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5
제24화
대웅이 평소처럼 욕과 함께 불만을 쏟아 냈다.
“우라질, 봄이 코앞인데 어째서 날씨는 되레 더 추워지는 거야. 콧물이 땡땡 어는 바람에 콧구멍이 막혔잖아.”
엄살만은 아니었다. 며칠만 지나면 꽃 피는 삼월이건만 삭풍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찬 바람이 쌩쌩 불었고 얕은 웅덩이들은 결빙이 될 만큼 기온이 낮았다.
노덕이 굳이 설명하고 나섰다.
“북으로 올라갈수록 계절이 뚜렷해지는 건 자연의 이치일세. 기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포성이 경계선이라고 해도 무방하네. 거기서 이천여 리나 북상하지 않았는가. 봄이 가까웠다 하나 아직 겨울이 물러가지 않았으니 이 정도 추위는 당연한 걸세. 그리고 원래 해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듯이 겨울도 떠나기 전에 부리는 심술이 사나운 법일세. 그런데 좀 이상하구먼. 자네의 내공이라면 나 같은 범인과 달리 한서(寒暑)에 시달리지 않을 터인데.”
코가 막혔다면서 대웅이 콧방귀를 날렸다.
“흥, 이깟 추위를 막으려고 공력까지 끌어 올릴 게 무어요? 안 그래?”
말끝에 진천의 의견을 묻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린 대웅이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진천이 입을 다문 채 흐린 하늘만 올려다보자 대웅은 질문을 바꿨다.
“왜 그래?”
진천이 동문서답했다.
“눈이 내릴 것도 같은데.”
“뭐? 빨리 가자. 가뜩이나 길도 엉망인데 여기서 눈까지 내리면 얼마나 더 구질구질해지겠냐? 아니, 이럴 게 아니라 뛰자. 조금만 무리하면 편한 데서 잘 수 있는데 산중에서 묵을 까닭이 없잖아. 안 그래? 노인네는 네가 들춰 메라.”
대웅이 합류한 이후 일행은 가급적 인적이 드문 경로로 이동해 왔다.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매일 두 시진씩 수련을 해야 한다는 대웅의 요구 때문이었다.
그러려면 주로 험준한 산악을 타야 할 터이기에 무릎이 성치 않은 노덕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히려 고생이 확 줄어들었다. 지금처럼 시시때때로 진천에게 업혀 그의 신세를 질 수 있어서였다.
노덕은 폐를 끼치긴 싫었으나 삼월 초하루에 삼보장에서 고량과 재회하기로 약속을 한 탓에 진천에게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삼월은커녕 사월에도 주안에 당도하지 못할 터였다.
진천의 등에서 떨어질세라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고 손으로는 목을 두른 노덕이 방향을 지시했다. 노덕을 업고도 진천은 가파른 산길을 비호처럼 올랐다. 따라오는 대웅의 신법도 그에 못지않았다. 노덕은 새삼스럽게 무인들의 초월적인 능력을 실감했다.
진천으로서는 유감스럽게도 구름이 옅어지고 날이 갰다. 눈이 내릴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들자 진천은 달리기에 집중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사위가 어둑어둑해졌다. 그러나 진천은 경공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다소 무리였지만 대웅은 그만 가라고 붙잡지 않고 묵묵히 쫓아왔다. 진천에게 뒤지지 않겠다는 경쟁심의 발로가 아니라 목적지가 목전이었기에 힘을 내는 것이었다. 산등성이를 넘고 또 넘은 두 사내는 노덕이 마지막이라고 독려하며 가리키는 봉우리를 단숨에 정복했다.
꼭대기에 오른 진천이 노덕을 내려주고는 턱까지 차오른 숨을 가라앉혔다. 그의 옆에 이른 대웅이 허파를 뽑아낼 것처럼 심하게 헐떡거리면서도 감격의 탄성을 토해 내었다.
“으아, 드디어 도착한 건가. 저기가 그 빌어먹을 주안이군.”
