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47
제246화
곽건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그와 이 장을 떨어져 나란히 달리고 있던 독후에게 통보했다.
“알고 있겠지만 저 산 너머가 주안이오. 삼보장의 위치를 안다니, 나 먼저 가겠소.”
독후의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속도를 올렸던 곽건은 경신을 중단해야만 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뒤에서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잠깐. 뭐 잊은 거 없어?”
신형을 멈춘 곽건이 물었다.
“뭘 말이오?”
독후는 대답대신 섬섬옥수를 들어올렸다. 곽건은 그녀의 손길을 따라 보라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황혼녘의 서천(西天)을 올려다보았다. 독후의 손짓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곽건이 욕설을 내뱉었다.
“제길!”
면사 위에서 독후의 봉목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것이 조소(嘲笑)임을 알았기에 곽건은 심화가 일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오. 반의반 각이면 삼보장에 갈 수 있고 그자들을 사냥하는 데는 그 절반이면 족하오.”
독후의 아름다운 녹안에 걸린 비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 그럼 가 봐.”
“…….”
“왜? 자신이 없어?”
곽건은 독후를 때려죽이고 싶은 욕망을 참아야 했다. 위험 수위임을 지각했는지 독후는 더 이상의 자극은 삼갔다.
“금방 해가 떨어질 거야. 서두르면 일몰 전에 삼보장에 닿을 수야 있겠지만 그 아이에게 손을 쓸 여유가 있으리라 장담하진 못할 걸. 안 그래?”
여전히 묵묵부답인 곽건을 주시하며 독후가 말을 이었다.
“만약에 그 아이를 잡기 전에 네 몸을 ‘그’에게 내주어야 하면 어떻게 될까? 그는 그 아이에겐 관심도 없어. 하지만 그 똑똑한 아이는 틀림없이 네가 무적지체가 되었음을 알아차릴 거야. 어쨌거나 겉모습은 너니까 겁이 나서는 패거리를 이끌고 달아날 테지? 그러고는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 숨어서…….”
곽건이 독후의 말을 끊었다.
“됐소. 그래서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소리요?”
“간단해. 선후를 바꾸는 거야. 그 아이에 앞서 검왕을 먼저 잡으러 가면 돼. 그 일을 끝내고서 날이 밝기 전에 이리로 돌아오면 네 먹잇감을 해치울 수 있어. 어때?”
곽건은 울화통이 치밀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독후의 말마따나 시간이 어중간했다. 서두르면 해가 서산을 넘기 전에 삼보장에 당도할 수 있을 테지만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는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단순히 원수를 죽이는 거라면 해낼 수 있을 듯싶었으나 곽건은 한 마리의 쥐새끼도 놓치기 싫었다. 원수는 무기력함과 비통함에 젖은 채 이승을 떠야만 했다.
곽건은 마원에서 괜한 짓을 벌였음을 후회했다.
마인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고무되어 일장연설을 하느라 아까운 시간만 잡아먹었다. 그 지체만 아니었다면 벌써 원수의 눈앞에서 쥐새끼들의 목을 뽑고 지금쯤 느긋하게 원수를 잘근잘근 씹어 먹고 있었을 터였다.
한편으로는 독후에게 부아가 치밀었다. 설령 마원에서 반 시진을 낭비했어도 그녀가 허리에 팔을 두르도록 허락해주었다면 진즉 삼보장에 도착했을 터였다. 굼벵이처럼 느려 터졌으면서도 독후는 절대로 그에게 몸을 맡기려 들지 않았다. 음심의 발로가 아니라 단지 경신의 속도를 올리고자 할 뿐임에도.
뱀눈을 한껏 씰그러뜨려 독후에 대한 불만을 여과 없이 드러낸 곽건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검왕이 거기에 있으리란 보장이 없잖소? 아직 삼보장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도…….”
곽건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독후가 입을 열었다.
“아니. 확실해.”
“당신도 오랫동안 중원을 떠나있었으니 그렇게 확언하긴…….”
“확실하다니까. 너는 그를 모르지만 나는 알아. 만약 그가 호야곡에 없으면 네가 바라는 걸 들어줄게. 됐지?”
일순 곽건의 동공이 강렬한 음욕으로 물들었다.
“나중에 딴 소리하기…….”
이번에도 곽건의 말을 자르며 독후가 신형을 날렸다.
“따라오기나 해. 갈 길이 멀어.”
순식간에 이십여 장이나 멀어진 독후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곽건이 비상했다. 그러고는 단숨에 그녀를 따라잡았다.
달빛이 호젓했다.
