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59
제258화
좌우로 길게 뻗은 정맹의 성벽이 시야에 들어오자 남천도왕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제 잠시 후면 모든 후환을 없애고 그는 명실상부한 절대지존의 권좌에 오를 것이었다. 목표는 반인반괴임이 분명한 소신녀(小神女)였다.
작년 가을 그 소경 계집이 신황과 함께 사벌에 침입했을 때, 그리고 개산철권과 평수를 이루는 충격적인 무위를 선보였을 때, 남천도왕은 헤어날 길 없는 절망에 빠져들었다. 미래는 암담함 그 자체였다. 신황도 버겁거늘 소신녀라는 어린 괴물의 성장을 어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남천도왕은 반평생에 걸친 자신의 불운을 한탄했다. 사십대 초반에 사벌의 주인이 되고 오십대에 절대지경에 들어서는 기염을 토했지만 세상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와 비등한 무력을 지닌 무존(武尊)들이 하나나 둘도 아니고 일곱이나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울화통이 치미는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구(舊) 사왕이 패권에 관심이 없는 자들이라는 점은 천만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사파 무림의 맹주 자리를 차지하고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터였다.
그 알량한 지위와 권세조차도 이제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신황이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오는 날 그의 영화도 종말을 고할 게 틀림없었다. 남천도왕은 십 년이라는 기간을 안전한 도피처의 마련에 쓰기로 했다.
그러다 망외의 횡재를 만났다. 독후에게 떠넘기긴 했으나 솔직히 별반 기대를 하지 않았던 손자가 상상초월의 강자가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남천도왕은 희열감에 가슴이 터질 듯했다. 평생의 숙원이었던 무림지존으로서의 삶이 실현될 참이었다. 넉넉잡아 삼십 년 동안 대륙을 다스리고 난 후 기특한 손자에게 세상을 물려줄 참이었다. 그리 되면 천하는 향후 백년 간 곽가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한껏 부풀었던 꿈은 단 며칠 만에 박살나 버렸다. 정맹에서 월교와 고암 설가의 떨거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손자에게 치욕적인 망신을 당한 남천도왕은 치를 떨었다. 아무리 인륜을 헌신짝 취급한다는 사파의 종자라지만 물심양면으로 저를 키워준 할아비에게 어찌 그런 행패를 부릴 수 있단 말인가.
손자에 대한 분노로 남천도왕은 신황이 그를 혼내주기를 바랄 지경이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곤란했다. 손자야 비위만 맞춰주면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터이지만 신황은 그러리란 보장이 없었다. 가장 바람직한 결과는 손자와 신마가 양패구상, 아니 동귀어진 하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믿기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다. 손자의 목이 신황에게 잘리고 신황의 좌수와 복부가 터져나가자 남천도왕은 정맹의 적들처럼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오랫동안 그의 편이 아니었던 하늘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결말을 선사한 것이었다.
손자는 죽었다. 신황도 회생불능의 중상을 입었다. 그도 죽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테지만 단전이 깨진 게 확실하니 죽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남천도왕은 전율했다. 운은 돌고 돌아 마침내 그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었다. 팔대무왕 중 건재한 이는 그와 독후뿐이었다. 독후는 세상사에 관심이 없는 여자이니 그의 중원정복을 가로막을 자는 전무했다. 신경 쓰이는 건 소신녀가 유일했다.
소신녀의 정체가 반인반괴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설명 가능했다. 나이에 맞지 않는 납득불가의 무위. 호신강기를 두르지 않았음에도 청해검군과 나찰검봉의 검강들을 견뎌냈던 갑피. 손자의 신무에 녹지 않았던 뼈.
남천도왕은 만약 소신녀의 안구가 멀쩡했다면 필히 적안(赤眼)이었으리라 확신했다. 사벌에 돌아온 후 자료를 면밀히 조사한 남천도왕은 반인반괴가 그렇게 두려운 존재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자연적인 상태에서라면 반인반괴는 기껏해야 초절정의 극상이나 절대지경 초입의 무력을 가진다고 했다. 무신으로 추앙받는 천무대제는 오백 년에 하나 꼴로 나온다는 반인반괴에서도 별종이었던 셈이었다.
한시름 놓았지만 남천도왕은 스스로에게 방심을 허락하지 않았다. 타고난 신력에 권황의 권공이 합쳐지면 소신녀는 몇 년 후엔 무시 못 할 강자로 발돋움할 지도 몰랐다. 더 크기 전에 싹을 밟아놓는 게 상책이었다.
