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54
제253화
간이 철렁 내려앉았던 진천은 이어진 장초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세평회가 세상의 중심이 되지 않았더냐? 사패가 모두 세평회의 뜻이라면 꼼짝도 못한다던데. 정말 자랑스럽구나, 천아. 네가 대단한 인물이 될 거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일 년 만에 중원 무림을 정복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감히 신황에게 말을 놓아도 되는지 모르겠구나.”
농담만은 아닌 듯 장초의 걸걸한 목소리가 버들피리처럼 떨려나왔다. 쓴웃음을 지은 진천이 장초를 안심시켰다.
“물론이에요, 아저씨. 저를 어렵게 대하면 섭섭할 거예요. 우린 오랜 친구잖아요.”
장초가 감격했다.
“그렇다마다. 네가 코흘리개 시절부터 우린 최고의 친구였지. 아무렴, 그렇고말고.”
진천에게 다가온 장초가 그를 껴안았다.
“근데 왜 이렇게 말랐느냐? 대체 무슨 신공을 수련하는 게냐?”
“그렇게 됐어요. 그보다 강호 소식을 더 듣고 싶어요, 아저씨.”
“그래. 일단 불을 좀 켜자꾸나.”
장초가 어둠을 익숙하게 해쳐나가더니 등잔을 밝혔다. 등잔 주위의 어둠이 동그랗게 밀려났다. 진천의 모습을 본 장초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 꼴이 뭐냐? 전날 삼보장에서 보았던 철곤귀보다 상태가 더 심한 것 같은데.”
뼈에다 얇은 살가죽만 얹어 놓은 것 같은 제 몸을 내려다 본 진천은 쓰게 웃었다.
“옷 한 벌만 빌려주세요, 아저씨. 참, 오늘이 몇 월 며칠이죠?”
옷을 가지러 주방 쪽으로 가며 장초가 대답했다.
“오늘? 그야 사월 십일일이지. 얼마나 열심히 수련했기에 날짜도 모르는 게냐?”
대충 예상을 했으면서도 진천은 당혹스러웠다. 무려 넉 달이나 목내이로 있었던 것이었다. 그나마 의식이 온전했던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아니, 전화위복이었다. 오롯이 의식만 남아있던 덕분에 무영의 궁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 넉 달 간의 집중은 십 년 이상의 심상수련과 맞먹을 터였다.
장초가 누더기나 다름없는 마의(麻衣)를 갖고 왔다. 진천은 하초만 가린 초의(草衣)를 벗고 마의를 입었다. 장초와의 체격 차이로 인해 꼭 장포를 걸친 것 같았다.
탁자에 앉은 진천은 맞은편의 장초로부터 겨울에서 봄까지 이어진 강호의 변화에 대해 들었다. 놀랍도록 그가 명에게 일러두었던 복안의 내용과 흡사한 전개과정이었다. 진천은 만족했다. 완벽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형국이었다. 진천은 중원의 평온함과 세평회 친인들의 무사함에 감사했다.
오랜 경험으로 진천의 표정이 의미하는 바를 감지한 장초가 신이 나서 떠들었다.
“이건 최신 정보다, 천아. 네가 신속한 연락망을 구축해두고 수시로 중원 사정을 알아보라고 했다기에 내가 직접 여기다 객잔까지 차리고 정착하지 않았겠느냐? 예전엔 중원의 소식이 들어오는데 족히 한 달은 걸렸지만 지금은 열흘이면 충분하다. 전서구까지 부리니까.”
중원 행을 서둘 까닭이 없었기에 한결 느긋해진 진천은 장초와 한담을 하며 가린과 함께 남해로 돌아가 공 노인을 데려올 지를 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객잔 밖에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의자를 밀치고 일어난 장초가 문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두 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야밤에 무슨 일이냐, 심가야?”
“급보를 받으면 시간에 개의치 말고 바로 알리라고 하지 않았소?”
“그래서? 중원에 기변이라도 생겼다는 게냐?”
“그렇소. 이걸 보시오.”
“엇!”
“어떻소? 올 만하지 않았소?”
“알았다. 수고했다. 그만 가 봐라. 새로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보고하고.”
심야의 방문객을 쫓아버린 장초가 허겁지겁 객잔 안으로 돌아왔다.
