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49
제248화
무황이 돌아왔을까.
진천은 자문했다. 답은 둘 중 하나였다. 그랬거나 그러지 않았거나. 그로서는 어느 쪽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예감이 불길했다.
진천은 다시 물었다. 만약 무황이 이미 중원에 현신했다면 어떤 행태를 보이고 있을까. 이에 관해서도 종잡기 어려웠다. 그가 버러지 같은 민초들을 말살하고 세상에 존재할 자격이 있는 자들만을 남겨두겠다는 망상을 가졌을 성싶지는 않았지만 모를 일이었다. 그것이 독후가 권왕을 낚기 위한 미끼였기만을 바랄 따름이었다.
무엇보다 곽건이 마음에 걸렸다. 악령을 심기 위한 도구로 무황이 그를 택했을 가능성이 높으나 오롯이 육신만 취하고 그의 혼백을 완전히 쫓아낼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었다. 정맹 집보각주 문중석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모든 종류의 이혼대법(移魂大法)은 피시전자로부터의 역습의 위험을 안고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양날의 검이었다. 무황이 곽건에게 당할 만큼 허술한 위인은 아닐 테지만 곽건도 만만치 않은 자였다. 독기에 관한 한 곽건은 진천이 아는 인물들 중 단연 으뜸이었다.
진천은 제이의 천마가 무황이 아니라 곽건으로서 나타날까 봐 염려스러웠다. 설혹 그렇지 않더라도 잔인무도한 곽건의 성정이 담백한 성향으로 알려진 무황에게 일부라도 스며들었다면 큰일이었다.
곽건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자였다. 대웅은 제 동생이 수호보에서 삼백의 인명을 학살한 건 시작에 불과하다며 누군가 그를 제어하지 않으면 희생자의 수는 백배, 천배로 불어날 거라고 단언했었다. 그런 곽건이 천마의 힘을 가진다면 이루 상상할 수도 없는 재앙이 닥칠 터였다.
진천은 부정적인 상념을 떨쳐내었다.
모든 것은 가정일 뿐이었다. 독후가 ‘훗날’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무황의 도래는 아직 한참 먼 미래의 일일 지도 몰랐다. 어쩌면 곽건의 몸을 취득하는 데 실패해 아예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집보각주 문중석은 그럴 확률이 구 할이 넘을 거라고 주장했다.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근거가 상당한 예측이었다. 천마의 탄생비화가 알려진 후 숱한 야심가들이 줄기차게 도전했지만 성공한 전례가 없거니와 무황도 일 갑자의 시간 동안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음이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독후의 언행으로 짐작컨대 그가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곽건의 몸을 빌려 천마로 재탄생할 수 있을는지는 의문이었다. 진천은 문중석의 판단이 들어맞기를 간절히 바랐다.
실제로 그런 경우에 대비해서 친인들에게 향후 어떤 식으로 중원 무림의 판을 짤 지를 명을 통해 일러두었다. 남천도왕과 마왕이 건재한 탓에 사마 연합과의 전면전은 무리수였다. 그리 되면 공멸은 필연지사였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중이 해를 입을 것이었다.
진천의 복안은 중립지대의 복원이었다. 그가 십 년 폐관수련에 들었다고 여길 사마의 수장들은 타협안을 받아들일 것이었다. ‘신황’이 무림평정의 대업을 보류하고 무공상승에 전념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들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십 년 후가 걱정스럽긴 하지만 당장 망하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었다.
십 년 간 과거의 악행을 반성하고 선행에 매진한 자들은 선처해준다고 했다던 ‘신황’의 공약도 사마 무림의 무인들이 전면전을 결의하며 옥쇄를 택하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었다. 희망이 있는 자는 제 목숨을 판돈으로 걸고 도박을 벌이지 않는 법이었다.
십 년이라는 기한은 면밀히 계산한 숫자였다.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사패의 주인들은 그때쯤이면 쇠락에 접어들 것이었다. 반면 세평회의 친인들은 저마다 절정에 이를 터였다. 권왕의 권공을 전수받은 명은 절대지경에 들 것이 확실했고 여상구와 팽하연, 그리고 소중걸은 공히 초절정의 상에 도달할 것이었다. 하수린도 초절정의 벽을 넘어설 게 틀림없었다. 거기에 초절정의 무력을 지닌 가린과 초절정에 근접했을 고량을 보태고 진즉 초절정고수로 거듭났을 대웅이 가세하면 십 년 후의 세평회는 사패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막강한 집단이 되어있을 터였다.
