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52
제251화
강민이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외람된 말이오나 귀하는 작년 가을 양자호에서 ‘그놈’과 치렀던 비무에서 패한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었다고 들었소. 단전이 완전히 깨졌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단순히 회복한 정도를 넘어 이토록 놀라운 무위에 도달할 수 있었소? 부디 내게도 비결을 가르쳐주오.”
곽건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흘렸다. 강민의 표정과 음성이 보다 절박해졌다.
“귀하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나는 그놈을 증오하오. 그 악랄한 놈은 진실한 무력을 숨긴 채 공깃돌마냥 나를 갖고 놀았을 뿐만 아니라 내 여인마저 빼앗아 갔소. 그러면서도 우둔한 세상 사람들을 상대로는 정인군자인 양 굴고 있으니 실로 가증스러운 놈이 아닐 수 없소. 나로서는 골백번 죽어도 그놈이 나에게 저질렀던 죄과를 잊지 못할 거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교활한 놈을 처단할 방도가 없어 절망의 나날을 보내야 했소. 그러던 차에 며칠 전 서천으로부터 날아온 기적과 같은 소식을 접하고는 귀가 번쩍 뜨였소. 기실 귀하를 만나기 위해 내일 벽력도문으로 출발할 예정이었소. 바라건대 내가 그 간악한 놈을 처단할 수 있도록 귀하의 비법을 알려주오. 거저 달라는 게 아니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귀하를 주군으로 받들고 평생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겠소.”
곽건이 히죽 웃었다.
“그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놈의 자세냐?”
강민이 즉각 바닥에 오체투지 했다. 이마를 땅바닥에 박으며 강민은 말투와 호칭도 바꿨다.
“믿어주십시오.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주군.”
곽건이 엎드린 강민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고개를 들어라.”
강민은 곽건의 명을 따랐다. 두 사내의 눈이 불과 일 자의 거리를 격하고 마주쳤다. 곽건의 뱀눈에 도사린 조롱기를 감지한 강민은 불안해졌다.
“그놈이 그렇게 싫으냐?”
“그렇습니다.”
“너하고는 사촌지간이라면서?”
“그렇긴 하지만, 아니 그렇기에 더욱 치가 떨립니다. 혈족에게 간교한 술책을 부리는 자는 지옥으로 가야 마땅합니다.”
“흠, 그래? 근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섬전도.”
“말씀만 하십시오, 주군.”
“이미 무왕들을 능가했다는 그놈을 처치하려면 나만큼 강해져야 할 텐데 그러면 그때 가서 네가 나를 배반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잖아?”
“맹세컨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제가 그놈을 응징할 힘을 주신다면 결코 주군의 은덕을 잊지 않겠습니다.”
곽건에게서 대꾸가 없자 강민은 애가 닳았다.
“믿어주십시오, 주군. 원하신다면 제게 금제를 가하셔도 좋습니다. 아니면 그놈을 염왕으로 보낸 후 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주군의 심려를 덜어드리겠습니다. 그놈을 죽일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습니다.”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제 모든 걸 걸고 맹세합니다, 주군. 제발 저를 믿어주십시오.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필사적으로 애원하는 강민을 지그시 바라보던 곽건이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까지 나온다면야.”
곽건의 중얼거림에 희망이 생긴 강민이 다시 ‘맹세’를 남발했다. 그의 간절함을 비웃듯 곽건이 경망스럽게 키득거렸다.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쳐든 강민은 곽건의 뱀눈에 서린 냉혹함을 인지하고는 표정이 굳었다.
곽건이 웃음기를 지우고 정색했다.
“허 참, 정파 놈들이란. 너만 이런 게냐, 아니면 죄다 이런 게냐?”
무엇을 묻는 건지 알 수 없었기에 강민은 침묵했다. 곽건이 말을 이었다.
“너무 순진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야. 설마 정말로 나를 상대로 이따위 수작이 먹힐 거라 기대한 건 아니겠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처지인 건 이해한다만 그래도 정도가 있는 거 아냐? 그나마 기회가 있을 때 달아나서 목숨이라도 부지했어야지. 안 그래?”
이번에도 강민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강민을 절망의 늪에 빠뜨렸던 곽건이 구명줄을 던졌다.
“하지만 네 얘기엔 심금을 울리는 바가 있다. 천지간에 네 심정을 나만큼 잘 이해하는 자는 없을 거다. 나도 ‘그놈’이 싫다. 치가 떨리도록. 그놈에 대한 원한으로 잠을 설치며 하도 이를 갈아서 어금니가 다 닳아버렸다. 그놈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악마에게 혼백을 바쳐도 좋다고 수천, 수만 번을 생각했다. 그 참담하고 암울했던 시절…….”
