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6
제25화
직립으로 선 나무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병풍처럼 죽 늘어서 있었다.
진천은 몰랐지만 삼보장은 담이 없기로도 유명했다. 촘촘히 선 거목들과 그 사이를 메운 청죽들이 담장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대문으로 향하던 진천은 현판이 걸려 있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마차 두 대가 너끈히 통과할 만큼 커다란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일견에도 격조가 느껴지는 두 채의 와옥이 나타났다. 규모는 비슷했지만 전혀 다른 개성을 지닌 목조 건물들이었다.
경내를 둘러보며 대웅이 빈정거렸다.
“무사는 무슨. 빈집이구먼.”
대웅의 말처럼 인기척이 없었고 와옥으로부터 한 점의 불빛도 나오지 않았지만 진천은 누군가 최근까지 삼보장에 기거했음을 알았다. 육 개월 이상 방치되어 있었다고 보기엔 너무 깨끗했다.
노덕도 그 점을 헤아린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딸아이가 사람을 보낸 모양일세. 어쩌면 벌써 팔렸을지도 모르겠구먼.”
진천은 노덕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의 딸이 그가 죽었으리라고 간주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천은 노덕이 착각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민초라면 몰라도 ‘도화각’이라는 강대방파의 안주인이 되었다는 그녀가 노덕이 팔정포에서 ‘하남신룡’과 동행했다는 정보를 접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매우 낮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의 사실을 추론하지 못할 리 만무하지만 노덕은 유독 자신의 딸과 관련해서는 사고가 마비되는 듯했다.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해 불편한 진천과 달리 대웅은 태평스러웠다.
“어쨌거나 지금은 비어 있으니 들어가서 몸 좀 녹입시다. 푹 쉬면서 노인네는 돈을 벌 궁리를 하고 천이는 용호가 될 방도를 찾아보고 나는…….”
대웅이 말끝을 흐렸다. 그가 개인적인 목표를 아직 설정하지 못해서 그런 줄 알았던 노덕은 그를 따라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깜짝 놀랐다. 누군가 막 정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이목구비를 확인할 만큼 충분히 가깝지는 않았지만 노덕은 걸음걸이만으로도 단단한 체구를 가진 방문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두 달 전 창인에서 헤어졌던 고량이었다.
고량이 십 보 이내로 들어오자 삼 인의 반응이 비슷해졌다. 노덕은 불편한 관계인 고량과의 대면으로 인해, 대웅은 낯선 사내가 만만치 않은 강자임을 간파해서, 진천은 고량의 심각한 안면 때문에 표정이 굳었다.
“왔구나.”
고량의 인사는 짧았다. 딱딱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진천이 짐짓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누가 살고 있나 했더니 고 형이었구려.”
고량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얼마 전에 왔다.”
진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누가 화단이며 정원이며 저렇게 깔끔하게 돌보았단 말이오?”
노덕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있던 고량이 흘끔 그를 바라보았다.
“도화각의 잔챙이들 짓이다. 내가 쫓아 버렸다. 네가 이틀만 일찍 왔으면 그들과 마주쳤을 거다.”
노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진천은 밝은 낯빛을 유지했다.
“그렇구려. 아무튼 다시 만나서 반갑소. 그런데 재회하기로 한 날짜가 아직 나흘 남았는데 일찍 온 걸 보니 일이 잘 풀린…….”
고량이 진천의 말을 막았다.
“얘기 좀 하자.”
그의 목소리가 너무 무거워 진천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야 했다.
진천과 고량은 대화를 잇지 못했다. 가만히 있던 대웅이 느닷없이 분통을 터뜨렸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사람이 사람을 만났으면 소개부터 시켜 주는 게 기본적인 예의라는 걸 몰라? 내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야?”
진천이 성난 황소처럼 콧김까지 뿜어내는 대웅을 달랬다.
“미안하다, 대웅. 그러잖아도 그러려던 참이었다.”
대웅이 그의 팔을 붙드는 진천의 손을 뿌리쳤다.
“이거 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가 주안의 금강권이야? 별호가 너무 거창하군. 금강은커녕 돌주먹도 안 돼 보이는데.”
대웅의 도발에 고량의 안광이 사나워졌다. 대웅이 이죽거렸다.
“뭘 째려봐? 한 대 칠 기세네? 어디 한번 해 봐. 이 몽둥이로 그 알량한 주먹을 뭉개 줄 테니.”
