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60
제259화
진천은 일수의 공방에 사활을 걸었다.
남천도왕의 선공을 유도한 후 단 한 번의 반격으로 승부를 매조지할 작정이었다. 곽건과의 대결 때와 마찬가지로 승산이 희박한 싸움이었다. 아무리 정묘한 작전을 짜더라도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될 터였다.
첫 번째 관건은 남천도왕의 이삼 장 이내에 접근할 수 있을지 여부였다. 그 이상의 거리를 둔 채 전투가 벌어지면 필패였다. 현재의 그는 고량만큼의 속도도 낼 수 없었다.
다음으로 중요한 점은 남천도왕이 어떤 수법으로 어디를 노리느냐를 정확히 예측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첫 번째 과제보다는 쉬웠다. 남천도왕은 필히 초장부터 그의 최후 절초인 격격쇄를 꺼내들 것이었다. 그게 통하면 밀어붙이고 그렇지 않으면 등을 돌려 달아날 가능성이 십 할에 가까웠다.
문제는 그가 염두에 둔 타격점이었다. 머리, 목, 심장 가운데 어디일까. 진천은 남천도왕을 상대로 치렀던 세 차례의 실전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심장일 거라 예측했다. 확신하긴 어려웠지만 도박은 불가피했다. 지금의 무영으로는 세 곳의 급소를 한꺼번에 지킬 여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고비는 반격이었다.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설사 두 번의 난관을 돌파하더라도 일초에 남천도왕을 무력화시키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종말을 고해야 할 터였다. 진천이 준비한 비수는 명의 손뼈였다. 좌수와 공력을 상실했기에 절멸도를 부리는 건 불가능했다. 일격에 남천도왕을 절명시키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다.
진천은 남천도왕의 눈을 찌름으로써 그를 전투불능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가 격격쇄에 십이 성의 공력을 실으면 찰나지간 호신강기가 엷어질 것이었다. 그 틈을 파고들어야 했다. 마침 곽건의 신무에 녹은 명의 손가락뼈들은 절묘하게 달라붙어 쌍두창(雙頭槍) 같은 형태로 변해 있었다. 간격도 알맞았다. 제대로 찔러 넣기만 하면 남천도왕의 안구를 터뜨릴 수 있을 터였다.
남천도왕이 광장에 등장한 이후 줄곧 전신을 옥죄는 긴장감에 시달렸지만 진천은 어느 한 순간도 평정을 잃지 않았다. 그의 팔꿈치에 박아두었던 명의 손뼈가 뭉근한 타격감을 전해주자 진천은 난제를 해결했음을 알았다. 이제 상황은 그가 예상한 대로 전개될 것이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지만 양편의 무호들은 순식간에 끝난 기이한 접전의 승자와 패자는 확실히 구별해냈다. 승자는 당연히 신황이었다. 안면에서 피분수를 뿜으며 허공으로 솟구친 남천도왕이 불문곡직 달아나자 정파 진영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수장의 어이없는 패퇴와 도주에 미리 대비하고 있던 사파의 거두들도 지체 없이 몸들을 돌려 달아났다. 환호성을 내질렀던 정심원의 원로들이 즉시 추격을 개시했다.
양안을 잃고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남천도왕을 쫓는 이들도 있었다. 명과 여상구였다.
진천은 명이 능히 남천도왕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지난 넉 달여 간 권왕을 스승으로 삼아 불철주야 권공 수련에 매진했던 명은 절대지경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아직 남천도왕의 무위에는 크게 못 미쳤지만 머릿속이 하얘졌을 노물을 처치하기엔 충분한 수준이었다. 공히 앞을 보지 못하지만 그런 상태에 익숙한 명과 눈만이 아니라 평정심도 잃었을 남천도왕의 격돌은 승패가 정해져있는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천도왕이 자랑하는 벽력도문의 삼대절기가 명에겐 상성이 좋다는 점도 진천이 명의 승리를 낙관하는 요인이었다. 파도천망과 십전섬뢰, 그리고 격격쇄는 도법이면서도 검공처럼 베기보다는 찌르기에 주력하는 절초였다. 신체가 절단되지만 않는다면 명은 동체에 심한 부상을 입더라도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명에게 후사를 맡긴 진천은 사파 무인들을 뒤쫓지 않고 그를 돌보러 달려온 소중걸에게 몸을 기댔다. 진천을 안아든 소중걸이 어느 새 텅 빈 광장을 박차고 뛰어올라 선휴각 방면으로 신형을 날렸다.
