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8
제27화
잠시 후 청력이 약한 노덕의 귀에도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네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그들이 와옥을 나오자마자 마차 한 대가 정문을 통과해 흙먼지를 일으키며 삼보장 안으로 들어섰다. 대저 심야의 방문객치고 선의를 품은 자들은 드문 법이지만 노덕의 낯빛은 옆에서 보기에 안쓰러우리만치 어두웠다. 마차에 탄 이가 누구인지 짐작했기 때문일 터였다.
화려함을 배제했음에도 고급스러운 품격이 배어 있는 대형 마차의 전후좌우에서 사 인의 여류무사(女流武士)가 표범처럼 날렵한 동작을 과시하며 뛰어내렸다. 그들 중 한 명이 문을 열자 남색 금의(錦衣)를 입은 묘령의 여인이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 주변이 환해졌다. 달빛이 그녀에게만 쏟아지는 듯했다.
꿀꺽.
대웅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진천의 고막을 두드렸다. 진천도 눈을 비빌 뻔했다. 마차에서 내린 여인은 그가 난생처음 보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이목구비가 너무 뚜렷해 마치 장인이 공들여 제작한 인형 같았다. 어느 한 부위도 나무랄 데 없었으나 그것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더욱 아름다웠다. 흔히들 절세미인의 조건으로 꼽는 세요설부(細腰雪膚)니 아미청대(蛾眉靑黛)니 주순호치(朱脣晧齒)니 하는 표현들이 더할 나위 없이 들어맞는 미모였다.
초면이었지만 진천은 경국지색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미태를 지닌 여인의 정체를 알고도 남았다. 삼보장주 노덕과 주안일미 전하연의 고명딸인 노미현(盧美賢)이 아니라면 누구이겠는가.
노미현이 천천히 노덕이 선 곳으로 걸어왔다. 사 인의 호위무사가 그림자처럼 그녀의 뒤를 따랐다. 노덕에게서 칠팔 보 떨어진 곳에 이르러 걸음을 멈춘 노미현이 그녀의 부친을 가만히 응시했다. 창에 찔린 사람처럼 노덕이 움찔거렸다.
노미현의 붉은 입술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역시, 살아 있었군요.”
왜 죽지 않았느냐고 힐난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현아.”
노덕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딸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신음성처럼 들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어요. 영영 떠난 줄 알았을 때는 뭔가 허전했거든요. 엄마의 한을 생각하면 그렇게 편안하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너무 착하게 굴었다고 스스로를 꾸짖기까지 했는데. 하지만 이렇게 다시 보니 화가 나는군요. 그냥 갔더라면 좋았을 것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미안하구나.”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받아 줄 수 없는 사과는 모욕일 뿐이에요.”
“…….”
“나는 아직 아버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해 두겠어요. 아버지는 이곳에 다시 발을 들여놓은 걸 후회하게 될 거예요.”
부녀의 대화를 들으며 진천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노미현의 냉혹한 언사가 못내 껄끄러웠지만 무작정 그녀를 비난하기는 어려웠다. 진천의 뇌리에 허 노야와 함께 들었던 노덕의 비사가 스치고 지나갔다.
* * *
―나는 의형의 죽음이 꼬이고 꼬인 인연의 종결이 아니라 진정한 비극의 시작이 될 것임을 꿈에서도 알지 못했소.
그가 상행 중 구원산맥에서 마주친 혈영장에게 변을 당했다는 비보가 전해졌을 때 나는 그를 사실상 자진하도록 만든 나의 졸렬하고 비겁한 처사를 자책하면서도 이제 모든 게 제자리를 잡을 거라 안도했소. 그가 없으니 그녀는 더 이상 내게 패악을 부리지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내 딸아이가 그런 손가락을 물려준 친부에 관해 고민할 이유가 사라졌다고 믿었기 때문이오. 하지만 오산이었소.
의형이 서벌의 마두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내가 알려 준 순간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고는 까무러쳤소. 내가 간과한 것은 그에 대한 그녀의 연정의 깊이였소. 어떤 의미로 그녀야말로 일편단심의 전형이었소.
실신한 그녀는 열병을 앓았고 혼미한 와중에도 끊임없이 의형의 이름을 들먹이며 횡설수설했소. 그러다 열흘 만에 정신을 차렸소. 하지만 평생 마음에 간직했던 정인을 상실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불수의 몸이 되고 말았소. 손도 발도 움직이지 못하고 오직 중얼거리는 것만 가능했소.