달빛 아래 고즈넉이 펼쳐진 시진의 전경이 세 사람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짧은 운기조식을 취하고는 바로 내려가자고 할 줄 알았던 대웅이 휴식의 연장을 원했다. 두 시진 가까이 경신을 전개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진천은 대웅의 청을 반겼다. 그러나 대웅은 그가 편히 쉬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평소처럼 질문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주안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문득 떠오른 건데, 너는 왜 노인네를 돕자고 이 먼 데까지 온 거냐, 천? 생각해 보니 이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답을 들은 적이 없네.”
노덕도 궁금했기에 귀를 바짝 세웠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진천의 성의 없는 답변에 대웅은 발끈하고 노덕은 실망했다. 대웅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야, 그러지 말고 얘기해 봐. 두 달 전만 해도 노인네가 생면부지의 이방인이었다며? 그런데 뭔 속셈으로 예까지 따라온 거냐고? 정맹의 용호가 되려면 추문의 주인공인 노인네하고 멀찌감치 떨어지는 게 이로울 텐데.”
입가에 쓴웃음을 매단 노덕을 바라보며 진천이 물었다.
“대인을 처음 본 날 객잔에서 제가 도중에 잠깐 밖으로 나갔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진천이 대화의 대상을 바꾸자 얄팍한 입술을 내밀어 불만을 표했지만 대웅은 끼어들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기억하다마다. 공터에서 창인 젊은이들의 패싸움이 벌어져서 나가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때 허 노야를 잠시 뵈었습니다. 노야는 대인의 본향과 성함을 듣고 깜짝 놀라더군요. 중원에 있을 때 깊은 인연을 맺은 지인이라면서요.”
“그랬는가.”
“실은 그날 저도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허 노야가 대인을 두고 ‘매우 훌륭한 친구’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허허, 민망하구먼.”
“허 노야는 칭찬에 인색한 분입니다.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쑥스럽지만 그 어른이 창인에서 됨됨이를 긍정적으로 평하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허 노야가 그렇게 최상의 찬사를 보내니 저로서는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 형에게는 감사할 따름일세.”
“대인의 사연을 듣고서는 어떻게든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더군요. 어차피 용호가 되려면 중원에 나가야 하니 주안에 가서 대인께서 재기하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맙네. 그저 고마우이.”
“하지만 제가 결심을 굳힌 건 대인의 사정을 동정해서가 아닙니다. 그와는 다른 계기가 있습니다.”
“그런가? 괜찮다면 듣고 싶구먼.”
“저는 대인이 재기하려고 하는 이유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대인과 함께 길을 떠난 것입니다.”
“그랬구먼.”
노덕이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진천이 말을 잇지 않고 입을 다물자 얌전히 귀를 기울이던 대웅이 신경질을 냈다.
“뭐야? 왜 하다 말아? 그 이유가 뭔데? 사람 차별하는 거요, 노인네? 나한테는 얘기 안 해 줬잖아?”
짧은 문장에 다섯 개의 질문을 욱여넣은 대웅이 올빼미 눈을 부라리며 노덕을 압박했다.
파산 이후 노덕은 삶의 모든 희망을 잃고 폐인이 되었다.
어마어마한 재산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려서가 아니라 그를 망하게 한 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딸이기 때문이었다.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한 노덕은 나날이 야위어 갔고 주변인들은 그가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 예상했다.
노덕은 삼보장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는 대신 밖으로 돌아다녔다. 실성한 사람처럼 맨발로 거리를 배회하는 그를 주안 백성들은 곱게 대하지 않았다. 험담과 손가락질은 점잖은 축에 속했다. 침을 뱉거나 일부러 다가와 밀치는 자들도 부지기수였다.
한때 비견할 이가 없으리만치 높은 덕망을 자랑하던 주안의 거부는 만인의 조롱과 비난을 한 몸에 받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노덕은 구태여 삼보장을 나가 망신과 봉변을 자초하며 스스로를 학대했다.
세인들의 멸시 속에서 서서히 말라 죽어 가기로 마음먹은 노덕의 심중에 변화가 생긴 것은 어느 여름날의 일이었다.
폭염으로 인적이 끊긴 대로를 홀로 거닐다 탈진한 노덕은 길바닥에 쓰러졌다. 혼절하는 순간 노덕은 다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바라는 바였다.
그러나 그는 이승을 떠나지 못했다. 눈을 뜬 노덕은 그를 둘러싼 무리의 면면들을 보고는 당황했다. 하나같이 그에게 우호적인 표정들을 담고 있어서였다.