온 대륙이 격동했다.
천마의 재림으로 불린 신마가 일으킨 혈겁으로 신음하던 중원의 만백성들은 폐관수련을 중단하고 세상을 구하러 달려온 신황이 이룬 위업에 열광했다.
신황의 구원이 늦었던 까닭은 그가 폐관수련에 들었던 장소가 중원에서 일만 리나 떨어진 남해의 고도(孤島)였기 때문이라 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신마는 십일천하(十日天下)조차 누리지 못했을 터였다. 정확히는 십삼일이었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신마와 그의 졸자들이 저지른 학살극에 희생당한 이들의 수는 물경 일백 만에 달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정맹의 영토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여 정맹 무인들의 무자비한 보복전은 필연지사였다. 신마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때 백성을 팽개치고 잠적했던 정파 명가들의 뒤늦은 발호를 비난하는 여론이 비등했으나, 대세는 그들의 편이었다.
삼대마군이 신마에게 횡액을 당했던 마련은 물론이고 사벌도 그들의 적수가 아니었다. 월교 침공에서 청해검군과 나찰검봉이 전사한데 이어 정맹에서의 도주전에서도 팔극부와 경천수라가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금면수라와 나찰검봉 역시 회복불능의 중상을 입었다고 했다.
정파의 고수들은 중원 전역을 무풍지대처럼 누비며 마인들과 사파의 악종들을 처단했다. 신마 와 남천도왕 사후의 대혼란 속에서 세평회 협사들의 활약은 특히 두드러졌다. 중립지대를 넘어 마련과 사벌의 영역까지 진출한 태극선군 여상구와 자하검선 팽하연 등은 사마의 패잔병들에겐 저승사자로 통했다.
친인들이 악인들의 사냥에 여념이 없는 동안 진천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명과 함께 남하하고 있었다.
진천이 명에게 지시했다.
“왼쪽에 협곡이 있소, 명. 그리로 갑시다.”
명은 진천의 지시에 따라 방향을 바꿨다. 얼마간 달리던 명이 중얼거렸다.
진천은 쓰게 웃었다. 명이 말하는 ‘무서운 사람’, 즉 검왕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기억하고 있구려. 맞소. 저 골짜기는 호야곡이오. 하지만 검왕 어르신은 계시지 않을 거요.”
“그냥 가는 길에 한 번 들러보고 싶었소.”
기실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진천은 말을 아꼈고 명도 더 캐묻지 않았다. 잠자코 달리던 명이 불쑥 말했다.
오늘만 벌써 여섯 번째 듣는 말이었다. 지난 열흘 동안 못 해도 일백 번은 들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진천은 싫증을 내지 않고 응답했다.
“나도 명을 다시 보아서 정말 좋소.”
명은 싱글벙글했다. 처음 보았을 때 그녀의 얼굴을 가득 메우고 있던 찌푸린 표정은 더 이상 보기 어려웠다.
“배는 좀 어떻소?”
명이 모처럼 안구가 없는 눈을 찡그렸다.
“그래도 나아졌다니 다행이구려.”
열흘 전 여상구와 더불어 남천도왕을 추격했던 명은 해질녘에 그의 수급을 들고 정맹으로 돌아왔다. 싸움에 끼어들 수가 없어 관전자 노릇을 해야 했던 여상구에 따르면 엄청난 혈전이었다고 했다.
남천도왕이 발한 파도천망의 일부를 복부에 허용한 명은 하마터면 몸이 두 동강 날 뻔했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곽건의 신무도 녹이지 못한 뼈(척추)가 온전히 붙어있던 덕분에 허리가 양단되는 참사를 모면했다. 남천도왕의 마지막 발악에 치명상을 입었지만 명은 그의 명줄을 끊는데 성공했다. 그녀의 주먹에 머리통이 박살난 남천도왕은 그 자리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태극선으로 남천도왕의 목을 자른 여상구는 삼분지일만 남은 그의 두부를 챙겨 와서는 진천에게 보여주었다.
그 일전의 여파로 오른쪽 옆구리가 뭉텅 뜯겨나간 명은 이틀 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새살이 돋았지만 워낙 중상을 입었던 탓에 통증은 여전했다. 하지만 절대고수였던 남천도왕을 처치한 대가로 그 정도의 후유증은 감내할 만한 것이었다.