손자가 부러뜨린 손가락이 채 아물기도 전에 눈엣가시 같았던 검후를 처치하고 곧바로 북상한 것은 단 김에 쇠뿔을 빼겠다는 작심의 발로였다. 더 미룰 까닭이 없었다. 월교를 멸했으니 정맹만 접수하면 그는 무림일통의 대업을 이루게 될 참이었다.
수천 리에 걸친 강행군으로 탈진지경에 이른 수하들을 독려하며 거대한 남문을 들어선 남천도왕은 백만 평에 달하는 정맹 내부가 텅 비어 있음을 직감했다.
예상했던 바였다. 진즉 그의 동선(動線)이 알려졌을 테니 정파 무림의 겁쟁이들이 터전을 버리고 불빛에 놀란 바퀴벌레들 마냥 달아난 것도 당연지사였다. 소신녀도 필경 도망쳤으리라.
상관없었다. 그녀를 비롯한 세평회의 쥐새끼들을 쥐구멍에서 끄집어내는 방법을 손자가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기실 손자가 그에게 그러한 수법을 배웠다고 봐야 할 터였다. 누가 먼저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단순한 수단이 여지없이 통할 거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일신의 백성을 볼모로 잡고 협박하면 소신녀는 반드시 쥐구멍에서 튀어나올 것이었다.
삼십칠 인의 소수정예를 이끌고 인적 없는 정맹의 전각들 사이를 질주하던 남천도왕이 백미를 씰룩였다.
멀리서 무기(武氣)로 짐작되는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올라왔다. 잠시 멈춰 선 남천도왕은 기감을 끌어올렸다. 거리가 상당했지만 다수의 절정 무인들이 뿜어내는 기운임을 감지한 남천도왕은 당혹스러웠다. 설마 정파 무림의 늙은 생강들이 옥쇄를 각오했단 말인가. 아니면 이레 전 손자에게 그랬던 것처럼 세 불리를 인정하고 굴종을 택하려는 건가.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항복을 거부하다 말살의 참화를 입은 월교의 소식이 전해졌을 터이니 정파의 기회주의자들은 겁에 질려있을 터였다.
무기가 올라오는 곳으로 향하던 남천도왕은 곧 익숙한 장소로 가고 있음을 알았다. 뾰족하게 솟아있는 기괴한 첨탑은 정맹의 명물 삼정탑이었다.
반각 후 광장에 들어선 남천도왕은 탑 전면에 운집한 이들의 면면을 확인하고는 위화감에 휩싸였다. 오대세가, 아니 사대세가의 능구렁이들이 몰려나온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전면에 덜 박힌 못처럼 홀로 튀어나온 인물의 출현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꿀꺽.
남천도왕은 침을 삼켰다. 내로라하는 의원들 전부가 회복은 고사하고 생사 여부도 불투명하다고 단언했다던 놈이 어떻게 저 자리에 나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놈 뒤편에는 달아났을 거라고 확신했던 어린 소경 계집까지 떡 하니 서 있었다.
예기치 않았던 목전의 광경에 남천도왕은 갈등했다.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고약한 함정일 것만 같았다. 척추가 깨지고 단전을 포함한 내장이 파열되어 거동조차 하지 못한다는 놈이 어떻게 제 발로 서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정맹의 간자들이 보고한 내용이 조작되었다는 반증이었다.
하지만 남천도왕은 발을 돌리지 못했다. 그날 제 눈으로 어린놈의 복부가 황소 발에 밟힌 개구리 배처럼 터져나가는 장면을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의 부상이라면 단전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권왕이 전날 벽력도문에서의 격전에서 입은 중상의 후유증으로 무공을 상실한 것처럼 애송이 역시 간신히 몸만 지탱할 수 있는 상태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다면 저 모습은 허장성세라고 보아야 했다.
꼼수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어설픈 수작이라고 판단을 내렸지만 남천도왕은 섣불리 진천이 선 곳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그의 뒤에서 사벌의 강호들이 웅성거렸다. 삐쩍 마르긴 했으나 정파 진영의 가운데에 선 청년은 틀림없이 신황 진천이었다. 신마와의 대결에서 당한 부상의 여파로 회생불능지경에 처했다고 알려진 그가 굳건히 서있는 모습은 사파 무림의 무호(武豪)들에게 공포심을 일으켰다. 동요하는 수하들을 진정시키려는 남천도왕의 귀에 진천의 음성이 와서 박혔다.
