저 미치광이를 혼내줄 수밖에 없소.”
독후의 면사에서 차가운 옥음이 흘러나왔다.
“맘대로 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한 마왕이 손을 들었다. 허리춤에 매달린 강조(剛爪)를 손에 낄 필요도 없었다.
“잠깐!”
곽건이 마왕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마왕은 마지막으로 인내심을 발휘했다.
“너 혼자 덤비려고? 그건 너무 시시하니 세 놈만 더 붙이자. 어이, 너희들도 나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곽건이 세 명을 차례로 지목했다. 그의 검지에 찍힌 삼인은 공히 안면을 찌그러뜨렸다. 마인들은 헷갈렸다. 남천도왕의 손자는 정확히 삼대마군(三大魔君)을 가려낸 것이었다. 완전히 미친놈이 어떻게 수백 마인들 틈에서 그들을 가려낼 수 있었을까.
도마 단리중은 칼을 뽑아들 의사가 없다는 듯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독마 연지강 또한 눈살만 찌푸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장마 기상길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전날 삼보장에서 네놈 형을 만난 적이 있다. 파도천망인가 뭔가 하는 재롱을 떨더니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제풀에 쓰러지더구나. 보아하니 네가 오늘 그 해골 놈의 흉내를 낼 심산이로구나. 하지만 너는 그놈처럼 운이 좋진 않을 게다.”
독후를 흘낏 쳐다본 기상길이 말을 이었다.
“그놈은 신황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만 너는 구해줄 이가 아무도 없으니 말이다.”
곽건의 면상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러더니 양손을 모았다. 하지만 포권을 취하려는 게 아니었다. 우드득. 깍지를 끼고 손의 관절을 푼 곽건이 칠 척 장신의 기상길을 쏘아보았다.
“가볍게 갖고 놀다 봐 줄지, 아니면 중원에 돌아온 기념으로 화끈하게 목들을 꺾어버릴지 약간 고민했었는데 알아서 내 성가심을 덜어주는구나. 이것으로 결정됐다. 오늘 너희 넷은 전부 염왕을 알현하러 가게 될 것이다. 가서 염왕에게 전해주거라. 이제부터 무지하게 바빠질 거라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곽건이 기상길에게 돌진했다. 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던 기상길은 곽건이 그에게 이르기 전에 장공을 발출했다. 대번에 곽건의 신형이 화염에 휩싸였다. 허탈하리만치 싱겁게 끝난 싸움에 헛웃음을 짓던 마인들이 일제히 헛바람을 들이켰다. 불덩어리가 된 곽건에게서 태연한 음성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무림 최고의 열양장(熱陽掌)이라기에 어느 정도인지 보려고 했는데 하품만 나오는군. 진짜 뜨거운 맛이 뭔지 가르쳐주지, 꺽다리.”
곽건이 말을 하는 도중 위화감을 느낀 기상길이 주춤주춤 물러서더니 등을 돌려 달아났다. 곽건은 그를 쫓는 대신 입김을 내뿜었다. 희뿌연 안개 같은 회색의 기운이 빛살의 속도로 날아가 기상길을 덮쳤다. 그 순간 기상길의 길쭉한 동체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상상 밖의 기변에 대경실색한 마인들이 황급히 곽건에게서 멀어졌다. 즉시 강조를 착용한 마왕이 곽건에게 그의 성명절기인 팔선조강을 날렸다. 여덟 줄기의 강선에 앞서 싯누런 강기가 곽건을 정수리부터 내리찍었다. 도마 단리중이 발한 도강(刀剛)이었다. 도마의 공격이 먼저 곽건에게 닿은 것은 그의 대처가 마왕보다 빨라서가 아니었다. 단지 곽건과의 거리가 가까웠을 뿐이었다.
캉!
쇠몽둥이를 쇳덩이에 내리칠 때 나올 법한 굉음과 함께 도마의 도강이 곽건의 두부에 작렬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마왕의 강조에서 발출되었던 강선들이 곽건의 전신에 꽂혔다. 이미 승부가 난 셈이었으나 뒤이어 독마 연지강의 독장(毒掌)이 몇 조각의 육편으로 화했을 곽건을 휘감았다. 비명을 지를 겨를조차 없이 숨통이 끊어졌는지 곽건에게선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도강과 팔선조강에 의해 양단되고 오체분시 되었어야 할 곽건의 시체가 녹색의 독장 속에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제일 먼저 깨달은 마왕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헉!”
경악성을 뱉자마자 마왕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몸을 날렸다.
목전의 괴물은 괴물 이상이었다. 이런 공포심은 난생 처음이었다. 신황에게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두려움을 느꼈지만 이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올바른 판단이었으나 마왕의 도주는 그의 생존을 보장해주지는 못했다. 경신을 펼치고서 반 호흡도 지나지 않아 하복부에 익숙지 않은 통증을 느낀 마왕은 하늘이 노래졌다. 호신강기를 뚫은 괴물의 손이 뒤에서 그의 척추를 깨고 들어와 단전을 움켜쥔 것이었다.
마왕은 정신 줄을 놓고 싶었으나 불가능했다. 단전이 터졌음에도 그의 체내에 남아있던 내공이 혼절을 막은 탓이었다. 마왕은 괴물이 그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음을 알았다. 기어서라도 도망가야 했으나 무망한 짓임을 인지한 마왕이 눈을 들어 괴물이 벌이는 살육전을 지켜보았다. 귀로는 괴물의 음성이 흘러들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마.”