협곡 내부의 너른 평지에 나와 산책을 하고 있던 검왕 소진은 걸음을 멈추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야천 가득 총총히 박힌 별들이 그의 관심을 반겼다. 그러나 검왕이 보는 것은 휘황찬란한 월광을 뿌리고 있는 보름달도, 금강석 알갱이처럼 영롱하게 반짝이는 별들도 아니었다. 그의 눈길은 그보다 훨씬 아래 야공을 가르고 날아오는 흑백의 그림자를 쫓고 있었다.
희고 검은 인영들은 각각 절세의 미녀와 사나운 인상의 청년으로 화해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검왕은 녹안의 미녀를 두고 미지의 청년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두 사내가 서로에게 쏘아낸 안광이 충돌하며 허공에 불꽃을 튀겼다. 눈싸움이라도 하듯 청년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검왕이 물었다.
“정말 당신이오?”
청년은 안부인사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랜만일세, 진. 그간 잘 지냈는가?”
검왕은 청년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묵묵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청년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걸렸다.
“진진이 미리 알려주었다고 들었는데 막상 보니 당혹스러운 모양이군. 하지만 이건 자네가 이해해줘야 하네. 자네의 검에 팔이 잘린 데다 진광과 우천에게는 턱이 깨지고 배가 터졌는데, 그런 몰골로 돌아올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
“꼴은 이상하지만, 나는 나일세. 전날 우정포(牛井浦)에서의 첫 비무에서 자네의 일월신검(日月神劍)에 여섯 가지 단점이 있음을 알려주었던 나중강이란 말일세. 자네는 십 년 안에 단점을 없애고 내 무극검(無極劍)을 꺾어 보이겠다며 큰소리를 치지 않았던가. 자네의 호언장담은 절반만 성공한 듯싶으이. 내 팔을 자르긴 했지만 자네도 운신불능의 중상을 입었잖은가. 만약 그때 내 몸이 정상이었다면 단비(斷臂)도 쉽진 않았을 걸세.”
검왕의 손가락 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심중의 격동을 드러낸 정황의 전부였다.
“나는 당신이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몰랐소. 알았다면 결코 생사결에 나서지 않았을 거요.”
검왕의 말에 나중강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알고 있네. 어찌 모르겠는가. 자네나 우천이나 다 진진과 진광의 농간에 놀아났을 뿐, 아무런 잘못이 없네. 아, 오해는 말게나. 그렇다고 자네들을 속이고 끌어들인 두 사람을 탓하려는 게 아닐세. 그들 또한 각자의 원에 따라 움직였을 따름이니 아무 유감이 없네. 누군가에게 화살을 돌려야 한다면 자신에 대한 과신으로 망신을 자초한 나 스스로를 질책해야 마땅하네. 비록 진진의 고약한 독에 한바탕 곤욕을 치르긴 했지만 설마 자네의 검이 나의 무극검과 평수를 이룰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네. 경적의 우를 범했으니 험한 꼴을 당했어도 할 말이 없구먼.”
“……독중지왕에 중독된 상태임을 알았음에도 생사투를 벌이자는 나의 청을 받아들였단 말이오?”
“자네의 자존심을 생각해 부인하고 싶지만, 그렇다네.”
검왕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곽건의 얼굴을 한 나중강이 면상에 어울리지 않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많은 경우 진실은 추잡하거나 유치한 법이라네. 권하고 싶진 않네만 더 알고 싶은 게 있다면 뭐든지 물어보게나. 자네와 본격적으로 회포를 풀게 되면 말을 섞을 기회가 없을 테니 지금 속에 쌓인 궁금증을 해소하게.”
“…….”
“아무 것도 없는가? 하긴 자네는 구질구질한 잡사에 매달릴 성품이 아니지. 그럼 시작해 볼까?”
뚜두둑.
나중강이 뒷골목의 싸움꾼처럼 깍지를 끼더니 손을 풀었다.
그를 우두커니 바라보던 검왕이 발검 대신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봅시다.”
“뭔가? 말해보게나.”
검왕의 시선이 수확이 끝난 들판의 허수아비처럼 존재감 없이 서 있던 독후에게로 옮겨갔다.
“그 일도 당신의 뜻이었소?”
일순 독후의 눈빛이 흔들렸다. 검왕의 눈길을 따라 그녀를 일별한 나중강이 한숨을 쉬었다.
“애매하구먼. 자의반타의반이라고나 할까. 나는 진진의 바람을 읽었다네. 진진도 내 원초적인 호기심을 알아차렸고. 어쨌거나 우리는 오랫동안 부부지간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서로의 속을 헤아리는 게 그리 어렵지…….”
독후의 날 선 음성이 나중강의 말을 잘랐다.
