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50
제249화
벽력도문에 들어가지 않고 천지인봉 북편의 송림에 머물러 있던 독후는 허공에서 하강하는 곽건을 보고는 걸터앉아 있던 거송의 나뭇가지에서 내려왔다.
“꽤나 시끄럽던데. 그래, ‘쥐새끼들’의 행방은 알아냈어?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고 젖 달라는 애새끼마냥 빨리 가자고 보챘으니 성과가 있었겠지?”
독후의 질문에 곽건이 인상을 구겼다.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묻는 건 약을 올리겠다는 의도였다.
곽건은 대놓고 비웃음을 머금은 독후의 녹안을 노려보았다. 그녀가 허리에 팔을 두르고 경신을 전개하도록 허락했다면, 그래서 벽력도문에 두 시진만 더 일찍 도착했다면 쥐새끼가 달아나기 전에 잡을 수 있었을 터였다. 자기 때문에 놓쳤음에도 조소를 날리다니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작태였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 옷을 찢어발기고 양물의 위엄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곽건은 자중했다.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은 하시라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리 되면 그 동안의 인내에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할뿐더러 두고두고 후회할 게 뻔했다. 곽건은 시간(屍姦)엔 한줌의 흥미도 없었다.
곽건의 속을 빤히 들여다본 독후가 그에게 냉랭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그러면서도 조롱을 잊지 않았다.
“보아하니 헛물만 켠 게로군. 그럼 이제 어떡하나? 쥐새끼들이 알아서 기어 나올 때까지 손가락이나 빨며 기다려야겠네?”
“방법이 있소.”
독후가 호기심을 보였다.
“무슨 방법?”
“북을 두드릴 거요. 쥐새끼들이 그 소리에 놀라 튀어나오도록.”
솜씨 좋은 화공이 그린 듯 완벽한 색깔과 곡선을 자랑하는 독후의 눈썹이 실그러졌다.
“북이라니? 어쭙잖은 말재간 부리지 말고 알기 쉽게 말해봐.”
“쥐새끼들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소. 그 약점을 공략할 작정이오.”
둑후가 더욱 아미를 찌푸렸다.
“알아듣도록 말하라니까.”
곽건이 으스댔다.
“하늘도 놀랄 묘책을 아무 대가 없이 가르쳐줄 순 없지. 조만간 알게 될 거외다. 지금 당장 알고 싶다면 약간의 성의를 보여주시오. 면사를 걷어보지 않겠소? 입술만 살짝…….”
독후가 가차 없이 곽건의 기대를 뭉갰다.
“꿈도 꾸지 마!”
해가 떨어졌다.
새처럼 날던 곽건은 정신을 잃고 지상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무황이 깨어났다.
“여긴 어딘가, 진진?”
무황 옆에 떨어져 내린 독후가 대답했다.
“단성(鄲城) 근처예요.”
곽건의 얼굴을 한 무황이 미간을 모았다.
“단성이라니? 주안에 있을 거라지 않았던가? 진광이 여기로 옮겼는가?”
“진광은 잠적했어요. 그와 함께 어울리는 무리와 함께. 그래서 그 아이는 그들의 소재를 확인하기 위해 이리저리 설쳤어요. 그러다 천지인봉까지 갔다 왔지 뭐예요.”
“그럼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인가?”
“원주요.”
“원주라면 오대세가의 하나인 강가의 터전이 아닌가?”
“맞아요.”
“진광의 무리가 거기에 은신했다던가?”
“아니에요.”
“그렇다면 거긴 무슨 일로?”
“나도 잘 몰라요. 그 아이 말로는 북을 두드려 쥐새끼들을 부를 거라네요. 그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면서, 그 약점을 공략할 거래요.”
“…….”
“무슨 속셈인지 알겠어요?”
“짐작 가는 바는 있다.”
“뭔데요?”
“진광이 몸을 담았다는 세평회란 곳이 협객 놀이를 즐기는 자들로 구성된 결사체라 하지 않았더냐?”
“그래서요?”
