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7
제26화
노덕이 짐작을 입 밖으로 꺼냈다.
“자네 혹시 소인결(少人結)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진천은 바로 시인했다.
“그렇습니다, 대인.”
방 안에 일순 정적이 깔렸다.
소인결은 무림 특유의 분쟁 해결 방식이었다.
먼 옛날 군문이 득세하던 시절은 각국이 거느린 병사의 수가 전력의 팔구 할을 차지했다. 그러나 범인의 한계를 뛰어넘은 자들, 즉 무인들이 출현한 이후엔 양보다는 질이 우열을 결정했다. 내공을 지니고 절초를 구사하는 고수 셋이 기본적인 창술이나 익힌 일반 병졸 삼백을 압도했다.
황제나 왕들의 시대가 저물고 무인천하가 열린 것은 당연지사였다. 수십, 수백, 아니 수천의 호위를 둔들 암살의 의사를 가진 한두 명의 초인을 막을 방도가 없으니 권좌 또한 지킬 방도가 없었다. 오로지 기득권을 이용해 발 빠르게 무벌(武閥)로의 변화를 꾀한 일부 왕족과 세가들만이 생존에 성공했다. 그렇더라도 대륙 통치의 주도권이 완전히 신흥 세력들에게 넘어간 것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었다.
무림이 형성된 이후 과거와는 다른 관행들이 생겨났는데 그중 하나가 소인결이었다. 무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하나 전쟁의 양상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병졸이 무사로 대체되었을 뿐이었다. 결국 더 많은 고수를 확보한 진영이 우위에 설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렇다 보니 거대 세력들이 충돌할 때마다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자고 나면 패자가 바뀌는 초창기의 극심한 혼란에서 교훈을 얻은 무림은 특정한 지역을 두고 다투는 문파들 간의 대립에서는 소수의 정예들만 추려 승부를 결정하는 전통을 만들어 나갔다. 전면전으로 인한 공멸을 피하려는 고육지책이었다.
소인결은 무림 방파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수단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승복이나 외부 인사들의 관여 등 숱한 문제점들이 노정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 연유로 현재는 고대 왕국의 율령처럼 빛바랜 유물로 취급받고 있었다.
회의적인 표정들을 바라보며 진천이 발상의 계기를 밝혔다.
“실은 고 형의 사연을 듣자마자 소인결을 떠올렸습니다. 그 유명한 천무대제(天武大帝) 이강(李剛)이 젊은 시절 오인결에 연루되었을 때의 상황과 너무나 흡사해서요. 아무튼 소인결의 최소 인원은 다섯 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도해 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삼 승만 하면 되니까.”
승부를 가리기 위해서는 홀수의 대전이 필수적이었다. 구인결(九人結)이 보편적이었지만 대결 주체의 협의에 따라 칠인결이나 오인결도 행해졌다. 운이 작용할 수도 있는 삼인결은 원칙적으로 배제되었다.
대웅이 진천의 제안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보아하니 나를 끌어들일 모양인데 어림없는 소리. 내가 왜 생면부지의 여인을 위해 나서야 하냐? 게다가 백도방이 뭐가 아쉬워서 소인결을 받아들이겠냐? 애초에 성사될 리가 없는 발상이야.”
진천이 대웅을 직시했다. 대웅이 움찔거렸다.
“며칠 전 양자호반을 지날 때 괜한 시비를 거는 불한당들을 혼내 줬지, 대웅?”
“그게 이것과 무슨 상관인데?”
“그때 네가 추위에 떠는 여인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모습을 보고 인성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너에 대한 호감이 커졌다.”
“어, 그랬어?”
“백도방은 단지 무례했을 뿐인 그날의 파락호들하고는 달리 권세를 앞세워 무도한 짓거리를 일삼는 무리다. 네가 협의(俠義)를 일으키지 않을 까닭이 없지 않나?”
“그렇지만…….”
“너는 이름을 떨치고 싶다고 했지, 대웅? 오대세가도 경시하지 못한다는 백도방이라면 강호에 네 출발을 알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대상이 아니냐?”
“그렇긴 한데…….”
