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9
제28화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부친에게 돌아온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협박을 내뱉는 절세미녀를 바라보며 진천은 섬뜩하기보다는 애처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라는 내내 매일 밤 아버지를 짐승만도 못한 악종으로 묘사하는 어머니의 속삭임을 견뎌야 했던 어린 소녀의 심정이 어땠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냉랭한 음성과는 달리 불길이 일렁이는 눈으로 노덕을 응시하던 노미현이 숨 막힐 듯한 정적을 깼다.
“다시는 볼 일이 없겠지만 내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로 대하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혹시라도 또 보게 된다면 그때는 아버지의 딸로서가 아니라 엄마의 대리인으로서 만날 테니까. 한 여인의 삶을 갈가리 찢어 놓은 악인의 죄를 처단하기 위해.”
진천이 경기를 일으킨 것처럼 흔들리는 노덕을 붙잡았다. 노덕은 잔인한 언사를 남기고 돌아서는 딸을 붙잡지 못했다. 그녀를 돌려세운 것은 고량의 책망이었다.
“말이 심하구나.”
마차로 두 걸음 내딛었던 노미현이 등을 돌렸다.
“무슨 바람이 분 거죠, 오라버니?”
“…….”
“왜 여기 있는 거죠? 그렇게 한가한 처지가 아닌 것 같던데. 그리고 어째서 아버지 역성을 드는 거죠?”
“…….”
“오라버니는 아버지를 원수로 여겼잖아요. 백부를 사지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라고. 그러고 보니 아버지만이 아니군요. 엄마가 오라버니의 어머니를 독살했을 거라고 의심하지 않았던가요?”
“…….”
“엄마가 그러더군요. 오라버니는 배은망덕한 종자라고. 난 잘 모르겠어요. 그런가요?”
“…….”
“아버지나 오라버니나 참 편하군요. 아무 때나 침묵의 우물 속으로 도피할 수 있으니. 나한테 더 할 말이 없다면 그만 가 볼게요.”
그러나 노미현은 마차로 향하지 않고 기습적으로 진천에게 시선을 주었다. 허를 찔렸음에도 진천은 그녀의 송곳 같은 안광을 담담히 받아 내었다.
“당신이 하남신룡인가요?”
“그렇소.”
짧은 문답 후 대화를 잇지 않고 노미현이 진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자를 오가는 백 명의 남녀를 일렬로 세워 놓고 가장 평범하게 생긴 이를 고르라면 누구라도 일 순위로 선택할 법한 얼굴. 축 처진 눈꼬리도 특징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인상에 기여하는 요소일 뿐이었다. 우람하지도 않고 빈약하지도 않은 체구 또한 얼굴만큼이나 평범했다. 키도 중간이었다.
그러나 목전의 사내는 특별했다. 용호에 들기에 충분한 무위라는 평가를 받은 하남편봉을 꺾은 기린아라서 만이 아니라 그녀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눈빛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노미현에게 남자들은 세 종류로 나뉘었다.
첫째는 그녀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존재로 받드는 무리였다. 그런 자들은 광신도처럼 그녀를 숭배했다.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그녀를 보는 사내들 절대다수는 주인에게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굴었다. 노소를 불문하고 불알 달린 족속의 구 할 이상이 이 부류에 속했다.
둘째는 늑대들이었다. 그들은 그녀를 먹잇감으로 여겼다. 이빨도 덜 여문 주제에 그녀의 속살을 맛보고 싶어서 노상 침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역겨운 짐승들. 오대세가 등의 명문 대파에서 나온 핏덩이들이 대표적이었다.
세 번째는 극소수의 목석들이었다. 이성이 아닌 동성에게 관심이 있거나 특정한 여인들에게만 끌리는 취향을 가진 자들. 우습게도 노미현은 그녀를 소 닭 보듯 하는 그들의 무심한 태도가 가장 편했다.
하남신룡은 셋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미모에 기가 죽지도 않았고 그녀를 욕심내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무관심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안쓰러움, 혹은 피곤함이었다. 노미현은 그 눈빛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림에 혜성과 같이 등장한 젊은 강호가 왜 여기에 있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노 대인을 도우러 왔소.”
다시 대화가 툭 끊겼다. 다섯 번의 호흡 후에야 노미현이 입을 열었다.
