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34
제33화
이윽고 진천이 오재현의 경고에 대한 반응을 내놓았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았지만 그의 침묵은 촌각에 불과했다.
“나는 오인결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무림의 후기지수로서 일수천비에게 비무를 청하오.”
진천의 말투가 바뀌자 오재현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진천이 보다 격한 언사로 오재현을 자극했다.
“받을 거요, 말 거요?”
“내가 받지 않겠다면 어쩔 테냐?”
오재현이 당장 겁과 버르장머리를 함께 삶아 먹은 핏덩이에게 천비혈우(千匕血雨)를 쏟아부을 거라 예상했던 중인은 그가 말로써 대응하자 놀라기보다는 허탈했다.
하나, 진천은 되레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오재현의 질문에 답했다.
“멈춰라.”
진천이 뚜벅뚜벅 다가서자 오재현이 고함을 질렀다. 진천은 오재현의 명을 비웃듯 세 걸음 더 가서야 발을 세웠다.
이제 그와 오재현 간의 거리는 십이삼 보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 정도의 고수에겐 코앞이나 마찬가지였다.
“싸울 거요, 말 거요?”
진천이 다시 오재현을 압박했다.
“저 계집의 목숨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뜻이냐?”
오재현이 위협했다.
“당연히 상관이 있소.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나선 것이니.”
“그렇다면 물러가라. 그리고 상호 합의한 오인결의 규칙을 준수하라. 억지 부리지 말고.”
“억지? 애당초 정당한 무력을 행사한 그녀를 잡아 가두고 터무니없는 몸값을 요구한 자체가 억지 아니오? 그리고 자기편을 판정관으로 내세운 게 억지 아니오?”
“맹랑한 놈이로구나. 그럴 것이면 애당초 오인결을 청하지 말았어야지.”
“맞소. 섣부른 발상이었소. 그래서 판을 거두려고 하오.”
“네 멋대로 말이냐?”
“안 될 게 뭐요?”
말문이 막힌 오재현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노소의 언쟁에 긴장감이 고조되었던 양편의 인사들은 오재현의 노화가 폭발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예상은 빗나갔다.
“아무래도 재협상을 해야겠구나.”
오재현의 굴복에 백도방의 무인들이 술렁거렸다. 그가 이런 식으로 물러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망신살이 대륙 끝까지 뻗칠 것이었다.
상대의 체면을 고려한다면 이쯤에서 퇴로를 열어 주어야 함을 알기에 진천은 자세를 낮추었다.
“방주의 아량에 감사드리오.”
포권을 취하며 진천이 고개를 숙이는 찰나 오재현은 갈등했다. 이빨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불분명한 어린 맹수를 즉사시킬 절호의 기회였다. 이 장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라면 절대 고수라도 고슴도치로 만들 수 있었다.
오재현의 손이 근질거리는 순간 진천이 잽싸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을 본 오재현은 방금 전의 빈틈이 함정이었음을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 순박한 인상과는 정반대로 목전의 어린놈은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종자였다.
“가급적이면 지금 이 자리에서 협상을 마무리 지었으면 합니다. 서로 주고받으면 어떻겠습니까?”
진천이 은근슬쩍 공대로 돌아오자 오재현은 기분이 되레 불쾌해졌다.
“뭘 주고받는다는 게냐?”
“저희는 그녀를 받고 싶습니다.”
“하면 금강권을 줄 테냐?”
“그건 곤란할 듯합니다. 그렇지 않소, 고 형?”
진천이 고개를 돌려 고량에게 물었다.
절망적인 국면에 반전의 회오리를 일으킨 진천의 활약을 우두커니 지켜보던 고량이 맹목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천이 백도방의 노예가 되라고 강요해도 따를 판인데 그 반대이니 순응하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오재현의 이마부터 콧등까지 길게 팬 두 가닥 세로 주름이 깊어졌다.
“그렇다면 무얼 준다는 게냐?”
“제 호의를 드리겠습니다.”
오재현의 눈가에 인 경련이 얼굴 전체로 퍼졌다.
“나하고 말장난하자는 게냐?”
“그렇지 않습니다. 앞으로 귀 방에 제 힘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황금 일백 관을 말 몇 마디로 대체할 셈이더냐?”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했습니다. 제 말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고 형의 사정을 듣고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던 것처럼 귀 방의 일에도 최선을 다해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머릿속으로 손익을 따져 본 오재현은 수용 쪽으로 기울었다. 담보 없는 어음 따윈 절대로 받지 않는 그였지만, 목전의 청년은 신뢰가 갔다. 어쨌거나 그를 적으로 돌리는 것보다는 무조건 이득이었다.