호야곡이 가까워졌지만 명에게서 아무런 경계의 소리가 나오지 않자 진천은 의아했다. 잘못 짚었단 말인가.
그러나 호야곡을 코앞에 두었을 때 명이 속삭이듯 말했다.
“괜찮을 테니 그냥 들어갑시다, 명.”
속도를 줄였던 명이 다시 빛살로 화했다. 촌각 후 호야곡의 평지에 이르자 오른쪽 모통이에 희뿌연 인영이 보였다. 명에게서 떨어진 진천이 바닥에 좌정하고 있는 그림자에게로 걸어갔다.
인영은 흉측한 몰골의 노파였다. 푸석푸석한 회색 머리카락 아래 드러난 얼굴은 참혹했다. 짓무른 살이 고름과 함께 흘려내려 이목구비를 분간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유독 하얗게 빛나는 치아가 기괴했다.
진천은 착잡했다. 원래의 용모는 온 데 간 데 없으나 목전의 노파는 필히 독후일 터였다.
불청객의 도래를 인지했는지 노파가 물었다.
“누구냐?”
심하게 갈라져서 듣기 거북한 음성이었다. 진천은 공손히 대답했다.
“진천입니다, 어르신.”
한 동안 말이 없던 독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긴 웬일이냐?”
“친우를 보러 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내가 여기 있을 줄 알고 있었더냐?”
“…….”
“내 꼴을 보니 통쾌하더냐?”
“아닙니다.”
“나를 원망할 테지? 악마를 데려왔다고.”
“…….”
꼭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부정하기도 어려운지라 진천은 침묵했다. 독후의 갈라진 목소리에 날이 섰다.
“잘난 척하지 마라. 네 상대가 그 미련한 아이가 아니라 그이였으면 결과가 달라졌을 지도 모르니까.”
진천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황은 어떻게 된 겁니까?”
“진광의 말로는 모르는 게 없다면서? 어디 맞춰 보거라. 그이가 어떻게 됐을지.”
독후의 시험에 응하지 않으려던 진천은 마음을 바꿔 추론을 들려주었다.
“전날 제 의형이신 권황 어르신에게 반나절만 일찍 왔으면 무황을 볼 수 있었을 거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로 유추해보건대 무황은 곽건과 몸을 나눠 쓰고 있던 게 아니었습니까? 예컨대 해가 뜬 동안에는 곽건이, 밤에는 무황이 육신의 주인이 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다 점차 곽건의 지배력이 강화되었을 성 싶습니다. 원주에서의 첫 번째 살겁 이후 시일이 지남에 따라 신마가 벌인 광란의 시간이 일몰을 기준으로 차츰 늘어난 것이 그 증거입니다.”
독후가 입술이 남아있지 않은 입을 벌림으로써 놀람을 표현했다. 소름끼치도록 예리한 추측이었다.
“과연 대단하구나. 진광이 입이 마르게 칭찬할 만 해. 네 말대로다. 그이는 네가 오기 전날엔 겨우 반시진만 깨어있었다. 아마 그 아이가 그날 너를 꺾고 또 한 번의 학살극을 일으켰다면 그이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살겁을 저지를 때마다 그 아이가 악마를 차지하는 시간이 늘어났으니까.”
“…….”
“믿지 않겠지만 그날 나는 너를 응원했다. 나는 무서웠다. 전능하다고 믿었던 그이가 무기력하게 그 아이에게 밀려난 것도 무서웠고 그 아이가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무적의 악마가 될까 봐 무서웠다.
나는 진심으로 네가 이기기를 바랐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너마저 그 아이에게 꺾이면 나는 약속에 따라 몸을 내주어야 했다. 물론 그런 치욕을 당하기 전에 자진할 작정이었지만. 솔직히 네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무리 하늘이 내린 기재라지만 어떻게 천마의 권능을 지닌 괴물을 대적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그날 네가 일으킨 기적을 보고는 심장이 터질 듯 놀랐다. 나도 모르게 손뼉까지 쳤더랬다. 절대천룡이라더니 너야말로 진정한 인중룡(人中龍)인 게야.”
뜻밖의 찬사에 진천은 머쓱해졌다.
“아쉽구나. 그이가 가기 전에 너를 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분명히 너를 마음에 들어 했을 게다.”
무황과 어떤 연도 맺지 못해서 진천도 유감이었다.
“무황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진천의 질문에 독후가 갑자기 깔깔 웃었다. 그러더니 진천이 전혀 예상치 않았던 답을 토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