사패의 무왕들이 본격적으로 퇴조하기 시작하면 세평회는 명실상부한 최강세력으로 발돋움할 것이었다. 그리 되면 미뤄두었던 사마 소탕의 대업을 재개할 수 있을 터였다.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끊임없이 갖가지 변수들이 발생하겠지만 진천은 대체로 그가 그린 그림대로 진행되리라 보았다. 물론 무황이 출현하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서만 실현가능한 전망이었다.
무황이 나타나면, 특히 곽건의 악성(惡性)을 품은 채 등장하면 모든 계획이 무산될 게 명약관화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보중을 최우선시해야 했다. 진천은 명의 입을 빌어 비상사태에 대비해 신속한 연락망을 구축하고 안전한 도피처를 마련해두도록 친인들에게 당부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상대는 홀로 무림을 멸망시킬 힘을 가졌다는 괴물이었다. 만일 그가 악독한 수법을 들고 나오면 그가 제시했던 대비책이 무용지물로 화할 위험성이 다분했다.
벽력도문이 발칵 뒤집어졌다.
일다경 전 느닷없이 천공에서 떨어져 내린 소공자가 대공자를 찾아내라며 난리를 친 탓이었다. 사백여 무인들은 물론이고 일천이백에 달하는 하인들도 정신없이 벽력도문 내부를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오전까지만 해도 제삼연무장에서 수련에 여념이 없던 대공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라진 이는 대공자만이 아니었다. 그의 손위 누이들도 네 명 모두 모습을 감추었다.
각 전각의 수색을 마친 이들이 차례로 보고를 올릴 때마다 노발대발하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곽건의 행태에 현천각 경내에 운집한 도객들은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심약하면서도 후덕한 대공자와 달리 소공자는 어린 시절부터 잔혹하고 포악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수틀리면 수하들의 머리통을 부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간신히 분기를 억누른 곽건이 염소수염의 중년인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그 연놈들이 오시(午時) 말까지는 여기 있었단 말이지?”
친동기들을 연놈이라 부르는 무도한 언사에 기가 찼으나 벽력도문의 총관 금재섭(錦材燮)은 심사를 일절 내색하지 않고 즉답했다.
“그렇습니다, 소공자. 미시(未時)를 알리는 종이 울리기 직전 옥청각에서 식사를 마친 대공자가 연무장으로 향하는 걸 여러 사람이 목격했습니다.”
“그러고는? 그러고서 어딜 갔는데? 지금 어디에 있냐고?”
금재섭은 이번에는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알아야 답을 줄 것 아닌가.
우물쭈물하는 금태섭을 노려보며 곽건이 질문을 이었다.
“오시 말에 무슨 일이 있었더냐?”
사색이 되었던 금태섭의 안색이 밝아졌다.
“아! 그겁니다.”
“그거라니?”
“그때 전서구들이 연이어 날아왔습니다. 다름 아니라 이틀 전 소공자께서 마원에서 이루신 위대한 업적을 알리는 전갈이었습니다. 그래서 온 문이 떠들썩했습니다. 저를 비롯한 속하들은 개문 이래 최대의 경사를 맞이했음을…….”
금태섭이 아부를 마무리할 기회를 주지 않고 곽건이 욕설을 내뱉었다.”이런 제길, 결국 그게 사단이었어. 삼보장의 쥐새끼들도 그 소식을 전해 듣고서 숨어버린 거야.”
곽건의 표정이 험악해지자 금태섭은 얼른 시선을 내렸다. 분위기가 풀릴 것을 기대하며 은근슬쩍 고개를 들었던 다른 무인들도 잽싸게 이마를 다시 돌바닥에 박았다.
분에 겨워 어쩔 줄을 몰라 하던 곽건이 겨우 노기를 다스리고는 좌측의 독안(獨眼) 노인에게로 눈을 돌렸다. 외눈박이 노인은 벽력도문의 도호(刀豪) 송하성(宋河成)이었다.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 송 태상(太上).”
송하성의 불거진 백미가 일그러졌다.
“말이 짧구려, 소공자.”
염라도군(閻邏刀君)이라는 무시무시한 별호를 가진 송하성은 무력과 서열에서 공히 남천도왕 곽경에 이어 벽력도문의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강호였다. 정파의 오대세가처럼 혈족으로 이루어진 문파가 아니기에 벽력도문은 곽가의 소유가 아니었다. 송하성이 곽씨 일족의 수하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기실 송하성은 곽건이 소년 시절 이 년 간 그를 가르쳤던 스승이기도 했다. 오만불손한 곽건도 송하성에게만큼은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 그가 한 때의 은사라서가 아니라 대적불가의 강자이기 때문이었다. 자존심이 세기로 유명한 송하성은 문주인 남천도왕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에게 무례하게 구는 망둥이에게 존장의 무서움을 알려주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평소의 꼿꼿한 태도를 견지했던 송하성은 대가를 치러야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곽건이 달려든 것이었다. 미처 대처할 겨를도 없이 독안의 노도객은 곽건의 수도에 목을 내주어야 했다.