“어째서죠?”
“노 대인이 훌륭한 분이기 때문이오.”
노미현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진천은 그것이 분노의 표현임을 알아차렸다.
“당신은 내 아버지에 대해 듣지 못한 모양이군요.”
“알 만큼은 아오.”
“나만큼은 아닐 텐데요.”
“그렇긴 하겠소만 소저가 모르는 것을 알 수도 있소.”
“그래요? 그게 뭔데요?”
“예를 들면 노 대인과 소저의 모친이 혼인하게 된 과정이오. 내가 알기로 노 대인은 그분을 강제로…….”
“그만. 그걸 ‘안다’라고 하면 안 되죠. 그런 건 ‘들었다’라고 해야 하는 거예요. 물론 아버지가 말해 주었겠죠? 그게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요?”
“나는 사실일 거라 믿소.”
“그렇다면 아버지에게 속은 일백만 번째 피해자가 되겠군요.”
“혹시 소저가 사실일 거라 확신하는 내용이 허위일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소?”
“내 어머니가 그런 끔찍한 일들을 지어냈단 말인가요?”
“안타깝지만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소.”
“미쳤군요. 내 어머니는 치욕스러움을 무릅쓰고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상처를 드러냈어요. 진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쳐 가며. 그러면서도 아버지를 벌하지 말라고 당부했어요. 아버지가 저렇게 무사한 것도 다 어머니의 유언 덕분이에요.”
“소저의 마음은 알겠지만…….”
“아니, 당신은 절대로 몰라요. 그리고 더 이상 당신의 억지를 들어 주고 싶지도 않아요. 나는 다만 충고하겠어요. 아버지에게서 떨어져요. 내 말을 무시하고 이곳에 머무르다가 불똥이 튄다면 전적으로 당신 책임이에요.”
“내가 알아서 하겠소.”
장내에 긴장감이 안개처럼 퍼졌다.
둥근 눈을 가늘게 뜬 채 진천과 노미현의 공방을 지켜보고 있던 대웅이 그녀가 입술을 다문 틈을 타서 참았던 날숨을 토해 내었다.
푸우우.
존재감이 없던 말라깽이가 요란스럽게 숨을 내뱉으며 장내의 긴장감을 흐트러뜨리자 노미현의 뒤에 시립한 네 호위가 그를 째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노미현은 대웅에겐 일별도 주지 않고 마차로 걸어갔다. 그녀의 호위대도 마차의 사면에 난 대기석에 자리 잡았다.
히이힝.
네 마리 준마가 일제히 울음을 터뜨리며 마부의 지시에 따라 대문을 향해 달렸다. 마차가 말발굽 소리만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자 대웅이 뒤늦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대체 누가 거짓말쟁이인 거야?”
모두들 묵묵부답이었다.
네 사람은 방으로 돌아갔다.
의자에 앉기도 전에 대웅이 노미현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내 가문에도 내로라하는 미인들이 우글우글하지만 노인네 딸만큼 아름다운 여인은 본 적이 없소. 노인네를 닮아 그렇게 예쁠 리는 없으니 모친의 미모를 물려받았다는 건데 그런 미녀를 아내로 얻었으면서도 어찌 그리 무도한 짓을…….”
고량이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대웅의 수다를 중단시켰다.
“주둥이 다물어라.”
고량과 싸워 보지도 않고 기가 꺾인 대웅이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하던 얘기나 계속하자.”
대웅을 쏘아보며 고량이 진천을 재촉했다. 공교롭게도 대웅의 무위에 관해 언급하던 중에 대화가 끊겼던지라 진천은 그 부분부터 이어야 했다.
“대웅은 강하오, 고 형. 만약 제대로 싸우면 승산은 결코 낮지 않을 거요. 백도방의 고수들이 얼마나 셀지는 모르지만 고 형이 해볼 만하다면 이 친구도 그럴 거라고 장담할 수 있소.”
평소라면 ‘당연한 소리’라고 맞장구치며 의기양양했을 대웅이 웬일인지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에 고량이 도끼눈을 치떴다.
“네 안목을 믿는다. 하지만 솔직히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 몸으로 부딪쳐 보기 전에는 안심을 못 하겠다. 네 구상이 성공하려면 우리 중 한 명도 패배해서는 안 되지 않은가.”
