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33
제32화
휘이잉.
삼월이 되고도 사흘이나 지났지만 계절의 전환을 인정하지 못하겠는지 바람 소리가 한겨울의 삭풍처럼 매서웠다.
광객의 패배를 선언한 것이 자신의 죄이기라도 한 듯 철검문주 양일은 진행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하지만 무명의 젊은 무인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광객을 포함해 누구도 그를 비난하거나 한심하다고 욕하지 못했다.
삐쩍 마른 청년이 일으킨 충격파는 근자에 인구에 가장 많이 회자되는 하남신룡이 한 달여 전 팔정포에서 일으켰던 파란을 능가했다. 광객의 이름값이 하남편봉보다 높지는 않지만 그녀라고 해도 그를 일 초에 짓뭉갤 수는 없었다.
모두가 가슴을 한껏 내밀고 해골 같은 면상 가득 득의양양한 표정을 담고 있는 청년을 주시했다.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체형과 너무 대조적이라 우스꽝스럽게만 들렸던 대웅이라는 이름조차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려 보였다.
“뭐야. 안 해? 그냥 항복이야?”
대웅이 넋이 나간 백도방 진영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일부러 잔뜩 공력을 실었기에 골짜기가 쩌렁쩌렁 울렸다.
중인은 광객을 상대로 거둔 그의 승리가 결코 운이 아니었음을 절감했다. 백도방주 오재현 외에는 흉내조차 내기 힘든 심후한 내공이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양일이 쩔쩔 매자 장관이 앞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대웅이란 자가 저렇게 강하다면 하잘것없다고 여겼던 털북숭이와 짝짝이귀도 내기를 갈무리한 고수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그에 필적하는 강자들이라면 승부는 해 보나마나였다.
백도방에서 확실한 일 승이 보장된 이는 방주인 오재현뿐이었다. 금강권 고량만 해도 그를 포함한 사흉(四凶) 누구도 우세를 장담할 수 없는 강호였다. 솔직히 말해 자신과 초검은 그의 상대로는 부족했고 칠병귀라 해도 백중열세일 터였다. 하남신룡의 무위가 전해진 대로라면 오인결의 승리는 물 건너간 셈이었다.
장관이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고량을 응시하며 미간을 모았다.
“엄청난 조력자들을 구해 왔구나, 금강권.”
조롱이 아니었다. 장관의 말은 백도방도 모두의 진심을 대변한 것이었다.
고량은 장관의 감상을 묵살하고 진행을 촉구했다.
“내 상대는 누구요?”
두 번째 대전에서는 이쪽에서 출전자를 먼저 밝히기로 한 합의에 따라 고량은 그 질문으로 자신이 이장(二將)임을 알렸다.
장관은 머뭇거렸다. 원래는 칠병귀가 나가야 했으나 도저히 기세가 오른 금강권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칠병귀마저 진다면 후속 수단이 전무했다. 가령 털보와 짝귀가 약자들이라 해도 상대는 방주를 피해 하남신룡이라는 강력한 패를 적절한 순서에 내밀 터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 외통수에 몰린 것은 아니었다. 장관에게도 기사회생의 묘수가 준비되어 있었다. 판정관의 중임을 떠맡긴 양일이었다. 실제로는 혹시 몰라 가져다 놓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으나, 국면이 요동치는 바람에 오인결의 결과를 좌지우지할 저울추가 되고 말았다.
“왜 그리 서두르나? 우리는 아직 네 주먹에 맞설 자를 고르지 않았다. 서로 너를 누르고 네 명성을 빼앗아 오고 싶어 한다. 그러니 우리가 정할 때까지 기다려라.”
시간을 끌며 장관은 제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 멍청하게 서 있는 양일에게 간단하지만 명료한 전음을 보냈다.
