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31
제30화
결전의 날이 밝았다.
삼보장의 전사(?)들은 전날 고량이 구해 온 마차에 올랐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노마(老馬) 두 마리가 끄는 허름한 마차였다. 마부 노릇을 해야 하는 고량을 뺀 다섯 사람은 비좁은 마차 안의 서로 마주 보는 좌석에서 어깨를 부대끼며 끼어 앉았다. 한쪽엔 진천, 대웅, 그리고 노덕이 자리했고 다른 쪽은 대왕객잔의 장초와 닮은 털보와 귀가 짝짝이인 사내가 차지하고 있었다.
털보와 짝귀는 엿새 전 진천이 노덕에게 부탁해 구한 자들이었다. 노덕은 그가 아는 거지나 천민 중에 허우대가 멀쩡하고 강단 있는 이들이 있느냐는 진천의 질문에 두 사람을 추천했다. 야심한 시각이었지만 진천은 즉시 노덕과 함께 삼보장을 나가 주안 북부 거지 패의 두목인 털보와 천민촌에서 성질 사납기로 유명한 짝귀를 납치하다시피 몰래 데려왔다.
진천이 그들을 필요로 한 건 단순히 오인결의 인원을 채워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에겐 긴요한 작전상의 이유가 있었다.
단지 깨끗이 씻기고 새 옷을 입혔을 뿐인데 땟물이 질질 흐르고 누더기를 걸쳤던 거지와 천민은 같이 생활하는 식구들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탈바꿈했다. 진천은 그들에게 까맣게 칠해 얼핏 보면 쇠처럼 보이는 몽둥이를 메도록 했다. 대웅의 것과 같은 철곤은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설령 구한다고 한들 수백 근에 달하는 무게 때문에 털보나 짝귀가 지니고 다니긴 불가능했다.
사정을 들은 털보와 짝귀는 협조를 자청했다. 노덕의 은혜를 갚고 싶은 진심이 충만할뿐더러 내일을 생각지 않는 삶을 사는 이들이었기에 혹시 있을지 모르는 백도방의 후환은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자 둘 모두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의 훈련은 무인이 발산하는 기를 견디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것이었다.
털보와 짝귀는 진천과 대웅이 그들의 면전에서 번갈아 가며 내뿜는 무기(武氣)를 받고는 오줌을 지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질질 쌌다. 범인이 산중을 지나다 범을 만났을 때 보일 법한 반응이었다.
이틀이 지나도록 그들이 적응을 하지 못하자 진천은 어쩔 수 없이 기운을 줄여 나갔다. 그들은 대웅이 비무에 나서기 전까지 어떻게든 들통나지 않고 버텨 주어야 했다.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지만 사흘이 지나면서부터는 털보와 짝귀 모두 다리를 후들거리거나 면상이 돌처럼 굳는 일 없이 태연함을 가장할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깃든 경쟁심이 큰 몫을 했다.
급조한 동료들을 훈련시키는 한편 진천은 대웅과의 비무 수련을 계속했다. 두 사람이 육 성 이하의 공력만 운용하고 약속된 투로만 반복했음에도 연무장 모서리에서 지켜보는 털보와 짝귀는 위압감에 오금도 펴지 못했다.
진천이 그들로 하여금 비무를 참관하도록 한 것은 그들이 코앞에서 벌어지는 무인들의 대결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비무 중에도 끊임없이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는 대웅의 악습을 조금이나마 개선하기 위한 의도가 더 컸다. 그러나 대웅은 오인결이 임박하도록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수시로 그의 상태를 점검하러 온 고량의 속을 태웠다.
고량은 대웅을 불신했으나 진천은 신뢰했다. 노회한 백도방의 생강들이 그가 예상한 그대로의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손익을 저울질하고는 기꺼이 미끼를 물었다. 모든 조건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결정되었으니 그들로서는 마다할 까닭이 없었을 터였다.
고량이 집요하게 요구했던 연승전 방식을 물리치고 선삼승(先三勝)으로 결판을 내기로 합의를 본 데다 판정관도 그들의 수하나 다름없는 철검문주(鐵劍門主) 양일(梁一)로 내정했으니 절대적으로 유리한 판국이었다. 마치 상수도 아닌 하수를 상대로 서너 점을 깔고 바둑을 두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최악의 경우 오인결에서 패배한다고 해도 백도방으로서는 잃을 게 없었다. 오인결을 비밀에 붙이기로 했으니 위신에 손상을 입지도 않을뿐더러, 그들로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계집 하나쯤은 살려 줘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승리했을 시의 이득은 황금 일백 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금강권 같은 고수는 일반무사 일천 명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휘하에 둘 수만 있다면 중립 지대 중북부 일대의 패권을 놓고 다투는 도화각과의 대립에서 우위에 설 수도 있을 만큼 고량은 비중이 큰 무인이었다.