진천은 즉시 동의했다.
“고 형의 말이 맞소.”
두 사람의 협공에 주눅이 든 대웅이 야윈 어깨를 웅크렸다.
“나는 싸우기 싫은데.”
대웅이 소심하게 저항했다. 고량이 그를 을러대기 전에 진천이 먼저 달래고 나섰다.
“싸우는 게 아니다, 대웅. 가벼운 겨루기지. 그리고 고 형이 아니라 나하고 하는 거다.”
불만스러운 기색이었지만 고량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진천에게 맡겼다. 고량을 힐끔거리며 대웅이 진천에게 다짐을 받았다.
“너하고만 붙을 거다, 천.”
“그래.”
대웅을 구슬린 진천이 넋이 반쯤 나간 얼굴을 한 노덕에게 눈을 돌렸다.
“삼보장에 비무를 할 만한 장소가 있습니까, 대인?”
굳이 그에게 묻지 않아도 고량이 알 터이지만 진천은 노덕을 끌어들였다. 노미현의 가시 돋친 언사로 인해 상심의 늪에 빠져 있는 그를 꺼내 주기 위한 배려였다. 심란할 때는 움직이거나 다른 일에 매달리도록 만드는 게 특효약임을 알려 준 이는 육신만이 아니라 정신의 병도 치유하는 명의로 자처하는 공 노인이었다.
“후원에 연무장이 있다네.”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노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천이 쭈뼛거리는 대웅을 잡고 그를 따랐다. 대웅이 도망칠 퇴로를 막듯 고량이 그의 뒤에 바짝 붙었다.
연무장은 꽤 넓었다.
가로세로가 공히 팔구 장에 이르는 정방형의 공간 곳곳에 돌바닥을 뚫고 나온 잡초가 무성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노덕과 고량을 가장자리에 두고 진천은 대웅을 끌다시피 연무장 중간으로 데려갔다. 대웅과 불과 이 장만 떨어져 선 진천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돌진을 예고했다.
“준비됐지? 간다.”
진천이 당장이라도 덤벼들 기세이자 대웅이 허둥지둥 손사래를 쳤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봐.”
도약을 위해 오른발에 실었던 힘을 풀며 진천이 짐짓 무뚝뚝하게 이유를 물었다.
“왜?”
“꼭 이래야 돼?”
진천은 대웅의 질문에 답을 주지 않고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권기가 일렁이는 그의 주먹에 가슴을 강타당하기 직전 어느새 철곤을 빼든 대웅이 반격으로 방어를 대신했다. 수직으로 내리치는 대웅의 쇠몽둥이에 맞불을 놓지 못하고 몸을 비틀어 피한 진천이 이 보 물러서더니 바로 공격을 재개했다.
두 청년의 비무를 관전하던 노덕과 고량의 표정이 변했다.
노덕은 마치 완전히 별개의 사람을 보는 느낌이었다. 대웅과 보름간 동행하며 그가 형(形)을 수련하는 광경은 여러 차례 목도했으나 내력이 담긴 몽둥이를 휘두르는 모습을 본 건 시비를 거는 불한당들을 위협하려고 호수를 내리치던 때가 유일했다. 그러나 지금의 대웅이 발산하는 강맹함은 그때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진력을 발하는 대웅에게선 위악적인 허세나 떨어 대는 덜떨어진 애송이의 면모는 온데간데없고 흉포한 맹수처럼 무시무시한 위압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고량의 충격은 노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내심 대웅을 무시하던 고량은 그의 무위가 자신에 비해 조금도 처지지 않을뿐더러 정직하게 평하자면 윗길임을 깨닫고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저 정도의 무위면 백도방주 오재현을 제외한 누구라도 능히 물리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어째서 어이가 없으리만치 쉽게 기 싸움에서 꼬리를 내렸단 말인가.
두 노소와 전혀 다른 이유로 진천도 충격을 받았다. 진천은 대웅의 증상이 생각보다 심각한 수준임을 알았다.
진천은 대웅을 좀 더 몰아붙이기로 결심했다. 실전을 치르기에 앞서 다양한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살펴보아야 했다. 적절한 처방을 위해서는 정확한 진단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공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진천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