진천이 대웅과 고량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쯤 해라, 대웅. 일단 주먹을 섞게 되면 고 형은 물러서지 않을 거고 나도 말리지 않을 거다.”
놀랍게도 맹렬한 기운을 분출하던 대웅이 갑자기 수그러들었다.
“누가 싸운대?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네가 내 입장이라도 섭섭하지 않겠냐? 무시당하는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아?”
진천이 대웅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대웅.”
고량에게 고개를 돌리며 진천이 대웅을 소개했다.
“이 친구는 대웅이오, 고 형.”
대웅의 태세변환에 황당해하던 고량이 고리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무뚝뚝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고량이다.”
기가 눌린 듯 대웅이 고량의 시선을 회피했다.
“먼저 들어가 계십시오, 대인. 저는 고 형과 얘기를 나누고 들겠습니다.”
“알았네.”
노덕이 불쌍하리만치 풀이 죽은 대웅을 데리고 좌측의 와옥으로 향했다. 잠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고량이 등을 돌렸다. 진천은 고량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고량은 노덕이 든 와옥 건너편의 건물로 들어서지 않고 삼보장 후원으로 진천을 이끌었다.
천 년을 살았다고 해도 믿을 노송이 맑은 달빛을 듬뿍 받으며 신령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고량이 의자 대용으로 갖다 놓은 길쭉한 바위에 걸터앉자 진천도 엉덩이를 걸쳤다.
“자질구레한 장신구들만 있을 뿐 보물은 없었다.”
고량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진천은 바늘로 찔린 것처럼 움찔했다.
“두 곳 다 말이오?”
“그렇다.”
“그럴 수가.”
진천의 놀람이 연기가 아님을 감지한 고량은 원망의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는 대신 땅바닥을 꺼뜨릴 만큼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몰랐소. 이 사부가 거짓말을 했을 줄이야. 미안하오, 고 형.”
진천을 비난할 수도 없거니와 비난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기에 고량은 준비해 두었던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귀도마의가 훔친 물건을 은닉한 다른 장소는 없나?”
그제야 진천은 고량이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린 까닭을 알았다.
“유감이지만 없소. 혹시 있다손 쳐도 나는 듣지 못했소.”
실오라기 같은 희망이 사라진 고량의 안면이 암담함으로 물들었다.
고량이 일어서자 진천도 바위에서 엉덩이를 뗐다.
“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겠지만 왜 황금 일백 관이 필요한 거요, 고 형? 사정을 알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예컨대 염방의 무리를 풀어 주는 대가로 그만큼의 금을 요구할 수도 있을 거고. 그들에 대해서는 이미 판결을 내렸을 테니 돌이키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내가 애를 쓰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거요.”
고량이 고개를 돌려 진천을 빤히 쳐다보았다. 진천은 그의 눈빛에 담긴 의미가 절망임을 알아보았다.
“늦었다. 이월 말까지는 마련해야 하는데 사흘밖에 남지 않았으니. 창인까지는 직선거리로만 육천 리가 넘는다. 새를 타고 날아간들 도저히 기한에 맞출 수 없다.”
진천이 대안을 제시했다.
“방금 전 만난 그 친구는 유력한 집안의 자제요. 그에게 필요한 금을 빌려…….”
고량의 큼직한 손이 양어깨를 잡고 흔드는 통에 진천은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정말인가?”
고량의 다급한 행동과 음성에 진천이 쓰게 웃었다.
“그렇소.”
“유력한 집안이라면 어디를 말하는 건가?”
“본인이 출신 내력을 밝히는 걸 꺼리는지라 정확하지는 않소만 사파칠문 중 하나인 것 같소.”
사파칠문이란 말에 흠칫했지만 주어진 밥이 찬지 더운지를 가릴 계제가 아닌지라 고량이 진천에게 매달렸다.
“그를 설득해다오. 부탁하마. 반드시 갚겠다.”
“일단 사정을 들어 봅시다. 재물에 욕심이 없는 고 형이 왜 일백 관의 황금을 필요로 하는지.”
고량은 망설였다. 그러나 바라는 바를 얻으려면 진천의 협조가 절대적이라 판단했는지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 여인의 목숨값이다.”
고량의 사연이 이어지는 동안 진천의 처진 눈이 점점 관자놀이 쪽으로 올라갔다.
