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55
제254화
노인이 구해온 검은 천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칭칭 감은 가린이 진천을 팔에 안고 몸을 날렸다.
그의 기괴한 모습을 본 거리의 행인들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동이 튼 직후라 밖으로 나온 이들이 적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소동이 일어났을 터였다.
폭이 일백 장에 달하는 대하에 이른 가린은 나룻배에 올라타서는 남해에서 뗏목을 몰 때처럼 엎드려서 팔을 휘저었다. 배는 풍랑을 일으키며 쏜살같이 나아갔다. 강을 건넌 가린은 다시 질주했다. 진천의 말에 따르면 사흘 안에 오천 리를 가야 한다고 했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가린은 ‘존경하는 어린 벗’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가린이 힘을 내는 동안 진천도 마음을 다잡았다. 암담한 국면이었지만 평정심을 유지해야 했다. 진천은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전자는 명확했다. 그러나 후자는 불분명했다. 그렇더라도 어떻게든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야 했다. 곽건을 처치할 것. 그럴 수 있는 수단을 준비할 것.
곽건이 천마의 힘을 지녔음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호야곡에서 검왕을 죽인 다음 날 원주에서 외조부의 명을 끊었다는 것은 검왕과의 일전에서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았다는 반증이었다. 더욱이 원주의 혈겁에서 그가 뿜어냈다는 신무는 전설이 전하는 천마의 학살 방식 그대로였다.
진천은 곽건을 물리칠 가능성이 일 할에도 미치지 못할 거라 예상했다. 어쩌면 일 푼도 안 될지도 몰랐다. 절망감이 엄습했다. 네 명의 무왕이 합세해도 저지하기 어렵다는 괴물을 어찌 홀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 괴물이 인세를 멸망시키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진천은 곽건의 약점을 따져보았다. 전무했다. 검왕의 일점이 통하지 않은 방어력에 마왕과 외조부를 단 일 초에 절명시킨 공격력 앞에서는 분석이 무의미했다. 하지만 그가 신이 아닌 한 어딘가 빈틈이 있을 터였다. 실제로 천무대제가 그의 전임자를 일수에 처단한 전력이 있지 않은가.
과연 곽건에게도 약점이 존재했다. 하나는 그의 과도한 자신감이었고 다른 하나는 단순한 투로(鬪路)였다. 소해장주가 전한 바에 따르면 곽건은 마왕과 삼대마군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몸으로 받아냈다고 했다. 그럼으로써 금강불괴지신임을 입증했지만 노려볼 만한 허점이었다.
진천은 곽건이 전날 천마 양비가 그랬듯 무공의 초식을 사용하지 않고 속도와 힘에 의존하는 원초적인 싸움법을 현시했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다음 수가 예측 가능하다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대비책도 마련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자신이 가진 무기를 점검했다. 무영이 첫 번째로 떠올랐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을 곽건의 속도를 역시 인간의 영역 밖의 비술인 무영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가능성은 희박했다. 진천은 아직 가린이 휘두르는 팔을 흘려낼 자신도 없었다. 하물며 섬광보다 빠를 곽건의 마수에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하지만 그를 대적할 방법은 그것뿐이었기에 진천은 사흘 동안 온힘을 다해 무영의 경지를 끌어올리기로 했다. 그러려면 목숨을 건 모험은 불가피했다.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설사 기적적으로 무영의 상승을 이뤄낸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어찌어찌 위기를 모면한다고 해도 마냥 피하기만 해서는 승산이 없었다. 반격, 그것도 단순한 반격이 아니라 단박에 곽건을 끝장낼 결정타를 마련해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만사휴의였다.
삼정탑은 정맹 칠대 명물 중 하나로 불렸다. 높이가 칠십여 장에 이르는 세 개의 첨탑은 서로 나선형으로 얽혀 구름을 뚫을 듯 높이 솟아있었다.
푸른 하늘에서 따스한 춘광(春光)이 쏟아졌지만 삼정탑을 품은 일만여 평의 광장은 을씨년스러웠다. 십만 이상의 인원을 넉넉히 수용할 수 있음에도 거의 텅텅 비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광장에 모인 무리는 이십 명 남짓에 불과했다. 그들 중 서 있는 이들은 곽건과 독후, 그리고 하얀 문사건(文士巾)을 쓴 노인뿐이었다. 나머지는 무릎을 꿇고 부복하거나 엎드려있었다.
동천에 뜬 해를 올려다 본 곽건이 뱀눈을 일그러뜨렸다.
“오시가 머지않았는데 한 마리도 안 오네? 다 올 거라며?”
곽건의 질문을 받은 문사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아직 반 시진가량 남았습니다, 주군. 그들은 틀림없이 오시의 종이 울리기 전에 당도할 것입니다.”