“일회성이냐, 아니면 내가 원할 때마다 달려오겠다는 것이더냐?”
“‘앞으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좋은 관계를 맺으면 한두 번이 아니라 백 번이라도 협력해야지요.”
오재현의 입이 벌어졌다. 그러나 웬 횡재냐고 침을 흘리기엔 일렀다.
“단, 사람을 죽이거나 남의 물건을 뺏는 등 도리에 어긋나는 일에는 도움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런 경우엔 오히려 뜯어말릴 것입니다.”
진천이 내건 조건에 오재현의 속에서 열불이 올라왔다. 그러나 오재현은 일방의 주인답게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개새끼가 어디서 어쭙잖은 협객 놀음이야.’라는 호통을 혀끝에서 순화시켰다.
“결국 네 맘대로 하겠다는 게로구나.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더냐?”
오재현의 찢어진 눈에서 살벌한 안광이 폭사되었다. 상황은 급전직하했다. 파국을 원치 않았지만 진천은 오재현을 달래는 대신 정공법으로 나갔다.
“저는 다만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는 것뿐입니다. 정도를 따른다면 저는 언제나 귀 방의 친구로서 힘을 보탤 것입니다.”
숨도 내쉬지 못하고 노소의 줄다리기를 지켜보던 중인의 대부분은 이제야말로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일수천비의 암기공을 견식하게 될 것임을 확신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오재현이 마지막 인내심을 쥐어짰다.
“한 가지만 묻자. 만약 오대세가나 사파칠문이 본방을 공격한다면 어쩔 테냐?”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진천이 즉답을 주었다.
“그들이 정당한 이유 없이 귀 방을 핍박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귀 방의 편에 서서 싸울 것입니다.”
오재현이 진천의 동공을 뚫어 버릴 듯 사납게 쏘아보았다. 진천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의 눈빛을 받아 냈다.
내공을 끌어 올린 탓에 깃발처럼 펄럭거리던 오재현의 황색 금포(錦袍)가 잔잔해졌다. 오재현이 진천의 응답에 대한 대꾸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수하들에게 상황을 종료시키는 명을 내렸다.
“계집을 풀어줘라.”
모두들 맥이 풀렸다. 무림의 신구 강호가 대치한 시간은 채 반 각도 되지 않았으나 반나절 내내 지속된 것처럼 너나없이 전신의 신경 그물이 너덜너덜해졌다.
거구의 여인만 남기고 백도방 무리는 썰물처럼 골짜기를 빠져나갔다.
고량은 부리나케 여인에게 달려가고, 대웅은 헐레벌떡 진천에게 뛰어왔다. 송곳 같은 주먹으로 진천의 단단한 어깨를 치며 대웅이 감상을 쏟아냈다.
“야, 피 터지는 싸움을 구경하는 것보다 더 쫄깃쫄깃하더라. 그 늙은이가 기를 분출할 때마다 너도 움찔움찔했지? 비수를 쏠까 봐. 너무 가까웠잖아.”
“그래. 많이 긴장되더라.”
진천이 양 팔뚝에 찬 완갑(腕鉀)을 풀며 솔직하게 시인했다. 연철에 악어가죽을 덧대 만든 완갑은 백도방주와의 대결을 염두에 두고 준비한 기물이었다. 급하게 구하는 바람에 그의 팔에는 맞지 않았다. 너무 꽉 껴서 피가 통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한발 늦게 달려온 노덕이 진천을 치하했다.
“참으로 대단하이. 자네가 담판에도 그렇게 뛰어난 재능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네.”
“운이 좋았습니다, 대인.”
진천의 겸손이 못마땅한 듯 대웅이 방울눈을 부라렸다.
“다시는 그런 무모한 짓 하지 마라. 그놈들이 오인결을 집어치우고 떼로 덤볐으면 어떡할 뻔했냐? 나야 달아날 수, 아니 대처할 수 있지만 이 노인네하고 저치들은 속절없이 목을 내놓아야 했을 거 아냐? 안 그래?”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아직도 마차 옆에서 뻣뻣하게 서 있는 털보와 짝귀를 가리키며 대웅이 진천을 야단쳤다. 진천은 그저 쓰게 웃었다.
노덕이 진천을 변호하고 나섰다.
“그런 소리 말게나. 결과적으로는 무모한 게 아니라 현명한 처사였지 않은가. 진군의 결단이 아니었다면 큰 낭패를 볼 뻔했으니.”
대웅이 물고 늘어지기 전에 노덕이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오 방주의 태도는 너무 의외였네. 그를 알고 지낸 지 오래지만, 나는 그가 그런 식으로 나오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네. 그는 양보나 선처와는 거리가 먼 위인일세. 어떻게 그가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알았는가?”
