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48
제247화
독후가 좀처럼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나중강이 그녀를 재촉했다.
“이제 진광을 보러 가자, 진진.”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독후가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말했잖아요. 그는 망가졌다고. 지금의 주먹으로는 바둑판 하나도 깨기 힘들 거예요.”
“상관없다.”
“그를 놀리러 갈 셈인가요?”
“그럴 리가. 그저 옛 친구를 보고 싶은 것뿐이다.”
“그는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거예요. 특히 그런 꼴로는.”
“허허, 그래도 할 수 없지. 하지만 진광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면 단지 껍데기가 바뀌었다고 나를 냉대할 성싶지는 않구나. 그는 순진하긴 하지만 겉이 아니라 속을 볼 줄 아는 친구야.”
“지금의 당신은 속도 온전하진 않잖아요?”
“…….”
“그 아이를 몰아낼 순 없나요?”
“……어렵다.”
“고작 핏덩이 하나를 당해내지 못하다니. 당신도 한 물 갔군요.”
“허허, 그것도 아주 틀리진 않지만 그보다는 네가 터무니없이 엄청난 물건을 갖고 온 탓이야. 설마 신령(神靈)의 적합체(適合體)를 구해올 줄은 정말 몰랐다. 수십 년 동안 서역과 남방을 떠돌며 수십만 명을 살폈음에도 찾지 못했는데.”
“그래도 그 아이는 도구에 불과하잖아요.”
“원래는 그래야 했지. 하지만 방금 말했듯 이 물건은 신령이 깃들기에 최적의 그릇이었다. 육신이 아니라 정신이 그렇다는 말이다. 수만의 원혼을 감당하고도 소멸되지 않고 정체성을 유지하는 혼정(魂精)이라니.”
“당신은 확실히 약해졌어요. 예전이라면 핑계 따윈 혀끝에 올리지 않았을 거예요.”
“허어, 핑계라. 너도 보았지 않으냐. 지난 몇 달 간 내가 이 지독한 물건과 치른 사투를. 나로서는 반이라도 차지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나마도 나만큼이나 중원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하던 이 물건이 타협해 준 덕분이었다. 더 솔직히 말해주련? 아마도 갈수록 내가 밀릴 게다. 그러다 종내는 완전히 쫓겨나겠지. 내 입장에서는 주객전도지만 이 물건은 제 몸을 되찾았다고 여길 테지.”
“설마 그런 사태가 오도록 방치하진 않겠죠?”
“그래. 생각해둔 바가 있다.”
“자결이라도 할 참인가요?”
“허어, 참으로 직설적이구나, 진진. 하긴 그래야 너답지.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을 듯싶구나. 부부는 일심동체라 너는 이미 내 마음을…….”
“닥쳐요!”
새벽 어스름이 태양의 도래를 미리 알렸다.
두 개의 인영이 희뿌연 여명이 깔린 들판 상공을 비행하고 있었다. 별안간 흑의청년이 몸서리를 쳤다. 그러고는 십여 장 아래 지상으로 추락했다. 면사여인이 그를 따라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필이면 평야에 몇 개 되지도 않는 암반에 곤두박질쳤지만 청년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일으킨 청년이 면사여인에게 물었다.
“여긴 어디요?”
“정확한 지명은 몰라. 하지만 영일산맥(迎日山脈)을 넘은 지 꽤 됐으니까 고수(暠水) 인근일 거야.”
흑의청년, 곽건이 눈을 빛냈다. 고수는 주안에서 삼사백 리가량 떨어진 하천이었다. 주안이 지척이라는 뜻이었다. 독후의 속도에 맞추더라도 반 시진이면 당도할 수 있을 터였다.
경신을 전개하기 전에 곽건이 궁금한 점을 물었다.
“검왕은 어떻게 됐소?”
“……죽었어.”
짤막한 답변이었지만 곽건은 만족했다. 당연하고도 바람직한 결과였다.
“그럼 삼보장에서 그 쥐새끼의 목만 따버리면 끝이군. 약속을 지키리라 믿소.”
독후는 아무 대꾸 없이 허공으로 신형을 띄웠다. 곽건은 그녀에게 확답을 받고 싶었으나 자중했다. 괜히 성질을 건드릴 까닭이 없었다. 호야곡의 일을 마치고 곧장 주안으로 향한 것으로 보아 그녀는 계약을 어길 생각이 없음에 분명했다.
비단결 같은 머리를 휘날리며 날아가는 독후를 힐끔거리던 곽건은 몸이 달았다. 아랫도리는 진즉 터질 듯 팽창해있었다. 그녀의 알몸에 올라타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절정에 이를 것 같았다.
독후의 차가운 음성이 한창 불타오르던 곽건의 음욕에 찬물을 끼얹었다.
“권왕은 손대지마. 그의 몫이니까.”