“일 승만 거두면 된다, 대웅. 너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나는 애초에 오인결을 생각하지도 않았을 거다. 네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진천이 몰아붙이자 궁지에 몰린 듯 쩔쩔매던 대웅이 돌연 울상을 지었다.
“나는 못 해, 진천. 나는, 나는 사람들 앞에서 싸우면…….”
“안다, 대웅. 내가 도와주마. 어차피 너는 그 약점을 고치지 않는 한 무림에서 살아갈 수 없다. 이번이 절호의 기회다. 내가 도와주마. 반드시 극복할 수 있을 거다.”
진천이 손을 뻗어 겨울나무처럼 앙상한 대웅의 팔뚝을 잡았다. 망설이던 대웅이 진천의 팔을 맞잡으며 울먹거렸다.
“정말 나를 도와줄 거지?”
대웅을 잡아당기며 진천이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물론이다, 대웅. 우리는 친구 아니냐. 너를 위한 비책을 이미 생각해 두었다.”
못 미더운 눈으로 대웅을 쏘아보던 고량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방금 그가 지적한 문제 말인데.”
진천이 껴안다시피 달라붙은 대웅을 떼어 내고 고량에게 고개를 돌렸다.
“백도방과의 협상은 고 형의 몫이오.”
고량이 오른쪽 눈썹을 이마로 치켜올렸다.
“솔직히 그들이 소인결을 수용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도록 만들어야지요.”
“어떻게?”
“조건을 걸면 됩니다.”
“무슨 조건?”
“우리가 이기면 그녀를 내주고 우리가 지면 고 형을 평생 종으로 부릴 수 있는 조건이오. 그들의 저울은 후자 쪽으로 기울 거요.”
고량이 침묵으로 보다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만약 고 형이 이달 말까지 황금을 주지 못하면 그들은 체면 때문에라도 그녀를 죽일 공산이 크오. 하지만 자기들에겐 아무 이득도 없을뿐더러 금강권이라는 강자를 원수로 만드는 셈이니 그들로서도 그녀의 처형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소. 반면 만약 오인결에서 이기면 고 형을 거둘 수 있으니 분명 욕심을 낼 거요.”
노덕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들은 말로 하는 복종의 맹세를 믿으려 하지 않을 텐데. 필시 내 의질에게 독단을 복용시키고 정기적으로 해약을 주는 방식으로 통제하려 들 걸세.”
진천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때로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대인. 물론 결정권은 전적으로 고 형에게 있습니다.”
고량의 안광도 강렬해졌다.
“나는 죽을지언정 백도방의 개 노릇은 할 수 없다.”
“그러면…….”
“끝까지 들어라. 그럼에도 나는 네 제안을 따를 작정이다. 하지만 너는 우리에게 승산이 있다고 보는가?”
의식적으로 대웅에게 시선을 꽂으며 고량이 물었다. 진천은 애매하게 고개를 틀었다.
“대웅은 능히 일 승을 챙길 거요. 그보다 고 형은 어떻소? 아까 이 친구가 열거한 자들과 겨루어 이길 수 있겠소?”
“방주인 일수천비는 버겁다. 백도사흉(百賭四兇) 중 투귀는 나와 평수인 걸로 안다. 하지만 그와 붙는다면 어떻게든 꺾을 것이다. 삼안호리나 초검, 광객은 내 상대가 아니다.”
“잘됐군요. 쉽지는 않겠지만 해 봅시다.”
“백도방주가 직접 나설 수도 있다. 일수천비는 초절정의 초입에 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자다. 천하백대고수에 꼽힐 만큼 강자라는 뜻이다.”
“그는 내가 맡겠소.”
진천이 뿜어내는 기백이 좌중을 압도했다.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게 웅크리고 있던 대웅이 소심하게 끼어들었다.
“그런데 백도방이 진짜 오인결을 받을까?”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심산을 표정에 빤히 드러낸 대웅에게 고량이 도끼눈을 부라렸다. 진천이 움츠러든 대웅에게 격려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 그래도 그 얘기를 할 참이었는데 잘 꺼냈다, 대웅.”
진천이 고량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의심부터 할 거요. 아무리 그간 고 형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인 모습을 보였을지라도 누가 봐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는 격이니. 당연히 뒷조사를 할 테고 그러면 나의 존재를 파악해 낼 게 틀림없소. 그러고는 근간에 명성을 떨친 하남신룡을 방수로 얻은 고 형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드는 거라고 판단할 거요. 그런 의미에서 그들에게 미끼를 던져야 할 듯싶소.”