그렇더라도 백도방은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 건너는 신중함을 보였다. 그들이 자신이 요구하는 이월 말이 아니라 삼월 삼 일에 오인결을 행하자고 역제안을 했을 때 고량은 하마터면 탄성을 터뜨릴 뻔했다. 진천의 예측이 정확히 들어맞아서였다.
몸값을 구하지 못해 다급해진 고량이 궁여지책으로 오인결이라는 극약 처방을 들고나왔으리라고 보았으나, 백도방은 그럼에도 그의 뒤에 도사린 방수들을 미리 확인하고자 했다. 그들이 가장 염려하는 상황은 도화각이 고량과 밀약을 맺어 뒤통수를 치는 것이었다. 그다음으로는 고량이 외부에서 상당한 강자들을 포섭해 왔을 경우였다.
진천이 매일 털보, 짝귀와 옷을 바꿔 입어 가며 대웅과 공개 비무를 한 데에는 백도방의 의심을 불식시키고 그들이 대웅의 무위를 오판하도록 만들기 위한 기만술도 포함되어 있었다.
삼보장 측면에서 팔십여 장 떨어진 고층 거각의 꼭대기에서는 연무장이 한눈에 들어올 터였다. 세세히 살펴보기엔 너무 멀었지만 안력이 뛰어난 무인이라면 충분히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을 거리였다.
백도방이 보낸 ‘눈’은 고량이 끌어들인 자들이 ‘제법’이지만 자신들의 상대는 아니리라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설사 진신 실력을 감추고 있음을 눈치챘어도 상관없었다. 도화각과의 관련성만 없다면 백도방으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판이었다. 승산이 오 할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달려들 터인데 하물며 구 할 이상임에랴.
진천의 예상대로 백도방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하남신룡’의 존재를 파악했다. 그러고는 고량이 하남 무림에서 용병들을 구해 왔다고 결론을 내렸다. 방주인 일수천비 오재현을 차치하더라도 백도방을 대표하는 사인의 고수는 하남칠강의 우두머리들보다 강하다고 자부하기에 그들은 오인결에서의 무조건적인 승리를 자신했다.
* * *
고량은 숙련된 마부 못지않은 능란한 솜씨로 마차를 몰아 협곡에 들어섰다.
주안에서 동북으로 오륙십 리 떨어진 무연곡이었다. 수목이 듬성듬성 난 좁은 골짜기를 지나자 호리병의 불룩한 부위처럼 넓은 공간이 나왔다. 공터에는 삼십 명 안팎의 무리가 모여 있었다. 고량이 그들로부터 칠 장 떨어진 곳에 마차를 세웠다.
“늦었구나, 금강권.”
마부석에서 뛰어내리는 고량에게 청수한 인상의 오십 대 중년인이 말했다.
그를 쏘아보며 고량이 반박했다.
“아직 유시(酉時)가 되려면 멀었잖소?”
중년인이 느긋한 미소를 머금었다.
“약속 시간과 무관하게 급한 자가 먼저 와서 기다려야 하는 법이 아닌가. 자네는 다 좋은데 너무 고지식해서 탈이야.”
고량은 중년인과 더 말을 섞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중년인은 백도방주 오재현이 아니라 삼안호리 장관이었다. 백도사흉 가운데 가장 약했으나 개중 두뇌가 비상했기에 지낭(智囊) 역할을 하는 자였다. 장관은 고량과 오인결을 두고 협상을 벌였던 자이기도 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그는 잔혹한 심성으로 악명이 높았다.
고량이 그를 무시하고 뒤쪽의 여인에게 눈길을 돌리자, 장관도 막 마차에서 내리는 오인조에게 시선을 보냈다. 장관은 그들 중 한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삼보장주 노덕은 모르기엔 너무나 유명한 인사였다.
하지만 장관은 한물간 노덕 따위에겐 관심이 없었다. 설령 노덕이 예전과 같은 위상이라고 해도 지금은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아무리 주안 최고의 거부라도 하남신룡이라는 무림의 신성에 비하면 한참 아랫급이었다.