내심 불만이었지만 곽건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의 양보는 해주어도 무방했다. 그리고 어차피 신마의 위업으로 기록될 것이었다.
“여부가 있겠소. 다만 그 난쟁이가 그놈을 돕는답시고 설치면 손을 댈 수밖에 없소. 목을 꺾지는 않겠지만 팔다리 한 짝씩은 부러뜨리게 될 거요. 그런 일이 생겨도 내 잘못이 아니니 무황에게 잘 설명해주구려.”
독후에게선 아무 대꾸도 없었다.
멀리 삼보장의 담장 역할을 하는 죽림이 보였다.
곽건은 감회가 새로웠다. 작년 바로 이맘때 네 명의 수하만 대동하고서 삼보장을 찾았었다. 공식적인 임무는 가출한 형을 문으로 복귀시키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인 목표는 그 얼마 전 마령 문가와의 구인결을 통해 단숨에 무림 최고의 초신성으로 떠오른 하남신룡의 제거에 있었다.
초절정의 벽을 넘고서 반년도 지나지 않아 또 한 번의 상승을 경험했던 곽건은 자신만만했다. 변방에서 올라온 이무기가 그의 적수가 될 리 만무했다. 조부의 암묵적인 허락을 받았기에 거칠 것도 없었다. 설사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형이 소란의 와중에 변을 당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기실 곽건은 어떤 식으로든 형을 하남신룡과 함께 처리할 작정이었다.
삼보장의 다른 식객들은 걱정할 게 없었다. 태극마선과 인면요괴는 만만치 않은 자들이었으나 구인결 때의 중상으로 거동조차 어려울 거라고 했다. 금강권도 마찬가지였다. 하남신룡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큰 부강을 입지 않았다는 하남편봉만이 전투가 가능한 상태였다. 소수마공을 익혔다니 경시해서는 안 되는 여자였지만 두 명의 친위대와 두 명의 호법이라면 압도하고도 남는 전력이었다.
하남편봉은 그가 조부를 졸라 삼보장 행에 나선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곽건은 그녀가 탐이 났다. 용모화를 보면 얼굴도 제법 반반했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무력이 매력적이었다. 스물둘의 나이에 절정의 중 이상에 이르렀다는 것은 장차 그녀가 팔대무왕 급의 무후(武后)로 성장할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방증이었다. 하남편봉은 무왕들의 시대가 저문 후 절대지존으로 등극할 그의 제일심복이 될 자격이 충분했다.
완벽한 자신감으로 무장했지만 그날의 상황은 그의 뜻대로 풀리지는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횡액을 당할 뻔했다. 조부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며 억지로 붙여준 호법들과 친위대들이 아니었다면 삼보장에서 뼈를 묻어야 했을 것이었다.
그날의 혈전과 치욕을 상기한 곽건의 눈에 핏발이 섰다. 잠시 후면 일 년 간 묵혀둔 과제를 마무리 지을 수 있을 터였다.
아침햇살을 담은 삼보장의 전경은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다웠다. 곳곳에 봄꽃들이 만발했고 청백의 기와를 얹은 두 채의 와옥과 부채꼴로 뻗은 별채들은 저마다 격조를 뽐냈다.
삼보장을 향해 하강하며 곽건은 비경을 피로 물들일 기쁨에 개구리 다리를 찢는 악동처럼 신이 났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걸렸던 비릿한 미소는 정문 앞 마당에 내려서기도 전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곽건이 뱀눈을 찌그러뜨렸다. 내공이 없었기에 기감을 두르지는 못했지만 그의 청력은 거미가 줄을 타는 소리도 포착할 수 있을 만큼 예리했다. 하지만 이른 아침부터 시끄럽게 지저귀는 새들 말고는 그의 귀를 간질이는 게 없었다.
곽건은 독후에게 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면사 위에서 아미를 찌푸리며 독후가 반문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독후를 붙잡고 추궁한들 답이 나올 리 없었기에 곽건은 청색 기와를 얹은 와옥으로 달려 들어갔다. 벽을 때려 부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곽건이 지붕을 뚫고 솟구쳤다. 그러고는 백와옥으로 날아갔다. 거기서도 별 소득이 없었는지 분통을 터뜨리며 튀어나온 곽건은 별채들을 차례로 수색했다. 그러나 독후의 예상대로 곽건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빌어먹을. 어디로 튄 거야, 이 쥐새끼들.”
욕설을 내뱉은 곽건이 독후를 노려보았다.
“뭘 봐?”
독후의 뺨을 후려갈기고 싶었으나 곽건은 간신히 참았다. 그녀가 미리 알려주었을 리는 만무했다. 그럴 겨를이 없지 않은가.