그들은 주안 북부를 구역으로 하는 거지 떼였다. 삼복더위인지라 허탕을 칠 것을 알면서도 구걸에 나섰던 패거리 중 일부가 길 한복판에 쓰러진 그를 발견하고는 몰래 자기들의 소굴로 옮겨서는 사흘간 극진히 간호한 것이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자 거지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그러고는 전부 그에게 무릎을 꿇고 구명지은에 대한 예를 표했다.
그의 은덕이 아니었다면 자신들 대부분이 진즉 굶어 죽었을 거라는 거지 패의 말이 노덕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빈민구휼을 위해 정기적으로 재화를 풀긴 했으나 그의 시혜를 입은 자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던 데다 그나마도 삼보장으로 불러 형식적으로 만난 게 전부였기에 거지들이 전하는 생생한 감사의 인사가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거지들과의 조우는 노덕에게 꺼졌던 생에 대한 의욕의 불씨를 되살렸다. 삼보장으로 돌아온 노덕은 다음 날부터 은밀히 주안 인근에 산재한 천민촌을 살펴보고 다녔다. 그러면서 최소한의 의식주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단지 숨이 붙어 있으니 살아가는 이들의 비참한 실상을 목격하고는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무능력하거나 게을러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동굴을 터전으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가 날 때부터 그렇게 살도록 운명 지어졌거니와 보다 나은 세계로 나아갈 기회를 봉쇄당한 불행아들이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여식이 그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이후 자포자기했던 노덕은 새로운 삶을 살기로 작심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졌다고 여겼지만 그의 처지는 여전히 축생만도 못한 인생을 영위하는 이들보다는 나았다.
그의 여생을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구제하는 데 오롯이 바치기로 마음먹은 노덕은 오랫동안 소원했던 의질을 불렀다. 언젠가 의형이 알려 준 이족의 자옥을 찾아 재기의 발판으로 삼을 작정이었다. 축재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세상에서 소외된 수많은 이들을 재우고 입히고 먹이려면 절대적으로 자금이 필요했다.
야심한 시각이었지만 적지 않은 행인이 거리를 오갔다.
그러나 아무도 반년 전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던 삼보장주가 두 명의 청년을 대동하고 그들 곁을 지나가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둡기도 했거니와 노덕의 인상이 그때와는 사뭇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쳇, 고향에서는 제법 유명 인사인 것처럼 굴더니 변장하거나 죽립으로 가린 것도 아닌데 아무도 눈길조차 안 주는군. 혹시 피라미를 낚고는 월척을 잡았다고 떠들어 대는 조사(釣士)들처럼 허풍 떤 거 아뇨, 노인네? 아니면 자신의 진짜 위상을 가늠하지 못하고…….”
“말조심해라, 대웅.”
대웅의 불경스러운 언사를 중단시키며 진천이 주의를 주었다.
볼이 부었지만 어지간하면 진천에게 순종하는 대웅은 순순히 입을 닫았다. 진천이 노덕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대인?”
“실은 삼보장이 비어 있지 않을지도 모르네.”
대웅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하인들도 다 나가고 혼자 살았다고 했잖소, 노인네?”
노덕의 눈가에 그늘이 졌다.
“그렇긴 한데. 삼보장은 더 이상 내 소유가 아닐세.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거기서 기거하도록 내 여식이 편의를 봐준 것뿐일세.”
“그럼 뭐요? 노인네가 죽었을 거라 생각하고 그녀가 돌아왔을 거라는 거요?”
“그건 아닐 걸세. 하지만 그 아이가 삼보장을 관리하도록 도화각(桃花閣)의 무사들을 보냈을 수는 있네. 혹시 그렇다면 그들과 부딪치지 말아 주게나.”
“흥,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쇼, 노인네. 그놈들 태도를 봐서 결정할 테니.”
흉골(胸骨)이 빨래판의 주름처럼 불거져 나온 대웅의 빈약한 가슴팍을 툭 치며 진천이 노덕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인.”
“자네만 믿겠네.”
빈말이 아니었다. 노덕은 진천이 듬직했다. 그러나 그는 그 반듯하고 부드러운 청년이 조만간 평지풍파를 일으킬 것임을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