강민이 부르짖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주군.”
곽건이 인상을 썼다.
“내가 말하는 중에는 주둥이를 닫고 있어야지.”
강민이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죄송합니다, 주군.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김이 빠진 곽건은 회상을 중단했다.
“구질구질하게 옛날이야기를 해서 뭐 하겠어. 중요한 건 항상 현재야. 그런 의미에서 네 요청에 대한 답을 주마.”
곽건이 뜸을 들이자 강민은 간이 오그라들고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렸다. 강민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던 곽건이 조소를 머금었다.
“나는 네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선고를 앞둔 죄수처럼 긴장해 있던 곽건이 고개를 쳐들며 감격에 겨운 목소리를 토해냈다.
“감사드립니다, 주군. 이 강모, 주군의 하해와 같은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기필코 그놈을 죽이고 평생토록 주군의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곽건이 강민의 말을 잘랐다.
“어이,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네가 내 종이 될 일은 없어.”
곽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강민이 그를 멀뚱멀뚱 올려다보았다.
“이제 염왕에게 보낼 놈을 종으로 부릴 까닭이 뭐냔 말이지. 안 그래?”
강민이 더듬거렸다.
“하, 하지만, 바 방금 제 청을 들어주신다고…….”
“그래, 그럴 거야.”
“그런데 왜……?”
“왜긴 뭐가 왜야? 방금 전에 네가 그랬잖아. 그놈을 죽일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다고. 제 입으로 뱉어놓고 이제 와서 부인할 심산은 아니겠지? 뭐, 그래 봤자 결과는 달라지지 않겠지만.”
강민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곽건이 히죽 웃었다.
“네 청에 따라 그놈을 죽여주마. 그 대가로 너는 목을 바쳐라.”
곽건에게 희롱 당했음을 깨달은 강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개만도 못한…….”
곽건은 강민이 욕설을 마무리 할 기회를 주지 않고 그의 머리통을 박살냈다.
소소한 즐거움을 누린 곽건은 사냥을 재개했다.
강민에게 반각의 시간을 할애하는 동안 사냥감들은 꽤 멀리 달아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추격을 뿌리치기엔 어림도 없었다. 천공으로 비상한 곽건은 병아리 떼를 쫓는 매처럼 손쉽게 강가의 무인들과 식솔들을 찾아내고 따라잡았다. 그러고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일각도 지나지 않아 일천이 넘는 인명을 살해한 곽건은 어느 순간 손을 멈추었다. 무언가 꺼림칙했다. 곽건은 곧 그 연유를 알아차렸다. 많은 이들을 죽였지만 강민 같은 젊은 사내들은 극소수였다. 강가의 후기지수들이 도피했다는 뜻이었다.
신무(神霧)를 뿜어내 수백 채의 와옥들을 녹인들 지하에 있을 비밀 통로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곽건은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멀리서 신경을 건드리는 미음이 잡혔다.
곽건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강가촌을 벗어나 두어 개의 산등성이를 넘자 들판이 나왔다. 들판 끝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속도를 줄이고 상공을 배회하며 곽건은 집중했다. 절벽에 면한 곳에서 불규칙한 발자국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그리로 날아간 곽건은 불문곡직 땅 속을 파고들었다.
도화강 너머의 창주까지 이어진 비로(秘路)를 지나고 있던 강가의 청년도객들은 동굴 천장에서 떨어진 괴인영의 정체가 신마임을 알고는 혼비백산했다. 그의 출현은 가주인 북천도왕을 비롯한 강가 원로들의 저지선이 무너졌다는 방증이었다. 곽건이 무리의 중간에 떨어졌기에 강가의 정예들은 반으로 갈라져 달아났다. 비명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모두들 무기력하게 곽건의 마수에 목숨을 잃었다. 칼을 빼들고 저항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일곱 번의 호흡을 마치기도 전에 일백삼십 여 정영을 몰살시킨 곽건은 땅을 뚫고 지상으로 빠져나왔다. 서산에 걸린 해를 힐끗 바라 본 곽건은 강가촌으로 되돌아갔다.
천하제일의 성세를 자랑하던 강가의 터전은 한 순간에 유령의 마을로 변해있었다.
강가촌 구석구석을 뒤져 숨소리를 죽인 채 숨어있던 이들마저 남김없이 살해한 곽건은 둔덕 아래에서 기다리는 독후에게로 갔다.
“다 끝났어?”