“이 물건의 원시적인 협박이 먹힐 거라는 뜻이다. 엄한 이들을 살해한 연후 그들이 나올 때까지 계속 무차별적인 살육을 벌이겠다고 압박을 가하면 진광 같은 협사들이 어떻게 버티겠느냐? 사파나 마도의 인사들에겐 별 소용이 없겠지만 정파 연하는 부류에겐 꽤 효과를 발휘할 게다.”
“……그렇군요.”
“그렇다.”
“그럼 어쩔 건가요?”
“뭘 말이냐?”
“이대로 원주로 갈 건지 묻는 거예요.”
“그래야지. 달리 갈 곳이 없지 않으냐?”
“그 아이가 강가의 칼잡이들을 학살하도록 내버려두겠다는 건가요?”
“설마 그들을 걱정하는 게냐, 진진?”
“그럴 리가요. 벌레들이 얼마나 죽든 상관하지 않아요. 쉴 새도 없이 먼 길을 쏘다녀야하는 게 귀찮을 뿐이지.”
“성가시더라도 조금 참아라, 진진. 진광을 찾을 뾰족한 수가 없다면 이 물건의 뜻대로 하자꾸나. 원력은 무한정 지속되는 게 아니다. 정확한 기간을 특정할 순 없지만 일 년은 넘지 못할 게다. 어쩌면 그 절반, 혹은 그보다도 짧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급적 빨리 옛 친구를 만나 회포를 풀어야 하지 않겠느냐?”
독후는 원주가 있는 북녘을 향해 신형을 날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만의 인구를 품은 고도(古都)에 봄 햇살이 화사하게 내리쬐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면면마다 활력과 여유가 넘쳐흘렀다. 그들의 자랑스러운 고장은 근래 최고의 성세를 구가하고 있었다. 강가가 당금 무림의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로 자리매김한 덕분이었다. 정맹의 맹주인 북천도왕은 말할 것도 없고 신화적 무존인 천무대제의 아성에 도전한다는 신황도 사실 상 강가의 일원이었으니 원주 백성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자고로 위가 높아지면 아래도 덩달아 우쭐해지는 법이었다.
평화와 풍요로 가득한 원주의 상공으로 두 개의 인영이 날아갔다. 벽력도문을 떠나 온 곽건과 독후였다.
강가의 직계들이 모여 사는 둔덕을 코앞에 두고 독후가 경신을 멈추었다. 곽건이 뱀눈을 희번덕거리며 물었다.
“왜 그러시오?”
“너 혼자 가.”
곽건은 독후와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순순히 신형을 띄웠다. 굳이 그녀와 동행할 까닭이 없어서였다. 가소롭게도 천하제일가를 자처하는 강가의 멸문은 신마의 단독 업적으로 기록되어야 했다. 독후가 함께 가면 그녀가 손을 쓰지 않더라도 뒷말이 나올 게 뻔했다.
독후를 야산에 두고 홀로 강가촌으로 날아간 곽건은 허공에서 마을의 전경을 내려다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수백 채의 와옥은 크기나 구조가 대동소이했다. 이래서야 어디가 강가의 요처인지 알아낼 재간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마을 중앙의 널찍한 공터로 날아 내린 곽건은 냅다 소리를 질렀다.
“가서 강가의 늙다리들에게 어서 튀어나와 신마를 영접하도록 일러라.”
목청껏 외쳤으나 목소리에 공력을 실을 수 없었기에 그의 고함은 기껏해야 십여 장을 뻗어나갔을 뿐이었다. 미증유의 신력을 얻었지만 내공이 없어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제 단점에 짜증이 일어 면상을 구겼던 곽건은 다음 순간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공터 주변을 거닐던 강가의 무인들이 대경실색해서는 너나없이 경호성(驚號聲)을 쏟아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반응은 이미 신마라는 존재와 그 위상을 알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기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명색이 정파제일가인데 사흘 전 마원에서 일어났던 대사건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터였다.
곽건은 느긋하게 강가의 수뇌부가 달려 나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오른쪽 골목길에서 일군의 무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선두에 선 단발의 노인을 본 곽건이 찢어진 눈을 부릅떴다. 이게 웬 횡재란 말인가. 평범한 화의를 걸치고 있지만 노인은 정파의 지배자 북천도왕이 틀림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수차례 보았던 용모화의 모습 그대로였다.