* * *
협상은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대웅이 대뜸 거부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었다.
“싫어. 아니, 안 돼.”
당장이라도 대웅의 뾰족한 턱을 후려치고 싶었으나 고량은 이를 악다물며 참았다. 칼자루를 쥔 쪽은 그가 아니라 대웅이었다.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해 봐. 너나 노인네나 눈치챘겠지만 나는 어머님께 서찰 한 장 달랑 써 놓고는 집에서 뛰쳐나온 신세야. 게다가 그 편지에다 강호에 위대한 무명(武名)을 드날리기 전에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 그런데 한 달도 안 돼 도로 기어들어 가서는 긴히 쓸 곳이 있으니 황금을 내놓으라고 빌라고? 그것도 한두 푼도 아니고 일백 관이나? 누굴 바보로 만들 일 있어? 주둥이가 달린 놈들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신나게 입방아들을 찧어 댈 텐데. 가뜩이나 집에서는 나를 겁쟁, 아니 그러니까 순유한 기품을 지녔다고 약간 우려하는데 내가 나가서 금이나 뜯기고 다닌다고 여기면, 뭐 그럴 게 빤하지만, 암튼 그러면 내 꼴이 뭐가 되겠냐고? 안 돼. 절대로 못 해.”
노덕이 대웅을 구슬렸다.
“그러지 말고 방법을 모색해 봄세. 자네의 체면도 깎이지 않고 금도 얻을 적당한…….”
대웅이 노덕의 말을 잘랐다.
“안 된다니까 그러네, 노인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안 돼. 해가 서쪽에서 뜬대도 안 돼. 동서남북이 뒤죽박죽 섞여 세상이 개판이 된대도 안 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러니 더 이상 군소리하지 마쇼들.”
대웅이 못을 박자 고량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말라깽이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애원할 것인지 아니면 화풀이를 할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고량을 바라본 진천이 재빨리 드잡이질 예방에 나섰다.
“잘 알겠다, 대웅. 하지만 그게 안 된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도움을 줬으면 하는데.”
주먹질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던 고량은 출수의 호흡을 뺏겨 진천에게 눈을 돌렸다. 대웅도 미심쩍은 눈초리로 진천을 주시했다.
“뭔 말이야? 어떤 식으로든 내 가문을 끌어들이는 건 안 돼.”
“네 가문과는 상관없다. 너만 힘을 보태면 된다.”
노덕이 관심을 보였다.
“무슨 복안이라도 있는가?”
진천이 허언을 일삼는 성정이 아님을 알기에 고량도 상기되었다. 대웅 역시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모이자 진천이 입술을 오므렸다. 그러고는 노덕의 질문에 대답을 주는 대신 대웅에게 물었다.
“백도방(百賭幇)의 전력에 대해서 아나, 대웅?”
대웅은 포성에서 주안으로 오는 보름 내내 무림의 문파와 인물들에 관한 자신의 지식을 자랑했다. 진천과 노덕은 그가 ‘가출’을 감행하기 전에 강호에서 그에게 위협이 될지도 모를 이들을 구별하기 위해 방대한 정보를 샅샅이 훑었으리라 짐작했다.
“백도방? 당연히 알지. 나름 강대한 세력이지. 방도가 육백에 달하는 데다 일류 무사가 오십여 명에 별호를 얻은 강자도 넷이나 보유했으니. 초검(草劍) 양준(梁俊), 삼안호리(三眼狐狸) 장관(張冠), 칠병귀(七兵鬼) 조요상(趙堯常), 광객(狂客) 이주한(李柱翰)은 모두 절정 초입의 고수로 알려져 있어. 방주인 일수천비(一手千匕) 오재현(吳宰鉉)은 초절정의 경계에 들었을지도 몰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랴? 우선 일수천비부터. 암기공의 대가인 데다 잔혹한 손속으로 악명 높은 노물이지. 강기를 구사한다는 설도 파다한데 확실치는 않아. 봤을 법한 이들은 생사투를 벌이다 다 뒈졌으니까. 내 의견을 묻는다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잠깐, 너 미쳤냐?”
말을 하다 말고 대웅이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부릅떴다.
“설마 백도방을 치자는 거냐? 네가 일당백의 절대 고수라도 돼?”
진천은 그저 빙긋 웃었다.
불현듯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노덕이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