진천의 답변이 궁금했기에 대웅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설을 도로 밀어 넣었다.
“실은 궁여지책이었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대웅이 대번에 불신과 불만을 표했다.
“뻥치지 마. 이게 누굴 바보로 아나. 그러지 말고 이실직고해라, 진천. 너는 양처럼 순한 눈을 하고서 사람들을 속여 먹는 능구렁이잖아. 분명 믿는 구석이 있었을 거야. 안 그래?”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으면 놔주지 않을 게 빤했기에 진천은 백도방주에게서 읽었던 내용을 대웅에게 털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그를 방해하는 이가 있었다. 여인을 안다시피 부축하고는 세 사람에게로 온 고량이었다.
“고맙다.”
고량이 진천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여인이 보탰다.
대웅의 입이 튀어나왔다.
“흥,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구렁이가 챙긴다더니 딱 그 짝이군. 몸 고생은 나 혼자 다 했는데 세 치 혀만 놀린 천이가 감사의 인사를 독차지하다니. 이거 너무 불공평한 거 아뇨?”
일행은 일제히 실소했다. 그러고 보니 실제로 싸운 이는 대웅뿐이었다.
“너한테도 고맙다. 진심으로.”
고량이 말했다. 여인이 그의 뒤를 이었다.
“정말 고마워요, 대협.”
옆구리를 찔러 절을 받은 대웅이 어울리지 않는 겸양을 떨었다.
“대협이라니, 과분한 호칭이오. 뭐, 강호에 대대로 전해 오는 처방에 따라 미친개 한 마리를 몽둥이로 때려잡은 것뿐이오.”
노덕이 대웅을 띄워 주었다.
“아닐세. 광객의 이름값은 결코 작지 않다네. 자네가 일 초에 꺾은 이는 이 근역 삼사백 리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라네. 백도방주와 도화각주, 그리고 의질과 칠병객을 제외하면 누구도 그보다 우위라고 장담할 수 없으니. 오늘의 일전으로 자네는 하남신룡에 못지않은 무명(武名)을 얻게 될 걸세.”
금세 우쭐해서는 대웅이 본격적으로 자랑을 늘어놓으려는 찰나, 진천이 스스로의 발로 서지 못하고 고량에게 기대어 있는 여인에게 불쑥 물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그제야 노덕과 대웅도 일 년이 넘도록 뇌옥에서 지냈을 여인의 상태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녀의 이름은 차소영(車素英)이었다.
차소영과 고량의 첫 만남은 이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차소영은 노덕이 고량을 위해 초빙한 무공 교두 중 한 명인 차유섭(車裕燮)의 외동딸이었다.
팔비객(八臂客)이라는 별호를 가진 차유섭은 환권(幻拳)의 대가였다. 지나칠 정도로 정직하고 우직한 탓에 변칙적 수법에 취약한 자신의 권공을 보완하기 위해 의형인 고숭이 차유섭의 비기를 원하자, 노덕은 거금을 아끼지 않고 그를 불러왔다. 차유섭은 만 이 년 동안 삼보장에 머물며 고량에게 자신의 권공을 전수했다.
차유섭이 고량을 지도한 지 일 년 반쯤 지난 어느 겨울날, 그의 딸이 삼보장으로 그를 찾아왔다. 지병을 앓던 모친이 급사한 바람에 고향을 떠나온 것이었다. 고숭이 딸과 함께 지내게 해 달라는 차유섭의 청을 받아들인 덕분에 그녀는 고량과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차유섭은 고숭의 양해를 얻어 딸과 고량을 묶어 가르쳤다. 열다섯 동갑내기인 고량과 차소영은 매일같이 비무 수련을 하며 시나브로 정분이 싹 텄다. 말하자면 그들은 서로에게 풋사랑이자 첫사랑인 셈이었다.
그러나 무뚝뚝한 소년 고량은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렀고, 자존심이 강한 만큼이나 수줍음도 많았던 차소영 또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꽁꽁 감추어 두었다. 그녀가 겉으로는 쌀쌀맞게 대했기에 순진한 고량은 반년 후 헤어질 때까지 그녀의 연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차소영이 떠나고 가슴이 뻥 뚫리는 경험을 하고서야 고량은 그녀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깨달았지만, 그녀를 쫓아갈 용기가 나지 않아 속만 끓였다.
하지만 인연이 있는 이들은 언제든 다시 만나게 마련인지라 두 사람은 이별의 날로부터 정확히 십팔 년 후의 여름 뜻밖의 장소에서 극적으로 재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