“그만해요들. 오래 전에 묻힌 쓰레기를 들춰내서 뭘 얻겠다는 건가요?”
나중강이 어깨를 으쓱했다.
“진진의 말이 맞네. 충실한 답변은 아니었으나 그날의 내막을 짐작하기엔 별 지장이 없을 터. 허니 이 정도로 만족해주게나.”
검왕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검병에 손을 얹음으로써 개전의 의사를 밝혔다.
검왕이 발검하자 나중강이 곽건의 뱀눈을 가늘게 떴다. 손잡이 위로 겨우 반자만 남은 녹슨 검신 때문이었다.
“어찌 된 일인가?”
파검(破劍)의 원인을 묻는 나중강에게 검왕이 동문서답했다.
“오직 일검(一劍)이오.”
한 수에 승부를 걸겠다는 뜻이었다. 나중강의 입술에 미소가 걸렸다.
“좋을 대로 하게. 사실 기대가 크다네. 내 심장을 떨리게 할 멋진 검을 준비했으리라 믿네. 자네에겐 넉넉한 기간에 있지 않았는가. 만약 나를 실망시킨다면 자네를 염왕에게 보낸 후에도 원망할 걸세. 내가 이리로 돌아오기 위해서 얼마나 어려운 난관들을 돌파해야 했는지 자넨 상상도 못할……, 허허, 미안하이. 구차스럽게 굴었구먼. 꿈에 그리던 대결을 앞둔 탓인지 소년 같은 감상에 빠졌나 보이. 시작하게나.”
나중강이 선수를 양보했지만 검왕은 깨진 철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미동도 없었다. 오륙 장의 거리를 격하고 선 양인은 서로를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한 순간 검왕의 동공에서 빛이 번득였다. 그와 동시에 나중강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승패와 생사가 갈렸다.
나중강은 부릅뜬 검왕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자네의 불만을 아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내가 가진 수단인 것을. 무공으로 자네를 상대했으면 더 바랄 나위가 없었을 테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무인으로의 부활은 불가능했다네. 원시적인 방식이라 민망스럽기 그지없네만 나로서는 이게 최선이었음을 알아주게나. 그래 주겠는가?”
검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머리가 몸뚱이에서 뜯겨나간 이는 말을 할 수 없는 법이었다. 백 년 가까이 깃들었던 육신을 떠나 구천으로 올라가는 검왕의 고혼을 나중강이 위로했다.
“참으로 대단하이. 그럴 줄 알고 있었네만 자네는 최고일세. 장담컨대 천하의 누구도 방금 자네가 현시한 검을 받아내지 못했을 걸세. 내가 이런 괴물이 되지 않았다면 나 역시 꼼짝없이 당했을 테지. 심장이 욱신거리는구먼. 하마터면 터질 뻔했네, 그려. 이게 얼마나 큰 찬사인 줄 아는가? 자네의 화후가 조금만 깊었다면, 자네의 공력이 한 뼘만 더 심후했다면, 불사지체인 이 괴물을 쓰러뜨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뜻일세. 오직 천무대제만이 가능한 일이라네. 그 신화적 무존(武尊)에게 거의 근접했으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으이.”
하얀 그림자가 나중강의 시야를 가렸다. 백영(白影)은 독후였다.
무릎을 꿇고 본체에서 떨어진 검왕의 두부(頭部)를 안아든 독후가 자신의 뺨에 비볐다. 그녀의 녹안에서 흘러내린 옥루가 검왕의 얼굴을 적셨다. 하염없는 눈물을 쏟아내는 독후를 내려다보며 나중강이 혀를 찼다.
“쯧쯧, 한낱 껍질을 붙들고 그 무슨 추태더냐? 이제 그만 그를 놓아주어라, 진진.”
독후의 선홍빛 입술에서 빠져나온 앙칼진 목소리가 나중강의 고막을 할퀴었다.
“나보고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아요.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제자도 아니고, 종도 아니고, 노리개도 아니에요.”
무심코 손을 뻗어 독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나중강은 그의 팔이 그녀에게 닿지 않음을 알아차리고는 비감해졌다. 그의 상징과도 같았던 넉 자 반 길이의 오른팔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이다, 진진. 노리개라니,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다. 너는 나, 나중강이 빚은 최상의 작품이야. 내가 너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닥쳐욧!”
나중강은 칠십칠 년 전 그가 고창(古昌)의 홍루(紅樓)에서 구원했던 소녀가 뿜어내는 원독의 눈빛을 담담히 받았다. 그에게 있어서 감정이란 일어났다 사라지는 물거품처럼, 혹은 인생 그 자체처럼 허망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