“큰일이구나, 천아. 여기 흑문의 수첩(首諜)인 심초란 자가 가지고 온 전갈인데…….”
진천은 장초가 내민 종이를 받아들었다. 어른 손바닥 크기의 첩지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진천의 어깨 너머로 첩지를 들여다보던 가린이 해석을 요구했다. 진천이 무거운 음성을 토해내었다.
“아흐레 전 마원에서 신마라는 자가 나타나 마왕과 삼대마군을 죽이고 마련의 마인들을 굴복시켰대, 가린.”
가린이 고개를 갸웃하자 진천이 설명을 보탰다.
“내가 무황 얘기를 했지? 바로 그 자야.”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가린이 으르렁거렸다. 진천은 서둘렀다.
“그만 가 봐야겠어요, 아저씨. 중원의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니까 당분간 다들 밀림 깊숙이 들어가 있는 게 좋겠어요.”
“작년 가을처럼 말이냐?”
“네.”
“알았다. 내게 맡겨다오. 우리는 걱정하지 마라. 근데, 천아.”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던 장초는 진천이 조급해하는 기색이자 입을 뗐다.
“그 신마라는 놈한테 이길 수 있지? 너도 장왕과 사파 거두들을 끝장냈잖아?”
긍정의 답이 불가능한 질문이었지만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해봐야지요.”
장초가 더 붙들기 전에 진천이 가린에게 말했다.
“가자, 가린.”
가린의 팔에 안긴 진천은 정북 방면으로 달리도록 지시했다.
일단 보다 상세한 사정을 알아보아야 했다. 마왕과 삼대마군을 해치운 무황의 다음 행적이 중요했다. 구일이면 주목해야 할 일들이 일어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무황은 필히 그의 성향을 드러냈을 것이었다.
진천이 염두에 둔 목적지는 오란에서 북으로 팔구백 리 떨어진 선포(旋浦)였다. 선포는 하남 무림과 사벌의 경계에 위치한 시진이었다. 상주인구는 오천을 넘지 않지만 교역의 요지인지라 오가는 상단이 많았다. 분명히 상운의 특급지점이 있을 터였다.
진천의 다급한 심정을 알기에 가린은 한 번의 휴식도 없이 밤새 내달렸다. 선포에 이르렀을 때는 지칠 대로 지쳤음에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새벽의 포구를 질주하는 거인을 본 취객들이 헛것을 보았다고 여기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진천은 주위의 건물들을 살폈다. 규모가 제법 큰 장원을 발견한 진천은 그리로 가도록 가린에게 일렀다. 소해장(小海莊)이란 현판을 올려다 본 진천은 제대로 찾았음을 알았다. 현판 모퉁이에 상운 소속임을 알리는 표식이 붙어있었다.
진천을 안은 가린은 일 장이 넘은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러고는 장원 중앙에 자리한 삼층 와옥의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곰을 방불케 하는 체구지만 표범의 날렵함을 선보인 가린은 진천이 가리킨 창에 붙었다.
와옥의 구조상 장주의 침실일 거라 짐작되는 방에 달빛과 함께 침입한 진천은 침상으로 걸어갔다. 소해장의 주인이 강단이 있는 인물이길 바라면서.
불청객의 존재를 감지했는지 이불 안에서 뒤척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진천이 나직이 말했다.
“해치지 않습니다. 몇 가지 물어보기 위해 결례를 무릅쓰고 찾았을 뿐입니다.”
침착한 목소리가 대꾸했다.
“무엇을 알고 싶으시오?”
“지난 열흘 간 신마의 행보에 대해 들려주길 바랍니다.”
이불 속의 인물은 침묵했다. 진천이 말을 이으려는 찰나 예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귀하가 누군지 알아도 되겠소?”
잠시 망설이던 진천은 신분을 밝혔다.
“나는 세평회의 진천입니다.”
“헉!”
경악성을 토해낸 미지의 인물이 재빨리 침상에서 내려와 바닥에 엎드렸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선포 소해장주 차(車)모가 신황께 인사 올립니다.”
머릿속에 저장된 강호인명록을 뒤졌지만 진천은 차씨 성을 가진 상인을 찾지 못했다. 백대 거상에 속하는 이가 아니란 뜻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소해장이 일급 상운이라는 사실과 목전의 노인이 침착한 인물이라는 점이 중요했다.