곽건의 입꼬리가 씰그러졌다.
“네 예측이 틀리면 어떡할 테냐? 책임을 질 거냐?”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처럼 비실비실한 체구였지만 초로의 문사는 별로 겁먹은 기색 없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제 목을 걸겠습니다, 주군.”
곽건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문사를 더 이상 핍박하지는 않았다. 문사는 큰소리를 칠만한 위인이었다.
그는 정파 무림이 자랑하는 지낭 문중석이었다. 무공이라고는 일초식도 익히지 않았음에도 정맹 서열 칠십팔 위의 집보각주에 오른 걸물이기도 했다. 문중석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곽건은 여드레 전 정맹을 접수했을 당시 다른 무인들과 달리 달아나지 않고 집보각에 머물러있던 그를 수하로 거두었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수족들은 칼을 잘 부리는 심복들보다 쓸모가 많았다.
곽건과 문중석이 짧은 대화를 나눈 지 일각도 지나지 않아 일군의 무인들이 광장에 들어섰다. 모두들 상승의 신법을 구사하는 초절정의 고수들이었다. 학익진을 펼친 십칠 인의 선두에 선 이는 면사를 쓴 여인이었다.
열여섯 명의 금수위를 좌우에 거느리고서 곽건의 삼십 보 전면에 멈춰 선 검후가 그를 향해 포권하며 먼저 예를 차렸다.
“월교주 송하령이 신마를 뵙소.”
뒷짐을 진 곽건이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검후에게 다가갔다.
“주제를 모르는군, 할망구.”
곽건의 무례한 언사에 금수위들의 면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기에 왔다는 건 내 밑으로 기어들어오겠다는 뜻이잖아? 설마 나하고 한판 해보겠다고 찾아온 건 아닐 테지? 그러면 마땅히 종들다운 태도를 보여야 할 것 아냐? 저기 저 치들 안 보여? 그 콧대 높은 고암 설가의 늙은이들이야. 뭐, 월교가 고암 설가보다야 위상이 높겠지만 나한테는 도토리 키 재기란 말이지. 무슨 말인지 알아먹겠어?”
검후의 면사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무심한 듯 관망하는 독후를 일별한 검후는 분기를 누르고 굴욕을 감수했다.
“소신, 신마께 인사 올립니다.”
빠르게 용단을 내린 검후가 한 쪽 무릎을 꿇자 금수위들도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랐다. 곽건이 경망스럽게 낄낄거렸다.
“눈치가 제법이군, 할망구. 마음에 들어. 근데 이걸론 충분치 않아. 보다 확실한 충성의 맹세가 필요하단 말이지.”
검후가 고개를 들어 곽건을 직시했다. 곽건은 실성한 사람처럼 실실 웃고 있었지만 그의 동공에서 흘러나오는 안광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저희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저희? 요란스럽게 굴 것 없어. 네가 대가리니까 너만 성의를 보이면 돼.”
“…….”
“뭐, 어려운 건 아냐. 네 낯짝이 유명하다던데 면사를 벗고 진면목을 보여주기만 하면……, 아니, 아니지. 면사는 할망구한텐 속곳이나 다름없을 텐데 그건 너무 가혹한 처사겠어. 게다가 시시하기도 하고 말이야. 그럼 뭐로 할까?”
곽건이 짐짓 궁리하는 시늉을 하자 검후와 금수위들은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이윽고 웃음기를 지운 곽건에게서 청천벽력과 같은 명이 떨어졌다.
“그래, 그걸로 하자. 네 오른손을 내게 바치는 게 어떠냐? 주종지약의 증표로 말이다. 손목을 떼는 게, 목이 떨어지는 것보단 낫잖아? 안 그래?”
월교의 이인자이자 초절정 극상의 고수로 알려진 일겸단수 백리소소가 분을 참지 못하고 반발하려는 찰나 검후의 냉정한 목소리가 그녀를 막았다.
“알겠습니다. 소신, 신마님의 명을 이행하겠습니다.”
왼손으로 검을 빼어든 검후가 서슴지 않고 자신의 우수를 잘랐다. 손이 떨어져나간 그녀의 팔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신음성하나 흘리지 않고 지혈하는 검후를 바라보며 금수위들은 눈물을 삼켰다. 그들의 비통한 심사에 아랑곳없이 곽건이 손뼉을 쳤다.
“잘 했어. 훌륭해. 아주 훌륭해. 이로써 너는 천만인의 목숨을 살린 거야. 그러니 너무 억울해 할 것 없어. 그리고 이제라도 좌수검을 익히면 되잖아. 뭐, 내일이면 관짝에 들어갈 나이이니 쉽진 않겠지만 ,그래도 놀던 가락이 있으니 어지간한 놈들은 쓸어버릴 수 있을 거야.”