“거기서 뭐하는 거요? 대화를 나누기엔 너무 멀지 않소? 싸우기엔 더더욱 그렇고.”
남천도왕은 뱀눈을 찡그렸다. 진퇴를 결정해야 할 때였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제 자리에 서서 남천도왕이 진천의 말을 받았다.
“우리와 붙어보자는 게냐?”
남천도왕의 응수타진에 진천은 강수로 받아쳤다.
“남의 집에 예고도 없이 쳐들어 온 건 당신들 아니오? 설마 제 집을 놔두고 이곳에 무덤을 만들고 싶어 온 게요? 원한다면 원대로 해드리지.”
진천의 엄포에 남천도왕은 저도 모르게 불안해졌다. 정말 허장성세일까. 저 어린 괴물은 멀쩡한 게 아닐까. 자신이 던진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한 남천도왕을 진천이 압박했다.
“어떡할 거요? 덤빌 거요, 무릎을 꿇을 거요?”
사벌의 무인들에겐 진천이 제시한 두 가지 행동 외에 하나의 선택지가 남아있었다. 회군, 즉 도주였다. 남천도왕의 후방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날아들었다.
“오늘은 때가 아닌 것 같소, 벌주.”
“그냥 갑시다, 벌주.”
동일한 의미의 청을 내뱉은 이들은 사벌칠군(邪閥七君)에 속하는 경천귀수(驚天鬼手) 사중득과 금면수라(金面修羅) 조완이었다. 그들에 이어 역시 사벌칠군의 일인인 팔극부(八極斧) 도관일이 퇴각을 재촉했다.
“중의를 따릅시다, 벌주.”
남천도왕이 벌컥 분기를 터뜨렸다.
“닥쳐라! 못난 놈들. 그러고도 너희가 사벌의 중추라 할 수 있더냐?”
아무도 대놓고 반발하지는 못했지만 사벌 고수들은 ‘그럼 잘난 당신이 이 난국을 타개해 보구려.’라는 눈빛을 공유했다.
의도대로 적진에 자중지란을 일으킨 진천은 이르게 승부수를 던졌다. 한계였다. 더 시간을 끌었다간 그의 몸이 버티지 못하고 허물어질 것이었다.
“쓸데없는 요식행위는 집어치우고 바로 나하고 붙어봅시다. 어차피 우리 둘의 승부로써 승패가 판가름 날 게 아니오. 지는 사람은 목을 바치고 남은 이들은 승자에게 복종하는 걸로 합시다. 어떻소?”
남천도왕은 외통수에 몰렸음을 깨달았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만약 여기서 물러서면 그의 권위는 곤두박질 칠 게 뻔했다. 누가 그를 주군으로 받들겠는가. 더욱이 남천도왕은 아직도 진천이 십중팔구 허세를 부리고 있으리라 보았다. 이십여 장이나 떨어져 있었지만 그의 기감은 불안정한 진천의 호흡을 포착해냈다.
남천도왕은 결단을 내렸다. 일단 간이라도 보아야 했다. 만약 쓴맛이면 그때 가서 발을 빼도 늦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달아나도 애송이의 무력이 온전하다면 금세 따라잡힐 테니 결과는 매한가지일 터였다.
“오냐, 그렇게 소망이라면 네 목을 따 주마. 그런 연후 무림의 황제로 등극할 것이다.”
칼을 뽑은 남천도왕이 과감하게 신형을 날렸다.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진천도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걸음을 옮기는 그의 다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간파한 남천도왕은 쾌재를 불렀다. 역시 허장성세였음에 분명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남천도왕의 심중에 의문이 싹 텄다. 그렇다면 애송이는 자결을 하려는 속셈인가. 터무니없는 질문이었기에 남천도왕은 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천도왕과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어 오륙 장만 남았지만 진천은 멈춰 서지 않고 계속 전진했다. 의혹에 빠져있던 남천도왕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진천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양 진영에서도 술렁거림이 일었다.
태연한 신색을 한 진천이 불과 십여 보 앞까지 마치 산보하듯 태평스럽게 다가오자 남천도왕은 어쩔 수 없이 공격을 가했다. 전력을 다한 격격쇄로 찔러보고 통하지 않으면 미련 없이 도주할 참이었다.
심검(心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사파 무림 최강의 절기가 진천의 심장을 강타했다. 하지만 비명을 내지른 이는 진천이 아니라 남천도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