ㅡ적당한 때를 보아 판정을 내려라.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칠병귀가 금강권에게 사오십 초 이내에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양일이 개입해 비무를 중단시키고 칠병귀의 손을 들어 주면 금강권으로서는 속수무책일 터였다. 장관은 털보와 짝귀도 이런 방식으로 처리할 작심이었다.
장관의 의도를 간파했지만 고량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 또한 진천의 예상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진천의 권유가 아니더라도 고량은 속전속결을 택할 참이었다. 대웅처럼 단 일 초에 상대를 꺾을 수는 없겠지만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아니 뼈를 내주고 목을 노리는 극단적인 수법을 구사하면 칠병귀를 이십 초 안에 때려눕힐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자신도 부상을 입을 공산이 크지만 상관없었다. 오로지 승리만이 중요했다.
칠병귀 조요상은 백도방의 책사 노릇을 하는 삼안호리 장관만큼이나 꾀가 많고 재주가 많은 자였다. 평상시라면 가장 까다로운 상대이겠지만 동귀어진을 할 각오로 붙는 경우라면 그가 제일 상성이 좋았다. 만약 광객이었다면 틀림없이 맞불 놓으며 같이 죽자고 덤볐을 것이었다. 별호와는 달리 독하기로 유명한 초검(草劍)도 마찬가지였다.
고량의 걱정은 그가 칠병귀에게 결정타를 가하기 전에 양일이 나서서 비무를 중단시키는 것이었다. 실제 흐름과 무관하게 그가 무조건 칠병귀의 우세를 판정하리라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어떻게든 양일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고 맹렬하게 몰아붙여 단숨에 끝장을 보아야 했다. 고량은 반드시 사랑하는 이의 목숨이 걸린 귀중한 일 승을 챙기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고량의 전신에서 분출되는 결사의 의지에 주눅이 든 듯, 쭈뼛거리며 나선 칠병귀 조요상의 안색이 어두웠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 나가는 소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칠병귀는 고작 삼 보만 내딛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를 구원한 것은 방주인 오재현의 목소리였다.
“내가 나간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오재현의 선언에 국면은 또 한 번 뒤집어졌다.
장관은 얌전히 뒤로 물러섰다.
방주가 나서기엔 이르다고 생각했지만, 조언할 분위기가 아니라고 판단해서였다. 장관은 경험상 그가 면밀한 계산이 아니라 직감에 따라 승부수를 던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럴 때는 군말 없이 따르는 게 신상에 이로웠다.
오재현이 천천히 고량에게 다가갔다. 그가 접근함에 따라 고량이 발산하던 강렬한 투지가 봄눈 녹듯 사라졌다.
“허무하게 갔지만 주안철권이 자식 농사는 잘 지었구나. 부럽군. 내 아들놈은 기루를 지키는 계집한테도 얻어터져 사람 구실 못하는 병신이 되었는데.”
고량의 이십 보 앞에 선 오재현이 여유를 과시하듯 뒷짐을 졌다.
“방주가 나와 싸우겠단 말이오?”
심장이 터질 듯한 당혹감을 간신히 추스르며 고량이 물었다.
“안 될 게 뭐 있느냐?”
오재현이 반문했다.
뜻밖의 사태에 고량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전성기가 지나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백도방주는 그가 대적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십여 년 전 백도방의 주인이 되던 무렵 사벌(邪閥)에서 오재현에게 사령(邪領)을 제안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용의 꼬리보다는 뱀 머리가 되고 싶다며 그가 영광의 자리를 고사했다는 설도 퍼졌다. 진위 여부는 불확실했지만 오재현은 그런 풍문이 그럴싸하게 들릴 정도의 무위를 증명한 강자였다.
고량은 암담했다.