“어떤 미끼?”
“소인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들었소. 단순히 승수를 계산해 승패를 정하는 방식과 최후의 일인이 남을 때까지 진행하는 방식 말이오. 고 형은 두 번째 것으로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야 하오. 어느 쪽으로든 자신들이 우세하리라고 계산하겠지만 나의 무위를 정확히 모르니 첫 번째 방식으로 하자고 나올 가능성이 농후하오. 마지막까지 우기다가 그들이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고 최후통첩을 하면 못 이긴 척 받아들이면 되오.”
대웅이 슬며시 딴죽을 걸었다.
“만약 그놈들이 일수천비라는 막강한 패를 믿고 연승전을 하자고 나오면? 그럼 말짱 꽝이잖아.”
진천이 역정을 내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그것대로 받으면 된다.”
대웅이 방안의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근본적인 의구심을 토해 냈다.
“이 모든 논의는 네가 일수천비를 물리친다는 전제하에서만 성립된다는 걸 알지, 천? 그렇게 자신이 있냐?”
진천이 처진 눈꼬리를 위로 끌어 올렸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떠올린 방책이다, 대웅.”
어이가 없는지 커다란 눈을 끔벅거리던 대웅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첫 번째든 두 번째든 백도방이 아예 오인결의 제안 자체를 묵살하면 어쩔 건대? 그때는 백도방에 쳐들어가기라도 할 참이냐?”
“그래, 대웅.”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대답에 공기가 요동쳤다. 진천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달리 방법이 없다면 뇌옥에 침입해 그녀를 구출할밖에. 물론 그때는 고 형과 네가 밖에서 그들의 주의를 끌어 줘야 한다.”
질렸다는 표정의 대웅에게 진천이 못을 박았다.
“몰랐다면 모를까 고 형의 사정을 들었고, 또 돕기로 약조한 이상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참이다.”
고량이 벌떡 일어서더니 진천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고개까지 숙였다.
“고맙다. 일이 어떻게 되든 나는 이제부터 너를 은인으로 여기겠다.”
진천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대웅이 진천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내가 너를 잘못 봤구나, 진천.”
진천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뭘?”
“무공만 그럴듯할 뿐 머릿속은 어리바리한 오지 촌놈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능구렁이를 열 마리는 고아 먹은 너구리였어.”
대웅의 말은 노덕과 고량의 심사를 대변했다. 두 사람 모두 진천이 더 이상 순박하고 순진한 청년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노덕의 뇌리에 문득 조인상이 떠올랐다. 권모술수의 달인인 그와 가까웠으니 물들지 않았을까. 노덕의 직감이 옳았다.
“내 고향에 허 노야라고 세상사에 밝은 어른이 계신다, 대웅. 어렸을 때부터 그 어른께 이런저런 가르침을 받았다. 그 방면으로는 열을 배우면 하나를 깨우칠까 말까 한 둔재라 그 어른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밖에 나가면 악의를 가진 자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그럭저럭 내 한 몸은 간수할 수 있을 거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렇지만 능구렁이나 너구리는 네가 곰하고 어울리지 않는 것만큼이나 나하고는 맞지 않은 것 같은데.”
진천의 변에 대웅이 얄팍한 입술을 삐죽거렸다.
“흥, 잘난 척하긴. 나도 저마다 난다 긴다 하는 책사들에게서 온갖 병략들이며 술수들을 익혔다고. 누구처럼 뽐내고 싶지 않아서 무딘 척하는 것뿐이지.”
진천이 쾌활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래, 그래.”
진천에게서 조롱의 기미를 찾지 못한 대웅도 히죽 웃었다. 그런 대웅을 노려보던 고량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가슴 속에 담긴 의문을 뱉어 냈다.
“그런데 너는 백도방의 이리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가?”
대웅은 즉답을 못 하고 우물거렸다. 진천이 그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이 친구의 무위는 내가 보장하오, 고 형. 무력만 따지면 하남편봉보다…….”
진천은 말을 잇지 않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도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