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46
제245화
무아지경에 빠져 무수한 점과 선들 사이를 떠돌던 진천은 의식을 되찾았다.
그를 깨운 것은 절박한 목소리였다.
“어서 정신을 차리라니까, 이 녀석아.”
공 노인의 목소리였다.
진천은 눈을 뜨고 싶었지만 가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 노인은 그의 의식이 돌아왔음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잘 듣거라. 이제 가린의 발톱이 네 뒷목을 찌를 게다. 그러고 곧바로 빙옥관이 대추혈(大椎穴)에 꽂힐 게야. 옥관에는 홍린사의 독이 들어있다. 선가(仙家) 약문(藥門)의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놈이었지만 독액을 남김없이 뽑아냈다. 솔직히 어느 정도의 양이 적당한지 나도 알지 못한다. 여기서부터는 하늘의 소관이다. 아니, 네게 달려있다. 부디 해내려무나.”
답변할 수가 없었기에 진천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잠시 후에 감각이 돌아올 게다. 단단히 대비하고 있거라. 목 뒤에 따끔한 느낌이 드는 순간 홍린사의 독이 네 속으로 들어갈 테니. 범인이라면 즉사를 면치 못할 테지만 너는 촌각이나마 견딜 수 있을 게야. 사독(蛇毒)이 혈맥을 따라 네 몸을 일주천할 때……, 아니, 아니다. 그게 될 리가 없다. 이건 그저 미친 짓이야.”
진천은 이독제독의 비방(祕方)을 실행하기도 전에 실의에 빠진 공 노인이 안쓰러웠다. 터무니없으리만치 낙천적인 성격을 가진 공 노인의 자포자기는 이 모험이 성공할 가능성이 그만큼 희박하리라는 반증이었다.
진천은 자기에게 맡기고 마음을 편히 먹으라고 공 노인을 위무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가린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공 노인이 역정을 내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 이왕 시작한 거, 끝장을 보자.”
대추혈에서 시작된 공 노인의 설명은 뇌호혈(惱戶穴)에서 종결되었다. 진천은 그가 전날 알려준 역천기결의 경로를 공 노인이 기억하고 있음을 알았다.
“눈꺼풀이 떨리는 걸 보니 이제 감각이 돌아왔구나. 준비해라. 바로 들어간다.”
갑자기 만근거석에 깔린 듯한 압박감이 생기더니 진천의 전신에 경련이 일었다. 그러고는 벌에 쏘인 것처럼 목덜미가 따끔거렸다.
공 노인이 예고대로 잠시의 지체도 없이 홍린사의 독이 든 빙관을 꽂았음을 감지한 진천은 바짝 긴장했다. 그의 생사를 건 일전을 치러야 할 때였다.
진천은 공 노인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그가 스스로 마련했던 방책을 실천했다.
단전의 내공을 모조리 끌어올린 진천은 체내에 들어온 이물(異物)에 맞서는 대신 호신강기를 씌우듯 그것을 감쌌다. 천지간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맹독은 마치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인 귀인처럼 외부와 차단된 채 진천의 몸 속을 휘돌았다.
진천은 필사적으로 그의 내부를 보호했다. 사독이 그의 장기를 침범하는 순간 염왕전에 직행할 게 틀림없었다.
사독이 명치 어림에 이르렀을 때 진천은 갈등했다. 잘 하면 거궐혈(巨闕穴)에서 사독을 내보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남철에 쇳가루가 달라붙듯이 사독에 끌린 그의 체독까지 한꺼번에 몰아낸다면 단박에 문제를 해결하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외면하기 어려운 유혹이었으나 진천은 과감히 떨쳐버렸다. 체독과 함께 빠져나갈 공력의 상실을 두려워해서가 아니었다. 섣부른 결단임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조바심을 경계했다. 무르익기 전에 열매를 따먹으려 들다간 쓴맛만 보게 될 터였다. 그 쓴맛은 그의 죽음을 의미했다.
침착함을 되찾은 진천은 그의 내부를 질주하는 야생마를 조금씩 길들여나갔다. 사독을 따라서 혈류를 주유하던 체독이 서서히 덩어리지기 시작했다. 용해되기 전의 독정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진천은 전혀 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의 덩어리는 이를테면 생기가 소진된 시체나 진배없었다.
일순지간 하복부에서 극심한 통증이 올라왔다. 진천은 이를 악물었다. 한계였다. 더 이상 버티다간 단전이 깨지고 내장이 터질 게 뻔했다. 그렇다고 사독과 체독을 배출할 수도 없었다. 진천은 지금 독들을 내보내면 그의 명도 동시에 끊어질 것임을 직감했다.