오재현은 그와 맞붙은 이들의 구 할을 염왕전에 보내고 나머지 일 할은 영구적인 불구로 만든 전적으로 악명을 떨쳤다. 암기공을 전문으로 하는 탓에 오재현과는 친선 비무가 어려웠다. 그와 무공을 견주려면 사망이나 치명상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고량이 암담한 까닭은 오재현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에게 당할 패배가 ‘그녀’의 죽음을 의미하기에 두려운 것이었다. 거지 털보와 천민 짝귀가 백도방의 사흉에게 일 승을 거둘 가능성은 고량이 팔대무왕을 이길 가능성과 비슷했다. 차라리 서천의 일출을 기대하는 게 가능성이 높을 터였다.
고량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 못지않게 당혹스러운 얼굴을 한 진천이 보였다.
어쩌지?
고량이 눈빛으로 물었다.
나도 모르오.
진천이 표정으로 답했다.
오재현이 고량의 눈길을 따라 진천에게 시선을 옮겼다. 순진하게도 낭패한 기색을 숨김없이 드리운 진천의 얼굴이 오재현의 눈에 들어왔다.
진천이 대열에서 걸어 나와 고량과 나란히 섰다.
암담한 와중에도 고량은 그를 지원하러 온 천군만마를 본 느낌이었다. 어느샌가 진천에게 크게 의지하고 있었음을 자각한 고량은 씁쓸했다. 진천에 대한 고마움과는 별개의 감정이었다.
어쨌거나 고량은 진천에게 맡기기로 했다. 자신의 문제였지만 그로서는 난국을 타개할 어떤 묘책도 떠오르지 않았기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진천이 고량에게 이르도록 지켜만 보았던 오재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진천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두고 보겠다는 심산일 터였다.
“제가 고 형 대신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진천은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다들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그가 정말로 오재현에게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대놓고 밝히자 백도방 진영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불과 일각 전이라면 작은 명성을 얻었다고 기고만장해서는 천지를 모르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로 취급했을 테지만 쇠몽둥이를 휘두르는 말라깽이의 놀라운 무위를 목도한 지금은 그렇게 간단히 평가절하하기 어려웠다.
오재현의 면상을 가득 메운 흉터가 시체에 우글거리는 구더기처럼 꿈틀거렸다.
“이미 금강권이 출전을 알렸다. 부정할 셈이더냐?”
“아닙니다.”
“그러면 네 차례를 기다려라. 공표한 순서를 어기고 대인(代人)이 나서면 오인결은 무효일뿐더러 파국의 책임을 지고 패배에 준하는 배상을 하기로 한 합의를 잊지 말도록.”
자존심 때문에라도 백도방주가 교체의 청을 받아들일 거라 예상했던 진천은 당황했다.
진천은 자책했다. 대왕객잔의 장초 아저씨가 뽑는 면발처럼 계획한 대로 일이 술술 풀리자 어쭙잖은 자만심까지 생겼다가 백도방주의 역습 한 방에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백도방주의 수읽기는 그보다 한 수 위였다.
백도방주는 털보와 짝귀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범인임을 간파했음에 분명했다. 그들이 대웅의 극적인 승리에 고무되어 안정을 되찾았음에도. 기감으로 두 사람의 내기를 훑어보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기에 백도방주는 필시 직관으로 파악했을 터였다.
진천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밀고 나가자니 낭떠러지였고 물러서자니 늪이었다. 판을 짤 때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변수를 검토해 보고 각각의 돌발 상황에 대한 방책을 마련해야 한다던 허 노야의 가르침을 망각한 대가였다. 백도방주가 고량을 상대하고 나설 비상사태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했어야 했다.
후회한다고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진천은 마음을 다잡았다. 어떤 위급지경에 처하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허 노야가 수십, 수백 번을 강조하지 않았던가.
진천은 백도방주 오재현을 직시했다. 그러고는 목전의 노인이 어떤 부류인지 알아내기 위해 집중했다. 대웅과 고량에게서 들었던 그에 관한 정보는 무시하기로 했다. 오로지 육감에 의존해 대응책을 결정할 참이었다.
오재현도 진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기에 노소의 안광이 사 장의 거리를 격하고 충돌했다. 눈빛이 점점 단단해지더니, 진천이 어느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