어중이떠중이로 보이는 네 명의 청장년들을 재빨리 훑어본 장관은 하남신룡으로 짐작되는 자를 골라냈다. 굳이 어떤 속임수도 간파해 내기에 세 번째 눈을 가졌다는 명성을 얻게 해 준 눈썰미를 동원할 필요도 없었다. 어떻게 봐도 하남신룡일 리가 없는 셋을 제외하니 하나밖에 남지 않아서였다.
“이거 엄청난 귀빈이 행차하셨군. 네가 근자에 강호에 쩌렁쩌렁한 위명을 울린 하남신룡이겠지?”
축 처진 눈의 청년에게 시선을 꽂은 장관이 물었다.
“그렇게들 부른다더군요.”
진천이 순순히 시인했다.
장관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기실 방금 그는 주도권을 틀어쥐기 위해 모험성 응수타진을 한 것이었다. 나이가 어리다 하나 무력으로 서열이 정해지는 무림에서 하남신룡의 위치는 그보다 반 뼘은 윗길이라 보아야 했다. 그들 중 목전의 초신성에게 초장부터 하대할 수 있는 이는 방주인 오재현뿐이었다.
그럼에도 하남신룡이 그의 말투를 문제 삼기는커녕 존대로 받았다는 것은 그가 무위와 상관없이 멍청이거나 아니면 백도방과 적대시할 의사가 없다는 의미였다. 장관은 후자로 받아들였다.
진천과 대화를 이어 가려던 장관이 돌연 뒤로 물러섰다.
손짓 한 번으로 그를 물린 이는 인자한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는 강퍅한 인상의 칠순 노인이었다. 면상에 주름과 흉터가 그물처럼 덮여 있었다. 진천은 흉흉한 안광을 발하는 노인이 백도방의 주인인 일수천비 오재현이리라 짐작했다.
오재현은 대륙 전역에 무명을 떨친 암기공의 대가이자 중립 지대 중북부에서 도화각주 여상구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거물로 자타가 공인하는 강호였다. 그는 도굴(賭窟)의 심부름꾼에서 이백여 개의 특급 도박장을 거느린 백도방의 정점까지 수직 상승한 입지전적인 인물로도 유명했다.
진천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오재현이 자기소개를 생략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삼보장주와는 어떤 사이더냐?”
“친인입니다.”
질문이 짧다고 대답까지 짧기를 바라지 않았던 오재현의 눈가에 엷은 경련이 일었다. 그를 아는 이들이 보았다면 숨을 멈췄을 터였다. 눈떨림은 그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신호이기 때문이었다.
“금강권과는?”
오재현이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었다. 그의 심사를 헤아렸는지 이번에는 진천의 대답이 길게 나왔다.
“고 형도 친인입니다. 그의 사정을 듣고 도움을 주고자 왔습니다. 가능하다면 오인결의 결과와 무관하게 그 여인을 풀어 주었으면 합니다만.”
고량의 눈길이 못 박혀 있는 곳으로 눈을 돌리며 진천이 요청했다.
백도방의 고수들 뒤에 이 열 횡대로 늘어선 스무 명 남짓한 무사들 중앙에 마혈이 찍혔음에 분명한 여인이 보였다. 여인치고는 상당한 거구였다. 옆의 무사들보다 장신인 데다 덩치도 웬만한 사내들보다 컸다. 풍만하게 부푼 유방은 수박만 했다.
“기껏 호의를 베풀었거늘 죄인을 그냥 놔주라니 황당하구나. 정해진 대로 하면 그뿐이야. 우리가 이기면 금강권을 얻고 너희가 이기면 저 계집을 준다.”
진천과의 대화에 흥미를 잃었는지 오재현이 장관에게 눈짓했다. 그의 뜻을 알아들은 장관이 신속하게 진행하고 나섰다.
“싸우러 왔으니 이제 시작하자. 판정은 미리 합의한 대로 여기 철검문의 양(梁) 문주가 수고해 줄 것이다. 이의 제기나 번복이 불가함을 다시 주지시킬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약정에 따라 우리 쪽 선발부터 알려 주마. 본방의 제일호법(第一護法)인 광객(狂客)이다. 너희는 누가 먼저 나설 게냐?”
진천이 대답 대신 대웅의 등을 떠밀었다. 버티던 대웅이 마지못해 앞으로 나섰다.
일순간 백도방 진영에서 폭소가 터질 뻔했다. 광객 이주한을 상대하러 나온 말라깽이가 약관의 애송이라서가 아니라 큼지막한 눈에 겁을 한가득 담고 있음이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고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대웅을 뒤에서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고량은 문득 자신이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