진퇴양난이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었다.
생사의 기로에서 진천은 문득 무영을 떠올렸다.
그것은 무영이되 이전의 무영이 아니었다. 공 노인이 그를 깨우기 직전 진천은 고대 환인들이 구현했다는 신비의 요체에 근접해있었다. 그의 심득은 천지만물에 내재된 공허의 발견이었다. 모든 것은 꽉 차 있으면서도 텅 비어 있었다. 인체도 만물의 일부이니 그 발견이 적용될 터였다.
문제는 의지로써 빈 공간을 활용할 수 있을지 여부였다. 당대 최고의 환인이라 자부했던 여량은 손가락 한마디만큼 그 비술을 부릴 수 있었다. 근본적인 원리가 같다면 몸 전체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것이 진천의 구상이었다.
물론 이론과 실현은 완전히 별개의 범주였다. 진천은 아직도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 어쩌면 환기를 타고난 환인에게만 허락된 영역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환술에서 비롯된 팔영보를 평범한 사람인 그가 구사할 수 있었다면 그 비법 또한 흉내라도 낼 수는 있지 않을까, 진천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죽기 전에 시도라도 해보고 가야 했다.
진천은 눈을 떴다.
그러자 공 노인의 흥분한 목소리가 귀에 쏟아졌다.
“대체 어떻게 한 게냐?”
질문에 답하지 않고 진천은 몸을 일으켰다. 상체를 반쯤 세우기도 전에 진천은 깜짝 놀랐다.
벌거숭이가 된 그의 몸은 가린의 면상처럼 푸르죽죽했다. 그러나 진천이 놀란 이유는 살갗의 색깔이 아니었다.
탄탄한 근육질이었던 그의 육신은 흡사 해골을 방불케 했다. 뼈에 살가죽만 붙은 것처럼 앙상했던 대웅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무슨 수로 홍린사의 독을……”
공 노인이 질문을 반복할 겨를을 주지 않고 진천이 불쑥 물었다.
“얼마나 지났나요, 할아버지?”
백미를 꿈틀거리며 불만을 내비치면서도 공 노인이 답을 주었다.
“족히 두 시진은 이리 비틀고 저리 뒹굴며 난리를 피웠느니라. 괜히 도와준답시고 건드렸다가 역효과가 나면 곤란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홍린사의 독을 주입받고도 숨통이 붙어있어 좋은 징조라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하시라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내내 조마조마했느니라. 도저히 가망이 없는 일이라 생각했거늘 어떻게 해결한 게냐? 역천기결은 정녕 천리를 거스르는…….”
공 노인의 장광설이 이어지기 전에 진천은 그의 오해를 바로잡았다.
“저는 창인을 떠난 지 얼마나 지났는지 물었던 거예요, 할아버지.”
공 노인이 허연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글쎄다. 일일이 세어보지 않았는데……. 석 달은 무조건 넘었을 테고 어쩌면 넉 달, 아니 다섯 달이 지났을지도 모르겠구나.”
진천은 거죽만 남은 자신의 몸을 보았을 때보다 더 놀랐다.
“어째서 그렇게 오래 걸렸나요?”
진천의 말을 비난으로 해석한 공 노인이 벌컥 화를 냈다.
“이 녀석아, 그간 우리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아느냐? 예까지 오는 한 달 동안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늘이 준 내 복운과 가린의 천력이 아니었다면 못해도 열 번은 황천길에 올랐을 게다. 그리고 홍린사가 장터의 푸줏간에서 돈만 내면 얻을 수 있는 고깃점 같은 건줄 아느냐? 용이나 만년금구 정도의 영물은 아니지만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결코 접할 수 없는 귀물이란 말이다. 그나마 가린이 심해에 들어가도 끄떡없는 몸을 갖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예 잡을 꿈도 꾸지 못했을 게다. 가린은 하루도 빠짐없이 저 바다를 들락거렸다. 목숨을 걸고서. 백독불침인 가린이라도 홍린사에 물리는 순간 비명횡사할 게 빤하잖으냐.
나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매일 보명단(保命丹)을 녹여 네 입술에 흘려놓고 몸이 썩지 않도록 이틀에 한 번씩 약액을 발랐느니라. 이런 말까진 하지 않으려고 했다만 네 명줄을 보존하느라 평생 모아온 귀한 약재를 다 썼다, 이 녀석아. 기실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보명단이 두 알밖에 안 남았을 때 마침 가린이 홍린사의 목을 움켜쥐고 나온 덕분에 네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게야.”