괴물의 명을 거역하는 이들은 둘 밖에 없었다. 도마와 독마였다. 마왕은 이지가 마비된 중에도 경탄했다. 사력을 다해 서로 반대방향으로 경신을 전개했던 두 마군을 추적한 괴물이 둘 다 붙잡는 광경을 목도한 것이었다. 상상불가의 빠르기였다.
마왕은 수긍했다. 그가 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저런 괴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여든 성상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자 마왕은 저승사자가 도래했음을 알았다. 일순 욕지기가 치밀었다. 이대로 끌려가기엔 너무나 원통했다. 이제 전성기에 접어들었는데. 절대지경의 무왕들이 여덟 명이나 득시글거리는 괴상한 시대만 아니었다면 진즉 무림을 평정하고 마도천하를 열었을 터인데.
하늘을 저주하고 세상을 저주하고 운명을 저주하던 마왕은 욕설을 그쳐야 했다. 무언가가 그의 입술을 내리눌렀기 때문이었다.
양손에 도마와 독마의 목을 틀어쥐고 오른발로 마왕의 면상을 짓밟은 곽건이 혼백이 빠져나간 채 얼어붙은 삼백여 마인들을 오시했다.
“누구부터 죽여줄까?”
곽건의 질문에 수백 개의 간이 오그라들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곽건이 자답했다.
“나한테는 큰 벌레, 작은 벌레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순서대로 보내줘야겠지? 일단 너부터.”
곽건이 발에 힘을 주자 마왕의 얼굴이 으깨졌다. 곽건은 머리를 잃은 마왕의 몸뚱이를 걷어찼다. 마인들은 사십 년이나 그들을 지배했던 절대자의 비참한 최후를 멀뚱멀뚱 보고만 있어야 했다. 너무나 허망한 종말이었다.
마왕을 처리한 곽건이 독마와 도마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두 노마(老魔)의 양안에 구명의 원(願)이 가득했다. 입을 벌릴 수 있었다면 살려달라고 애걸했을 것이었다.
곽건은 행동으로써 그들의 바람을 묵살했다. 뚜두둑, 목뼈가 부러지는 기음이 일세를 풍미했던 마두들의 죽음을 알렸다. 평생 앙숙으로 지냈던 도마와 독마는 한날한시에 이승에 작별을 고하고 저승길의 동반자가 되었다.
곽건은 흡족했다.
그럴 거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실전에서 신력(神力)을 확인한 것은 느낌이 달랐다. 마왕의 강기에 직격을 당하고도 그의 육신은 끄떡없었다. 진정한 금강불괴지체가 된 것이었다. 천외천의 존재인 천무대제가 환생하지 않는 한 천하의 누구도 그의 몸에 흠집을 낼 수 없을 터였다.
화염장을 순식간에 녹여버린 신무(神霧)도 만족스러웠다. 마왕에게 쓰지 않았던 경솔함은 약간 아쉬웠다. 하지만 곽건은 그의 신무가 절대지경의 무존들에게도 통하리라 확신했다. 설령 그들의 호신강기를 단번에 녹이지 못하더라도 별 문제는 아니었다. 신무와는 별개로 그에겐 마왕을 단숨에 짓이긴 압도적인 힘이 있기 때문이었다.
곽건의 뱃속에 팔대무왕 전원을 상대해도 우위를 점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똬리를 틀었다.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심혼을 수백, 수천, 수만 번 찢기는 지옥지관을 끝까지 버틴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이제는 노고에 대한 보답을 얻어야 할 때였다.
곽건의 눈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는 독후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냉담한 녹안을 본 곽건이 뱀눈을 실룩거렸다. 좋았던 기분이 한 순간에 달아났다.
그녀는 마땅히 승전보를 거둔 그의 전리품이 되어야 했다. 모름지기 계집이란 강한 사내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던가.
빌어먹을.
곽건이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힘으로 그녀를 제압하는 건 간단했다. 하지만 시신을 취하고 싶지는 않았다. 독후는 자신의 독언을 실행하고도 남을 여자였다. 몸에 손을 대는 순간 자폭할 게 뻔했다. 결국 두 번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는 참아야 했다. ‘그자들’의 목을 건네면 몸을 허락하겠다는 독후의 말을 믿어야 했다.
독후를 바라보고 있자니 간신히 진화했던 욕정의 불길이 다시 타올랐다. 이러다간 성급한 짓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여긴 곽건이 억지로 눈을 마인들에게로 옮겼다.
“다리가 뻣뻣하구나. 아직도 무릎들을 펴고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니.”
말귀를 알아들은 마인들이 강풍에 쓰러지는 볏단들처럼 일제히 땅바닥에 엎드렸다. 곽건이 사자후를 토해냈다.
“본좌를 떠받드는 자들에겐 이승의 모든 영광과 쾌락을 보장해 줄 것이다. 그러나 나를 거역한다면 방금 전 내가 저승으로 내쫓은 자들의 꼴을 면치 못할 터. 어찌 하겠느냐들?”
불필요한 질문이었다. 환난이 대운으로 바뀌었음을 깨달은 마인들은 환호작약하며 너도나도 충성을 맹세했다.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내뱉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선언이었다.
신마를 연호하고 칭송하며 마인들이 내지른 함성으로 온 평야가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이 들썩거림은 곧 대륙 전역으로 확산될 것이었다.
곽건이 가공스러운 신위를 과시하며 마련을 통째로 삼킨 그 시각 마원으로부터 남동으로 일만 리 떨어진 남해의 고도(孤島)에선 진천이 오랜 잠으로부터 깨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