딸이 태어난 후 그녀에 대한 애정은 급격히 식었지만 나는 그녀를 극진히 돌보았소. 하녀들에게 맡기지 않고 매일 직접 그녀를 씻기고 먹였소. 딸아이가 자기가 하겠다며 간청해 그 일을 넘겨주기 전까지 팔 년 동안이나.
그녀는 말을 할 수 있었지만 나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소. 다만 정신이 돌아온 날 한 가지만 요구했을 뿐이오. 딸과 함께 자게 해 달라고. 나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었소. 어찌 거절할 수 있었겠소.
그러나 그 배려는 훗날 통한의 비수가 되어 내 심장을 도려냈다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욕을 먹더라도 그녀의 혀를 묶어 버렸을 거요.
그녀는 밤마다 딸아이에게 속삭였소. 조금씩, 조금씩, 아주 조금씩. 처음에는 그저 사랑한다고. 너를 세상에서 제일. 아니, 유일하게 사랑한다고. 거짓말이 아니었으니 딸아이는 그녀의 모정을 전적으로, 그리고 맹목적으로 믿었을 거요.
내 여식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어딘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건 그 아이가 초경을 했을 무렵이었소. 이제부터 제 어미를 돌보는 일은 자기가 할 테니 나는 사업에만 전념하라더군. 내키지 않았지만 딸아이가 하도 간절히 청하는 바람에 결국 그러라고 했소.
그 이후로 나는 그녀 곁에 가지 못했소. 내가 내원에 왔다는 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경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딸아이가 막더군. 그렇게 서서히 발길이 뜸해지다가 종내에는 아예 그녀의 방 근처엔 얼씬거리지도 않게 되었소. 그리고 오 년 후에야 그녀를 다시 보게 됐소. 나에게 벼락이 떨어진 날이었소.
* * *
일 년 전 실로 놀라운 소문이 연달아 주안을 강타했다.
첫 번째는 지난날 주안일미로 불렸던 모친을 훌쩍 능가하는 미모로 일찌감치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삼보장주의 장중보옥이 도화각주(桃花閣主) 여상구(呂尙究)와 혼약을 맺었다는 것이었다.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지만 그녀가 도화각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많은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들이 남녀지간의 연분을 나누고 있다고 증언했고 당사자들이 부인하지 않았기에 그 소문은 퍼지자마자 기정사실화되었다.
봉천(鳳川) 일대를 넘어 대륙 전역에 무명(武名)이 알려진 여상구와 주안이 배출한 최초의 천하제일미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모으고 있던 노미현의 결합은 만인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세인들이 관심을 가진 건 흔해 빠진 권력자와 미인의 연애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기에 그토록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중원 중북부에 일백 개의 특급 기루를 소유한 도화각의 주인인 여상구는 어릴 때부터 월궁항아들에게 둘러싸인 환경에서 자란 탓인지 절색의 미인들을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보듯 하는 성품으로 유명했다. 수십 명의 처첩을 거느릴 수 있음에도 그가 환갑이 넘도록 독신을 고수하는 까닭을 두고 갖가지 억측이 난무했다.
그중 유력하다고 인정받는 설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여상구가 동정이 깨지면 공력에 크나큰 손실을 입는 동자공(童子功)을 익혔을 거라는 추측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가 남색을 밝힌다는 주장이었다. 명백한 증거가 없었기에 둘 다 아닐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둘 모두일 가능성이 높다고 떠들어 댔다. 그런 여상구가 아무리 인세에 보기 드문 미녀라지만 상가(商家)의 어린 여인과 염문을 뿌렸으니 구설수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한편 노미현 쪽도 뜻밖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도화각주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났을 때 그녀는 고작 열일곱 살이었다. 아직 활짝 피지도 않았음에도 이미 수천 리 밖까지 미명(美名)을 알린 그녀가 어째서 반백 년 가까운 나이 차가 나는 여상구를 배필로 택했는지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백도방과 더불어 중립 지대 중북부를 장악한 강대 문파인 도화각의 주인이라면 그녀에게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자격을 갖추긴 했지만 그녀로서는 얼마든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오대세가의 젊은 영재들이 그녀를 보러 주안에 들락거리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그들 중 일부와 혼담이 오갈 거란 예상들이 지배적이었다. 도화각주가 강호에서 알아주는 강호라 하나 오대세가라는 막강한 배경을 지닌 신성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찬란한 미래가 보장된 샛별들을 두고 좀 과장을 보태자면 할아버지뻘인 여상구를 짝으로 골랐으니 그녀의 처사를 두고 세인들이 온갖 담화를 쏟아 내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노미현과 여상구가 배출한 이야깃거리가 주안을 화산재처럼 덮었다. 그러나 곧이어 불어닥친 추문의 폭풍이 단숨에 그들을 화제의 중심에서 날려 버렸다.