진천은 낯선 공 노인의 언설을 끝까지 들었다. 차마 도중에 말을 자를 수 없었다. 공 노인이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그리고 고마워요. 가린, 너도 고마워.”
가린이 멋쩍은지 진천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모로 돌렸다.
격앙되었던 공 노인의 음성이 가라앉았다.
“사과나 감사를 받자고 한 소리가 아니다. 네 녀석이 작별인사도 없이 떠날까봐 몇 달이나 애를 태우다가……. 아무튼 이리 살아났으니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공 노인의 노안에 고인 물기에 진천은 가슴이 뭉클했다. 새삼스럽게 공 노인을 바라본 진천은 그가 십 년은 늙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백 세가 넘는 고령임에도 혈색 좋던 얼굴엔 전에 없던 검버섯이 피어있었다.
뗏목은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세 개의 통나무를 넝쿨로 묶어 만든 조악한 뗏목 위엔 세 사람이 타고 있었다. 뗏목에 엎드린 채 팔을 노 삼아 젓고 있는 가린과 그의 등에 올라탄 진천과 공 노인이었다.
백설만건곤의 풍경 다음으로 보고 싶었던 망망대해가 시야를 가득 채웠지만 진천은 별 감흥이 없었다. 먼 대륙의 안위에 대한 염려가 그의 머릿속을 장악한 탓이었다.
진천은 마음이 급했다. 무황이 이미 중원에 도래했을 것만 같았다. 그가 간다고 천마의 신력을 품고 돌아올 무황을 막을 방도는 없지만 그래도 힘을 보태야했다.
진천은 두 팔을 번갈아가며 열심히 뗏목을 몰고 있는 가린을 독촉하고픈 욕구를 눌렀다. 가린이 전력을 다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초절정의 무력을 지녔으나 가린은 절정의 상(上)만 되어도 구사할 수 있는 수상비(水上飛)를 펼치지 못했다. 촌각의 시간도 아까운 진천으로서는 못내 아쉬운 일이었다.
푸른 하늘에 붉은 노을이 깔렸다.
칼로 자른 듯 하늘과 바다를 가르며 깨끗한 일자로 뻗어있던 수평선에 우둘투둘한 요철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육지였다. 그러나 진천은 뭍에 이르려면 아직도 한참 더 가야 함을 알았다.
예상대로였다. 어느덧 해가 지고 어둠이 하늘과 바다의 색을 지워버렸지만 수평선에 깔린 그림자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어쩌면 날이 밝을 때까지도 해안에 닿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진천이 생각한 순간 갑자기 기변이 일어났다. 전조도 없이 강풍이 일더니 뗏목을 해수면 위로 날려버린 것이었다.
진천과 공 노인이 튕겨나가자 벌떡 일어선 가린이 그들이 바다에 빠지기 전에 낚아챘다. 그러고는 재빨리 뗏목 위에 올라섰다. 격랑 속에서 용케 중심을 잡은 가린은 바람을 이용해 물 위를 쏜살같이 내달았다.
전회위복이었다. 가린의 임기응변 덕분에 위기를 벗어난 일행은 해풍의 도움으로 시간을 곱절은 단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래가 깔린 해변이 시야에 들어오자 가린은 지긋지긋한 물에서 해방된 기쁨을 토해내며 포효했다. 그러고는 뗏목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가린이 육중한 체구를 날려 백사장에 상륙하기 한 시진 전 일만 리 북쪽에서는 일남일녀가 천공을 가르며 날아가고 있었다. 마원을 떠나 삼보장으로 향하고 있던 곽건과 독후였다.
멀리 완만하게 누운 산등성이의 윤곽을 본 곽건의 눈에 불길이 솟았다. 저 자유산(慈幼山)을 넘으면 바로 주안이었다. 이제 잠시 후면 원수를 만나 전날의 치욕을 되갚아 주게 될 터였다.
곱게 죽일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일단 원수의 하반신을 녹여 도주불능으로 만든 후 그의 목전에서 그가 아끼는 자들의 목을 하나씩 뽑아줄 참이었다. 그들의 비명과 친인들의 구명을 간청할 원수의 애원은 복수의 풍미를 한껏 돋워줄 것이었다.
잠시 후에 누리게 될 즐거움이 심상을 채우자 곽건은 시원하게 소변을 갈기는 취객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상만으로도 통쾌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쾌감을 만끽하기 위해 곽건은 속도를 올리기로 했다. 독후는 느림보였으나 그가 원수와 피라미들을 붙잡을 때까지는 삼보장에 당도할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