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58
제257화
진천은 눈을 떴다.
낯익은 공간이 그를 맞았다. 최고의 귀빈들만 들 수 있다는 선휴각의 특실이었다. 전날 명과 함께 이곳에 묵었기에 진천은 천장에 걸린 독특한 장식을 기억하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던 진천은 면상을 일그러뜨렸다. 하복부에서 엄청난 격통이 올라왔다. 그제야 제 상태를 깨달은 진천은 쓰게 웃었다.
중상을 입었지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그에 대한 곽건의 근원적인 두려움을 이용하고 빈틈을 공략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 괴물을 물리칠 수 없었을 터였다. 진천은 승산이 희박했던 일전을 승리로 이끈 스스로가 대견할 따름이었다.
고개를 돌린 진천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가에 까만 머리카락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진천은 그 머리카락의 주인공이 노미현임을 알았다.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릿결을 만지려던 진천은 신음성을 흘렸다. 그의 왼팔은 팔꿈치 아랫부분이 사라지고 없었다. 진천은 반만 남은 자신의 좌수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의 기척이 전달되었는지 침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던 노미현이 머리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진천은 깜짝 놀랐다. 아름답기 그지없던 그녀의 봉목이 두꺼비눈처럼 퉁퉁 부어있었다. 천하의 절세미인이라도 눈이 그 지경이니 일견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일어났군요.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노미현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목소리도 젖어있었다.
“오랜만이오, 노 소저.”
진천의 인사에 노미현이 울먹였다.
“그렇지도 않아요. 겨우 반년 만인걸요. 작년 시월에 당신이 삼보장을 나갈 때 본 게 마지막이었으니까. 물론 지난 반년은 나에게 백 년 같았어요. 단 하루도, 아니 어느 한 순간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어요. 당신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나도 저승으로 가고 싶었어요.”
노미현의 격정적인 고백에 당황한 진천은 유순한 눈을 소처럼 끔벅거렸다.
“그거 알아요? 충격을 받을 테지만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니 말할 게요. 괴롭더라도 들어줘요. 당신은 무공을 잃었어요. 단전이 파열되고 내기가 소멸되었대요. 의원들 말로는 살아날 확률도 극히 적지만 설사 살아난다고 해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는 어렵다고 했어요. 척추를 다친 데다 내장도 상했기 때문이에요. 중요한 혈맥도 여러 군데 터졌나 봐요.”
진천은 노미현의 말을 수정해주고 싶었다. 그가 잃은 것은 내공이지 무공이 아니었다. 하지만 노미현을 방해할 수가 없었다.
“당신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그래도 상관없어요. 지난 닷새 동안 당신이 이대로 떠나버릴까 봐 애간장이 다 녹아내렸어요. 다시는 당신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까 봐 너무나 두려웠어요. 이렇게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내가 당신을 돌볼 게요. 잘 할 자신이 있어요.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매일 닦아줄 게요. 수발도 들고요. 엄마도 그렇게 십 년을 보살폈어요. 기꺼이, 아니 행복하게 받아들일 거예요.”
“…….”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요. 당신 곁에서 당신을 돌보도록 허락해주기만 하면 돼요. 편안한 바퀴의자를 준비할 게요. 봄에는 꽃을 보고, 여름엔 호수에 가서 바람을 즐겨요. 가을엔 단풍구경을 가고 겨울엔 당신이 그렇게 보고파 했다던 눈을 맞아요. 지난겨울 눈이 내릴 때마다 당신 생각이 나서…….”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는 노미현을 보며 진천은 가슴이 뭉클했다. 그러고는 모종의 결심을 했다. 그가 폐인이 되었다고 여기고서 헌신과 희생을 바치려는 여인의 연정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미현.”
노미현이 울음을 뚝 그쳤다. 진천이 그녀를 이름으로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할 말이 많지만 우선 두 가지만 말하겠소. 첫째, 나는 바퀴의자의 도움 없이 당신과 어디든 거닐 수 있소. 둘째, 당신은 눈이 부어도 여전히 어여쁘구려.”
진천의 말을 해석하기 이전에 본능적으로 무슨 의미임을 알아차린 노미현이 한껏 입을 벌렸다.