마원에서의 소문이 전해져 도피했을 가능성도 희박했다. 혹시 몰라 곽건은 하루 동안은 그에 관해 함구하고 있으라고 마인들에게 엄명을 내렸었다. 설령 그들 중 누군가가 명을 어겼다고 해도 전서구가 주안까지 날아오기엔 아직 일렀다. 설사 날아왔다손 치더라도 쥐새끼들의 행태는 이해불가였다. 홀로 마왕과 삼대마군을 짓이겼지만 원수 또한 사벌에서 그만한 무위를 보였다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가 겁을 먹고 달아났을 턱이 없었다. 독후를 의식해서 피신했을 수도 있지만 그에게도 권왕이라는 강력한 방수가 있지 않은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곽건은 울화통이 치밀었다. 마치 몰래 측간에서 숨겨두었던 당과를 꺼내먹다가 실수로 똥통에 빠뜨린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곽건은 애꿎은 건물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회색의 안개가 와옥과 별채 들을 녹여버리자 아름다운 장원은 순식간에 폐허로 화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곽건이 벌이는 광란을 지켜만 보던 독후가 땅바닥을 가리켰다. 와옥들이 사라진 자리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다.
“저게 뭐지?”
대답을 주는 대신 곽건이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한참 후에야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제길, 아래는 온통 쥐구멍 천지요. 하나를 골라 끝까지 가봤더니 주안 바깥의 야산이 나옵디다. 이런 개 같은 쥐새끼들. 잡히기만 하면 다 찢어죽일 테다.”
거친 언사를 내뱉으며 광분하는 곽건에게 독후는 조소를 날렸다. 그녀의 싸늘한 미소를 본 곽건은 정신을 차렸다.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었다. 아직 그에겐 손에 넣을 수 있는 쥐새끼가 한 마리 남아있었다. 그 쥐새끼는 필히 다른 쥐새끼들의 행방을 알 터였다.
백사장에 이른 가린은 휴식을 취하지 않고 해변을 따라 내달렸다.
하지만 반각도 가지 않아 달리기를 멈추어야 했다. 공 노인이 자기를 내려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공 노인은 마치 자기가 전력 질주한 양 숨을 헐떡거렸다.
“왜 그러세요, 할아버지?”
진천의 물음에 숨을 고르느라 공 노인은 한참 후에야 답을 내놓았다.
“나를 두고 너희끼리 가거라.”
“할아버지!”
“나 하나의 무게라도 덜어야 더 빨리 갈 것 아니냐?”
가린이 가슴을 탕탕 쳤다. 공 노인의 몸쯤은 깃털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사표시였다.
공 노인이 동행을 중단하기로 결정한 이유가 달리 있음을 알아차린 진천은 착잡했다.
“많이 힘드시죠, 할아버지?”
“어김없이 내 속을 들여다보는구나, 이 녀석. 그래, 힘들어서 더는 못 가겠다. 나는 계속되는 충격을 견딜 수 없어. 전날 너처럼 아예 하늘을 난다면 모를까, 사오 장마다 쿵쾅거리며 뛰고 착지기를 반복하는데 어떻게 버텨내겠느냐? 삼천리는 고사하고 삼백리를 가기도 전에 탈이 날 게 뻔하다. 그렇다고 저 동생 놈한테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큼 속도를 조절하면서 달리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더냐? 네가 그토록 서두르는데. 그러니 먼저들 가거라. 천천히 뒤따라가마.”
“……할아버지.”
“그렇게 죽상하지 마라, 욘석아. 내가 누구더냐? 평생 온 천하를 떠돌아다니면서 숱한 고난을 겪었음에도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불굴의 약선이 아니더냐? 위기에 처할 때마다 어김없이 너나 가린 같은 귀인이 나타나 도움을 주지 않았더냐? 이번에도 그럴 게다. 그러니 아무 걱정 할 것 없다.”
“…….”
공 노인이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못하는 진천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 걱정일랑 말고 어서 가거라. 세상에 천마라니. 네가 그 괴물을 무슨 수로 당해낼는지 모르겠다만 워낙 신통방통한 녀석이니 어떻게든 해내겠지. 가라, 천아. 가서 인세에 나와서는 안 될 악마로부터 세상을 구해주거라.”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할아버지, 꼭 다시 봬요.”
공 노인이 껄껄 웃었다.
“물론이지. 네 무용담이 궁금해서라도 기필코 창인으로 돌아가마. 넉넉하게 반년쯤 뒤에 보자꾸나.”
진천은 공 노인을 껴안았다. 그의 등을 토닥이던 공 노인이 그를 밀어냈다.
“이제 그만 가 보거라. 한 시가 급하다지 않았더냐?”
공 노인의 눈짓을 받은 가린이 진천을 한 팔로 감쌌다. 그러고는 예의 쿵쾅거리는 주법으로 시커먼 파도가 몰아닥치는 야밤의 해변을 질주했다. 바닥에 주저앉은 공 노인은 멀어져가는 가린의 등판이 개미만한 점으로 화할 때까지 우두커니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