노인을 일으킨 진천은 용건을 상기시켰다.
“신마의 행적을 알고 싶습니다만.”
노인이 진천을 원탁으로 안내했다. 진천은 착석을 극구 마다하는 그를 억지로 앉혔다.
차를 대접할 분위기가 아님을 간파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순서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마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은 마원입니다. 정확히 열흘 전이었지요. 당시 마련의 마인들은 백마지쟁을 위해 마원에 운집해 있었습니다. 독후를 대동하고 나타난 신마는 홀로 마왕과 삼대마군을 상대해 그들을 압도하는 무위를 선보이며 사인(四人)을 죽이고 마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거기까지는 진천도 아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진천은 노인의 말을 끊지 않고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진천은 몇 번이나 신음성을 흘렸다.
천마의 힘을 가지고 돌아온 괴물은 무황이 아니라 곽건이었다. 마원에서 가공스러운 무위를 과시한 곽건은 마왕에 이어 연달아 검왕과 북천도왕이라는 거물들을 처치함으로써 천마의 재림을 알렸다.
원주의 오만 백성을 학살하는 희대의 만행을 저지른 후 곽건은 정파 무림의 본산인 정맹에 무혈 입성했다. 강가의 비극을 들은 정맹의 무인들이 달아나버렸기 때문이었다. 도주를 택한 이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멸문지화를 입은 강가를 제외한 사대세가 전부가 터전을 버리고 잠적했다.
무주공산이 된 정파 무림의 영토는 마인들의 난장판으로 화했다. 도처에서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고 수많은 생목숨이 죽어나갔다. 정확한 집계는 불가능했지만 불과 사나흘 사이에 수십만의 민초가 마인들의 살육제에 희생되었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그 수는 산기슭을 굴러 내려오는 눈덩이처럼 갈수록 불어날 것이었다.
신마와 마인들에 대한 공포가 대륙을 뒤덮었고 정파 무인들에 대한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가장 큰 원망의 대상은 신황 진천과 세평회의 협사들이었다. 신마가 그들이 꼬리를 드러낼 때까지 마인들의 광란을 허용할 거라고 공표했기 때문이었다. 정사 무림을 가리지 않고 만천하의 백성들은 하루빨리 신황과 세평회가 신마에게 목을 바쳐 살겁이 끝나기를 기원했다.
어슴푸레한 미명이 창으로 스며들었다. 어둠이 걷히고 진천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된 노인이 꿀꺽 침을 삼켰다. 진천은 노인의 속을 읽었다. 필히 그가 폐관 수련 중 주화입마에 들었으리라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노인이 진천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나 세평회의 영걸들에 대한 세인들의 비난은 참으로 몰염치한 작태입니다. 더욱이 신황께서는 신마의 출현조차 알지 못하시고 수련에…….”
진천이 노인의 말을 잘랐다.
“좀 전에 했던 말씀을 다시 듣고 싶습니다.”
“좀 전이라면…….”
“신마가 공표했다는 부분 말입니다.”
“아, 네! 신마는 금월 보름 오시(午時)를 시한으로 정하고 최후통첩을 했습니다. 그가 지정한 이들은 세평회의 영걸들과 오대세가의 명숙들, 그리고 검후와 금수위들입니다. 만약 그때까지 정맹의 삼정탑(三正塔) 광장에 와서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면 정맹과 월교가 다스리는 땅의 모든 백성들을 몰살시킬 거라고 했답니다. 특히 세평회의 인사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나타나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더군요. 그들이 오지 않으면 그날 당장 일신의 백만 백성을 살해하겠다는 협박도 덧붙였습니다. 기실 백만이라는 숫자엔 어폐가 있습니다. 짐작컨대 현재 일신의 인구는 그 절반도 되지 않을 겁니다. 아무튼 여기저기서 광란을 벌이다 신마의 명을 받고 일신으로 몰려든 마인들이 일신 외곽을 둘러싸고 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일신의 백성들은 거대한 인질이 된 셈이지요.”
바닥 모를 절망과 무한한 분노가 범벅이 된 채 침중한 표정을 하고 있던 진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진천을 따라 몸을 일으키며 노인이 물었다.
“부탁이시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