“당신 입술이 그렇게 크게 벌어지는 줄 몰랐소, 미현.”
진천의 농담에 황급히 입을 닫은 노미현이 팔꿈치 아래가 뭉개진 그의 팔을 잡고는 자신의 볼에 비볐다.
“꿈만 같아요. 이번 생에서는 이룰 수 없는 소망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노미현은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권왕이 방에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허둥지둥 진천에게서 떨어지는 노미현을 본 권왕이 헛기침을 했다.
“헴, 이 늙은이가 때를 잘못 맞춘 게냐? 그냥 나가랴?”
노미현의 뺨이 홍시처럼 달아올랐다.
“아니에요, 어르신. 이이는, 아니 진 공자는 방금 깼어요. 말씀들 나누세요.”
말릴 새도 없이 노미현이 달아나듯 방을 나갔다. 그녀를 몰아낸 권왕이 탁자를 끌어와서 그 위에 걸터앉았다.
“좀 어떠냐, 아우야?”
“괜찮습니다, 큰형님.”
“괜찮기는, 이 녀석아. 작년에 벽력도문에 쳐들어갔다가 깨졌을 때의 나보다 상태가 심각한데. 나는 그마나 단전이 균열만 가서 공력의 일부나마 보전했지만 너는 완전히……, 아니다. 이런 소릴 해서 무얼 하겠느냐. 네가 살아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의원 나부랭이들이야 죽네, 사네하며 오두방정을 떨었지만 나는 네 회생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네가 어떤 아이더냐? 불사의 용사가 아니더냐?”
답을 할 수 없는 질문이었기에 진천은 잠자코 있었다.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환생결의 저주에서 벗어난 게냐? 가린 녀석에게서 대충 듣긴 했다만 너무 어눌하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말귀를 그렇게 잘 알아들으면서도 그 녀석은 어째 말이 늘질 않냐, 그래.”
진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린은 올해로 아흔여섯이 되었을 권왕보다 최소한 열 살은 더 많을 터였다.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큰 형님. 그보다 그날 제가 오기 전에 삼정탑 광장에서 있었던 일과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권왕은 여느 때와 달리 자신의 궁금증부터 해소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고 순순히 진천의 요청에 응했다.
“나도 그날 좀 늦게 도착해서 그 썩을 놈의 작태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오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고암 설가의 개벽수(開闢手)가 전한 바에 따르면…….”
권왕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진천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곽건이 검후의 손을 자른 것은 괜한 심술이 아니라 무왕들과의 일전에서 생긴 경계심 때문일 터였다.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면 굳이 그녀에게 손찌검을 할 이유가 없었다.
“……정맹은 대대적으로 마인 척살에 나섰다. 세평회의 아이들도 지금쯤 마인들의 목을 따느라 여념이 없을 게다. 그 괴물이 뒈졌음을 알지 못하고 태평스럽게 일신 외곽을 지키고 있던 마인들과 마졸들 대부분이 정심원 늙은이들의 칼 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수는 많아도 무위에서 차이가 나는데다 괴물의 죽음이 알려져 사기가 떨어져 달아나는 데만 급급했다고 하더구나. 아무튼 세상은 네 덕분에 평온을 되찾았다. 지금 만천하에 너를 칭송하는 소리가, 어? 왜 그러느냐, 아우야? 칭찬을 듣기가 거북스러운 게냐? 아니면 똥이라도 마려운 게냐?”
진천이 고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큰 형님.”
“그럼 왜 오만상을 쓰고 있는 게야?”
“걱정스러운 일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무슨 걱정? 그놈은 완전히 끝장났다. 너한테 목이 잘린 데다 진진이 심장을 녹여버렸으니까. 부활할 턱이 없느니라.”
“독후 어르신은 어찌 되셨습니까?”
“너하고 얘기를 나누겠다고 사흘 동안 선휴각에 머무르다 그제 말도 없이 떠났다. 진진에게 무황에 대해 물었더니 내가 반나절만 일찍 정맹에 당도했어도 볼 수 있었을 거라고 하더구나.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거듭 물었지만 진진은 고개만 젓더라. 너는 그게 무슨 소린지 알 테지, 아우야?”
짐작가는 바가 있었지만 진천은 시치미를 뗐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큰 형님.”