몸뚱이에서 떨어진 송하성의 머리통이 청석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현천각 경내에 모인 벽력도문의 무인들은 숨을 죽였다. 기습을 당했다 하나 염라도군은 저렇게 속절없이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소공자에 관해 전해진 정보가 사실이라는 방증이었다.
다섯 달 전 갑자기 실종되었을 때만 해도 폐인이나 다름없었던 소공자가 어떻게 이런 어마어마한 고수가 되어 돌아왔는지 알 길이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틀 전 마원에서 신마라고 자칭했다는 소공자는 무위의 급격한 상승과는 별개로 인성은 예전 그대로였다. 조금만 심기를 건드리면 누구라도 염라도군의 꼴이 될 거라는 뜻이었다.
장내가 공포로 물든 가운데 곽건이 송하성 바로 뒤에 있던 대머리 노인을 지목했다.
“어이, 박 호법.”
벽력도문 서열 사 위의 총(總)호법이자 광견도(狂犬刀)라는 상서롭지 못한 별호를 지닌 박진구(朴進究)는 처세의 달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돌아가는 형국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아둔한 이도 아니었다.
“하명하십시오, 소공자.”
“그년들을 몽땅 데려갔으니 그 쥐새끼는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꼬리를 감춘지 두 시진 남짓밖에 안 지났잖아? 마차를 이용하지 않았다면 아직 일이백 리 이내에 있을 거야. 모든 인력을 동원해 인근을 이 잡듯이 뒤져. 어떻게든 쥐새끼를 잡으라고. 알아들었어?”
“존명을 받듭니다!”
“좋아. 그리고 마련의 마인들에게 내 명을 전해. 지금 백사평(百蛇平)에 집결해 있을 거야. 내일, 아니 사흘 뒤로 하자. 사흘 후 진시(辰時)까지 일신으로 오라고 해.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모조리 대가리를 부숴버린다는 경고도 빠뜨리지 말고.”
박진구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맹을 치는 겁니까, 소공자? 그럼 저희는…….”곽건이 짜증을 냈다.
“시끄러워. 주둥이 닥치고 시키는 거나 해.”
미친개라는 별호답게 성질이 더럽기로 벽력도문은 물론이고 사파 무림을 통틀어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박진구였으나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두어 가지 명령을 보태려던 곽건은 노을로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욕심을 접었다. 삼보장에서 천지인봉까지 오는데 한나절이 걸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랫것들이 보는 앞에서 일시 혼절했다가 무황으로 탈바꿈하는 추태를 보일 수는 없었다.
천공으로 솟구치며 곽건이 엄포를 놓았다.
“책임지고 처리해, 박 호법. 안 그러면 알지?”
목소리의 뒷부분은 벌써 까마득한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현천각 앞에 엎드려있던 벽력도문의 무인들은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곽건이 사라진 허공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다들 악몽에서 막 깨어난 사람이 지을 법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신황에 필적하거나 그를 능가할지도 모르는 괴물이 되어서 돌아왔지만 소공자의 귀환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대공자라면 모를까 소공자의 휘하에서 수하 노릇을 한다는 건 목숨을 칼날 위에 두고 사는 것과 진배없었다. 이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동일한 심정이었다.
곽건에게서 명을 받은 총호법 박진구는 땀으로 흥건한 민머리를 손바닥으로 닦았다. 이렇게 긴장하기는 작년 가을 신황이 권왕을 대동하고서 벽력도문에 쳐들어 온 이후 처음이었다. 아니, 그때보다 훨씬 심했다. 칼을 빼들고 대기하고 있었지만 감히 낄 엄두를 내지 못했던 탓에 역설적으로 실질적인 위험은 없었던 그 당시와는 달리 이번엔 목숨이 위태로웠다.
소공자에게 받은 두 가지 명령 중 두 번째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백사평에 모여 있을 마인들에게 그의 뜻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들이 시간을 엄수하지 못해 경을 치르더라도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첫 번째 명, 즉 대공자를 찾으라는 지시는 이행하지 못할 공산이 컸다. 그리 되면 소공자는 필히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죄를 물을 터였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광견도(狂犬刀) 박진구는 대공자의 발 빠르고도 현명한 처신을 본받아야 함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