독후의 질문에 곽건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덜 끝났소.”
독후가 아미를 찌푸렸다. 곽건이 검지를 뻗어 원주를 가리켰다.
“사소한 문제로 잠시 한 눈을 파는 동안 상당수가 저기로 빠져나갔소. 강가에서 처리한 자들은 삼분지일도 안 될 거요.”
독후의 시선이 노을이 깔린 하늘로 올라갔다.
“그래서 어떡할 건데? 원주에 스며든 강가의 혈족들을 일일이 찾아서 죽일 셈이야?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하지 않겠어? 곧 해가 떨어질 걸.”
곽건의 뱀눈이 가늘어졌다.
“천만에. 시간은 충분하오.”
독후의 녹안에 청광이 번득였다.
“어쩌려고?”
곽건이 비릿하게 웃었다.
“알면서 물어보시오? 귀찮게 초가에 기어든 빈대들을 하나씩 찾아낼 게 뭐 있소? 모조리 태워버리면 그만인데. 여유를 부려도 일다경이면…….”
독후가 곽건의 말을 끊고 들어갔다.
“원주의 백성을 몰살시킬 작정이야?”
곽건이 반문했다.
“그러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소?”
“…….”
“당신이 반대한다면 고려는 해보겠소. 딱히 긴요한 일도 아니니까.”
그녀의 말 한마디에 오만의 목숨이 걸려 있었으나 독후는 일고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맘대로 해. 내 알 바 아냐.”
“그럴 줄 알았소. 그럼 여기서 기다려 주시오. 아! 혹시 모르니 지금 인사를 하겠소. 내일 아침에 또 봅시다.”
독후에게서 아무런 응답이 없자 뱀눈을 씰룩이며 서운함과 불쾌감을 전달한 곽건이 몸을 솟구쳤다.
가린은 탈진한 사람처럼 널브러졌다.
실제로 많이 지치기도 했지만 그가 휴식을 취하는 건 극심한 피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행진을 가로막은 것은 드넓은 평야였다. 수목이 울창한 밀림에서는 주야에 상관없이 이동할 수 있었지만 햇볕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평지에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악어껍질보다 질긴 가린의 갑피는 우습게도 일광에는 갓난아이 피부만큼이나 연약했다. 그가 햇빛이 살갗에 닿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탓에 진천은 강행군을 고집할 수 없었다. 짧은 거리라면 모를까 한 시진 이상 달려야 하는 광야를 쉼 없이 돌파하자고 요구하기는 어려웠다.
평야를 우회해서 가는 방법도 있었으나 들판의 구조가 세로보다 가로가 훨씬 더 길다는 가린의 설명을 듣고는 포기해야 했다. 시간이 비슷하게 걸린다면 멀리 돌아갈 바에야 일몰 때까지 가린에게 휴식을 주는 게 나았다.
지리를 몰라 답답했지만 진천은 조급한 마음을 다잡았다. 기실 가린이 동행이라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가린은 훌륭한 길잡이였다. 길을 찾고 기억하는 그의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가린이 아니었다면 수천 리에 걸쳐 뻗어있는 밀림지대에서 주구장창 헤매야 했을 터였다.
가린에게 감사하며 진천은 쉬는 동안 무영을 연습해보기로 했다. 진천이 바위로 다가가자 땅바닥에 퍼져있던 가린이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가린의 튀어나온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집체만한 거암 속으로 쑥 들어갔던 진천이 좀처럼 나오지 않자 벌떡 일어난 가린이 그리로 달려갔다. 바위에 이른 가린은 갑자기 진천의 얼굴이 나오자 엉덩방아를 찧었다. 쓴웃음을 지은 진천이 몸을 마저 빼냈다.
“가린은, 놀란다.”
“미안해, 가린.”
가린이 도리질을 했다.
“가린은, 괜찮다. 너는, 굉장하다. 가린은, 궁금하다.”
몸을 일으킨 가린이 손바닥으로 제 배를 두드렸다. 그의 의도를 이해한 진천이 난색을 표했다.
“그건 좀 힘들 것 같다, 가린. 넌 바위가 아니잖아. 손 정도라면 모를까 몸 전체를 집어넣는 건 위험해. 자칫 잘못하면 우리 둘 다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볼 거야.”
실망한 가린이 툴툴거렸다. 고소를 머금은 진천이 말을 이었다.
“좀 더 기다려줘, 가린. 꼭 너를 통과해 보일 테니.”
잇몸을 드러내며 가린이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진천의 어깨를 툭 쳤다. 격려의 의미였지만 진천은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그러면서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