권왕이 집요하게 추궁하기 전에 진천이 화제를 바꾸었다.
“그보다 좀 전에 말씀드린 걱정 말인데, 당장 월교에 서신을 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진천의 심각한 표정에 권왕이 미끼를 물었다.
“서신이라니? 무슨 서신?”
“남천도왕의 침공에 대비하라는 내용을 담은 서신입니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권왕의 안색이 변했다.
“뭐라? 사벌은 정맹의 영토 바깥 경계선을 포위하고 있던 자들을 부랴부랴 철수시키고 은인자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침공이라니?”
“남천도왕이 자중한 까닭은 제 상태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건재하다는 정보를 접했다면 그는 필히 잠적을 택했을 겁니다. 하지만…….”
말귀를 알아들은 권왕이 진천의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네가 운신불능에 회복불가의 상태임을 알게 되었으니 그 간교한 너구리가 발톱을 드러낼 거라는 말이구나. 하지만 남천도왕도 제 손자에게 손가락이 부러졌으니…….”
말을 하다말고 사정을 알아차린 권왕이 말끝을 흐렸다. 쓴웃음을 지은 진천이 그의 말을 받았다.
“범인이라면 뼈가 붙는데 몇 달이 걸릴 테지만 남천도왕 같은 절대고수는 사나흘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는 틀림없이 속전속결을 택할 것입니다. 우수가 잘렸다 하나 검후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남천도왕은 그녀가 무력을 회복하기 전에 끝을 보려 할 게 틀림없습니다.”
“허어, 호랑이가 사라진 골에 여우가 왕 노릇을 한다더니 딱 그 짝이로세.”
진천은 쓰게 웃었다. 여우에 빗대기엔 남천도왕은 지나치게 강한 인물이었다. 무림을 통틀어 현재 그를 저지할 수 있는 이는 독후뿐이었다. 하지만 독후는 행방도 묘연할뿐더러 설사 찾아낸다고 해도 힘을 보태줄 위인이 아니었다.
권왕이 진천에게 대책을 물으려는데 노미현이 달려 들어왔다. 그러고는 숨을 헐떡이며 보고했다.
“방금 마령 문가의 풍뢰도 문 공자에게서 들은 얘긴데, 사벌이 월교를 침공했대요.”
권왕이 일자 눈을 부릅떴다.
“언제?”
“어제 오전이었나 봐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더냐?”
“검후 어르신을 포함해 장구에 있던 월교의 고수들이 전멸한 것 같아요.”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권왕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허어, 어찌 이런 일이. 이제 어쩌면 좋겠느냐, 아우야?”
진천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우선 정맹에 경계령을 내려야 합니다. 마인 척살에 나선 고수들도 신속히 불러와야 하고요. 예상컨대 남천도왕은 월교에서 즉시 이곳으로 출발했을 것입니다. 수하들을 대동하고 있을 테니 자신의 속도를 내진 못하겠지만 이르면 모레 아침, 늦어도 오후엔 일신에 당도할 듯싶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 서두른단 말이냐? 너와 내 상태를 알 터인데.”
“남천도왕이 노리는 이는 큰형님이나 제가 아닙니다.”
“그럼 누군데?”
“명입니다.”
“어째서?”
“그날 남천도왕은 명의 정체를 파악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설령 그러지 못했을지라도 그녀가 더 성장하기 전에 최우선적으로 제거하려 들 것입니다.”
노미현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럼 어떡하죠? 다들 다시 비처에 숨어야 하나요?”
진천이 쓰게 웃었다.
“불가하오.”
“왜요?”
“남천도왕이 손자의 방식을 답습할 것이기 때문이오.”
“……그가 일신의 백성들을 인질로 삼아 우리를 불러낼 거라는 말인가요?”
“그렇소.”
권왕이 욕설을 뱉어냈다.
“제길, 빌어먹을 하늘 같으니. 겨우 재앙을 물리쳤더니 며칠도 못 참고 또 다른 재난을 내려 보내나 그래.”
차마 명을 내주고 자신과 더불어 비처로 들어가자는 말을 하지 못하는 노미현에게 진천이 엉뚱한 질문을 했다.
“혹시 전날 곽건에게 뽑혔다는 명의 손뼈를 보관하고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