그것도 위로랍시고 던진 곽건이 히죽거리며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첫 단추를 잘 꿴 곽건은 흡족했다.
검후에게 단수(斷手)를 강제한 것은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곽건은 어떤 변수도 허락하지 않을 참이었다. 오늘 조우할 원수의 방수가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사전에 발톱을 빼놓아야 했다. 떼로 덤벼도 얼마든지 때려잡을 자신이 있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기실 곽건은 일말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검왕에게 당했음이 확실한 심장은 계속 욱신거렸고 북천도왕의 칼에 맞았던 목덜미도 쓰라림이 가시질 않았다. 썩어도 준치라고 무왕 급들은 다들 한 칼이 있었다.
곽건은 이제 누구에게도 타격을 허용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금강불괴의 위엄을 과시했으니 더 이상의 증명은 불필요했다. 이는 원수를 상대로도 마찬가지였다. 원수는 그의 손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었다.
천공에서 까만 점이 날아왔다. 흑점은 점차 사람의 형상을 갖추더니 곤룡포를 걸친 노인으로 구체화되었다. 노인, 남천도왕이 곽건의 면전에 떨어져 내렸다.
“이제야 보는구나, 건아. 장하다, 내 손자. 네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느니라.”
곽건이 그의 어깨를 감싸오는 조부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손자의 행동에 당황한 남천도왕이 움찔거렸다.
“내가 늦어서 이러는 게냐? 미안하구나. 하지만 네가 부탁한 사안을 확실히 처리하느라 그랬느니라. 정파 무림의 영역을 봉쇄하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구나. 사벌의 모든 인원을 총동원해…….”
곽건이 남천도왕의 말을 끊었다.
“잘못 짚었어, 할아버지. 나는 할아버지가 늦게 와서 화난 게 아냐.”
할아버님에서 할아버지로 호칭이 격하되었지만 남천도왕은 따지지 못했다.
“그럼 무엇 때문에…….”
“몰라서 물어? 내가 언제 할아버지더러 오라고 그랬어? 누가 제멋대로 움직이래. 얌전히 사벌에 박혀서 시키는 일이나 할 것이지.”
남천도왕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참지 못하고 노기를 터뜨리려던 남천도왕은 싸늘한 곽건의 눈빛을 보고는 자중했다. 그의 본능이 위험을 알리는 경고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곽건이 대뜸 남천도왕의 오른손을 잡았다.
“방금 그 표정 기억나. 내가 여섯 살 때였지, 아마. 그날 형하고 삼숙한테서 벽력도법 전구식(前九式)의 기초를 배우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수련장에 왔잖아. 마침 삼숙한테 이해가 느리다며 심한 꾸지람을 들어서 의기소침해 있던 나는 할아버지한테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했더랬지. 그러자 할아버지가 방금 전 그 표정을 짓고는 내 손을 잡았어. 이렇게 말이지. 그러고는 나처럼 징징거리는 약골은 가문에 필요 없다며 내 손가락들을 부러뜨려 버렸어. 이렇게 말이야.”
뚜두둑, 소름 끼치는 기음과 함께 남천도왕의 검지와 중지와 약지가 손등 쪽으로 꺾였다. 망연자실한 남천도왕의 손을 놓아주며 곽건이 히죽 웃었다.
“나는 빚지고는 못 사는 성미야, 할아버지. 그나마 할아버지니까 이 정도로 그친 거야. 다른 놈이었으면 전신의 뼈마디를 잘근잘근 부러뜨렸을 걸. 뒈질 때까지 말이야.”
바람도 없는데 남천도왕의 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남천도왕은 끝내 손자의 무도한 행패를 징치하려 들지 못했다.
남천도왕이 친손자에게 망신을 당하고 일다경쯤 지나서 월교의 무인들이 날아왔던 반대 방향에서 사오십 개의 그림자가 까마귀 떼처럼 푸른 하늘에 나타났다. 그들은 마령 문가와 성주 성가, 그리고 사평 팽가의 원로들이었다. 광장에 진입한 정파 무림의 명숙들은 장내의 상황을 파악하고는 제일 먼저 와있던 고암 설가 무호(武豪)들과 같은 자세를 취했다. ‘신마를 뵙습니다.’를 복창한 후 돌바닥에 엎드리는 노인들을 내려다보며 곽건이 뱀눈을 씰룩거렸다.
“떨거지들은 다 왔는데 정작 알갱이들은 한 놈도 코빼기를 안 비치는군.”
곽건이 그의 뒤에 시립한 문중석을 쏘아보았다.
“이제 잠시 후면 오시다. 종이 울리자마자 가차 없이 네 목을…….”
말끝을 흐린 곽건이 좌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뱀눈이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