* * *
―그녀의 방에 모인 사람은 나를 포함해 모두 여섯 명이었소. 내 딸아이와 도화각주, 나와 친분이 두터운 주안표국의 지찬주(池贊柱), 경쟁 관계였던 북운상단(北雲商團)의 오재승(吳在承), 그리고 백도방의 총관 사구득(史求得)이었소.
딸아이의 부축을 받고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가 모두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며 운을 뗐소. 그녀가 입을 열기 전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지만 나로서는 막을 방도가 없었소.
그녀의 회상은 구구절절 길었지만 내용은 간단했소. 내가 원치 않는 그녀를 범해 아내로 삼았고 그 이후에도 잠자리를 거부하는 그녀를 수시로 폭행했다는 것이었소. 그녀의 표현을 빌자면 나는 간악스럽게도 배나 가슴 등 의복으로 가릴 수 있어 남들에게 들키지 않을 부위만 골라서 때렸다는구려.
그녀는 과거 사고로 발목과 왼팔이 부러진 적이 있는데 그것도 나의 만행의 결과로 탈바꿈하더군. 평생 누구에게도 손찌검 한 번 한 적이 없었지만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가 너무나 애잔해서 나조차도 내가 그런 짓을 했다고 믿을 지경이었소.
우리 부부의 악연에도 불구하고 고대하던 후세를 본 후 그녀가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한 딸아이에게 내 악행을 털어놓을까 봐 두려워 내가 자기에게 이지를 흐리는 약물을 먹였다고 주장한 게 거짓말의 절정이었소. 독이 잘못 들었는지 정신은 멀쩡하고 몸만 마비된 처지가 되었음에도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며 그녀는 눈물을 쏟았소.
그녀의 욕창을 방지한다는 구실로 내가 매일 문을 닫아걸고 그녀를 다 벗겨서는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의 몸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짓거리를 했다고 폭로하더니 그럼에도 그 능욕을 견디며 나를 안심시키려고 마음에도 없는 감언이설을 팔 년이나 늘어놓았다고 하더군. 그러다 오랜 기간의 무사함으로 방심한 내가 그녀를 놓아주고 나서야 딸아이에게 고통과 수치로 얼룩진 자신의 애사를 전할 수 있었다고 했소. 딸아이가 아비의 실체를 알고 나중에 몹쓸 짓을 당하기 전에 대비를 할 수 있도록.
그녀의 터무니없는 고발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가위에 눌린 듯 꼼짝도 할 수 없었소. 은연중 나를 압박하는 도화각주의 기운이나 원독에 가득 찬 그녀의 음성 때문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딸아이의 냉담한 눈빛 때문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그녀가 딸아이의 수태에 얽힌 그날 밤의 비사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아 감사할 따름이었소. 내가 내 딸의 친부가 아니란 사실이 밝혀지는 게 인면수심의 악종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는 것보다 백배는 더 두려웠기 때문이오.
주안표국의 지(池) 형이 그날 모인 증인들을 대표해 나더러 변명이든 해명이든 해 보라고 합디다. 나는 할 말이 없다고 했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소.
그녀는 내가 자신에게 행한 일에 사과를 받고 싶다고 했소. 나는 그녀에게 사과했소. 모든 것에 대해.
그녀는 나를 결코 용서하지 않겠지만 내가 처벌받기를 바라지는 않는다고 했소. 그러고는 자신의 고백이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진실임을 증명하겠다며 별안간 혀를 깨물었소.
예기치 않은 사태에 대소동이 벌어졌지만 나는 내 자신이 놀라울 정도로 담담했소. 그저 그녀가 자진할 힘이 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했을 뿐이오.
나는 지금도 모르겠소. 그녀의 복수가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사지로 보냈던 의형을 위한 것이었던지.
아무튼 그녀는 그렇게 갔소. 내가 감당해야 할, 하지만 감당하지 못할 질곡을 내 목에 채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