북천도왕 강운이 곽건과 칠팔 장을 격하고 섰다. 그의 뒤로 십여 인의 노인이 일렬횡대로 늘어섰다. 하나같이 삼엄한 내기를 분출하는 도호들이었다.
거만하게 턱을 쳐들고 북천도왕에게 시선을 고정한 곽건이 이죽거렸다.
“그걸로 되겠어? 마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지? 그 늙은이들을 다 합쳐도 삼대마군의 발바닥에도 못 미칠 것 같은데. 그렇다고 네가 마왕보다 월등히 강한 것 같지도 않고. 다들 뒈지려고 작정했어?”
정파 무림의 맹주를 ‘너’라고 칭하는 곽건의 무도한 언사에 강가 도호들의 안면이 분기로 물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호통을 치지 못했다. 마원에서 날아온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사실이라면 목전의 청년은 광언을 뱉어낸 게 아니었다.
강운이 침중한 음성을 토해냈다.
“우리를 죽이러 온 건가?”
양 허리에 손을 얹고 짝 다리를 짚으며 곽건이 건들거렸다.
“뭐, 딱히 정해놓은 건 아니야. 대충 그럴 참이지만 안 그럴 수도 있단 말이지. 그러니 호랑이를 본 똥개들처럼 너무 겁먹지 말아들. 혹시 알아? 이 신마님의 비위를 잘 맞추면 멸문지화를 면할지. 어때? 내 똥구멍을 핥을 준비가 됐어?”
강운을 비롯한 강가의 노장들은 곽건이 일부러 흑도의 말투를 사용해 모욕을 주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를 응징할 방도가 없었다. 그젯밤 서천에서 날아든 소문이 사실이라면!
곽건이 갑자기 정색했다.
“농담이 아냐. 귓구멍을 후비고 똑똑히 들어. 너희가 살 길은 오직 하나야. 쥐새끼, 그러니까 감히 신황이라고 참칭하고 다니는 놈이 어디에 있는지 불어. 그러면 봐 줄게. 진짜야. 미리 경고하는데 당장의 위기를 면피하겠다고 거짓으로 둘러대면 재미없을 줄 알아. 온 천하를 뒤져 강가의 씨족이라면 한 마리도 남김없이 몰살시켜 버리겠어. 자, 이제 고해봐. 설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외손자의 거처를 모르는 건 아니겠지, 늙은이?”
“…….”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 늙은이. 이실직고하면 살려준다니까? 어차피 불게 될 거, 괜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어서 털어놔.”
북천도왕이 무겁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본가와 연을 끊은 지 오래다. 조금만 확인해보면…….”
곽건의 노성이 북천도왕의 말을 끊었다.
“닥쳐! 쓸 데 없는 개소리 늘어놓지 마. 딱 부러지게 말해. 알아, 몰라?”
대답 여하에 따라 가문과 혈족의 운명이 결정될 터이기에 북천도왕은 섣불리 결정하지 못했다.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강가의 도호들은 가주의 고지식한 대응에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설혹 신황이 폐관수련에 든 장소를 모른다고 해도 일단 아무 데나 대고서 대화를 이어가야 할 것이 아닌가. 신마가 약속을 지킬지는 의문이었지만 적어도 가문의 정영들이 피신할 시간은 벌 수 있을 터였다.
북천도왕이 대답에 뜸을 들이자 곽건의 뱀눈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마지막이야. 셋을 헤아릴 때까지 그 쥐새끼가 숨은 곳을 불지 않으면 여기를 피바다로 만들어주지. 하나, 둘…….”
북천도왕의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왔다.
“그는 세평시(世平市)에 있소.”
“신황의 은신처는 다름 아닌 창인이오.”
“그 아이는 삼보장 지하의 비처에 숨어있을 거외다.”
“북해요. 내가 듣기로는 북해의 빙원 어딘가에…….”
강가 노호(老虎)들이 쏟아내는 중구난방에 곽건의 동공에서 시뻘건 안광이 화염처럼 뿜어져 나왔다.
“이런 개새끼들!”
원주 강가를 방문한 곽건의 입에서 원색적인 욕설이 터져 나온 그 시각 창인에서 남쪽으로 일천리 떨어진 밀림에서는 가린이 숲속을 질주하다 말고 경악성을 터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