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35
제34화
그 외에는 고삐질을 거부하는 삐딱한 노마 두 마리 때문에 고량은 부득이 마부석에 올라야 했다.
차소영은 오랜 영어(囹圄)의 후유증으로 아직 몸을 가누지도 못했지만 마차 안이 아니라 고량과 함께 있고 싶어 했다. 그녀를 옆에 앉힌 고량은 무량곡에 올 때와는 달리 갓난아기 포대를 안은 듯 조심스럽게 마차를 몰았다.
마차 안에서 대웅이 투덜거렸다.
“젠장, 이제 보니 말들이 비루먹고 마차가 낡아 빠져서 마구잡이로 흔들리고 쏠렸던 게 아니었군. 이렇게 부드럽게 부릴 수 있으면서 그렇게 거칠게 몰았다니. 자기를 위해서 출전한 우리를 편안하게 모시지는 못할망정 깨진 도자기 다루듯 했단 말이지. 대체 무슨 심보야.”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았거니와 설사 그랬다손 치더라도 고량의 귀에 들리지 않을 리 만무했기에 진천과 노덕은 고소를 머금었다. 광객과의 일전으로 자신감이 구름을 뚫고 하늘 끝까지 치솟은 대웅은 고량에게 당한 그간의 구박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트집 잡을 일이 있으면 반드시 걸고 넘어갈 심산임에 분명했다.
“다리나 좀 오므리는 게 어떠냐?”
진천이 대웅에게 요구했다.
가뜩이나 좁은 좌석에 세 사람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야 했는데 대웅이 빈약하기 짝이 없는 다리를 쩍 벌리는 바람에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진천의 말에 대웅이 두 다리를 뻗어 앞좌석에 앉은 털보와 짝귀의 허벅지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두 사내는 찍소리도 못 하고 대웅의 횡포를 감내했다.
“좀 살 것 같네. 앞으로도 한참을 가야 하는데 교대로 발을 얹어 놓자고. 괜찮지?”
당연히 괜찮지 않았지만 털보와 짝귀는 ‘강자에게 굴종’이라는 생존의 제일 원칙에 충실한 자들이었기에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천에게 잔소리를 듣기 전에 대웅이 선수를 쳤다.
“아까 하다만 얘기나 마저 해 봐라, 천. 대관절 뭘 믿고 일수천비를 몰아세운 거야? 그 늙은이가 네 패를 안 받아 줬으면 여럿 죽어 나갔을 텐데. 너는 죽고 죽이는 싸움은 질색이라며?”
노덕은 물론이고 털보와 짝귀의 귀도 쫑긋 섰다. 보이진 않지만 밖의 고량과 차소영도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것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진천이 대웅의 질문에 답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 형이 그대로 백도방주를 상대하면 바람직한 결과를 얻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고 형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테니 틀림없이 생사투가 될 터이고, 그러면 두 사람 다 죽거나 회복 불능의 중상을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어떻게든 그런 불상사는 막고 싶었다. 그래서 개입한 거다.”
대웅이 짜증을 냈다.
“야, 네가 왜 끼어든 건지 물은 게 아니잖아? 막말로 그냥 뒀으면 최악의 경우라도 금강권만 피를 보면 끝날 일이었지만, 네가 나서는 바람에 자칫 잘못했으면 그가 구하고자 했던 여자는 물론이고 여기 노인네, 그리고 저치들도 모조리 황천길에 올랐을 거 아냐? 그러니까 최소한 네 사람의 목숨을 저당 잡고 도박한 이유가 뭐냐고 묻는 거잖아.”
진천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내가 앞에 나선 시점에서 내겐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하나는 백도방주에게 간청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를 압박하는 것이었다. 둘 다 사태를 수습할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나는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다. 그래서 백도방주에게 어떤 방식이 먹힐는지 고민했다. 그와 짧은 눈싸움을 벌이며 나는 그가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 직감했다. 그러고는 후자를 택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가 어떤 성향인데? 설마 나 같은 겁쟁……, 그게 아니고 지극히 신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냐?”
“나는 그와 똑같은 눈을 가진 이를 본 적이 있다, 대웅. 모두들 그를 흉포하고 잔악하기 이를 데 없는 야수로 알고 있었지만 생사의 경계에 임한 순간 발톱을 감추고 물러서더구나. 너와 고 형에게 들은 백도방주의 평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그와 비슷한 인물이리라 판단했다. 그래서 백도방주에게 다가간 거다. 여덟 걸음을 걷는 동안 내 직감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백도방주가 겁쟁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는 다만 잃을 게 많은 사람이기에 모험을 꺼려 했을 거다. 나는 그에게 일보를 내딛을 때마다 나를 상대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거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다행히 그가 양보한 덕분에 아무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끝났다.”
“너, 정말 무서운 인간이구나, 천. 그나저나 진짜 그 늙은이를 이길 자신이 있었던 거냐?”
“무림의 오랜 격언대로 붙어 보기 전엔 모른다. 일전에도 말했듯 나는 자신감이 아니라 당위성 때문에 나선 거다.”
“흥, 그래 너 잘났다. 어쨌거나 최상의 결과를 얻었으니 앞으로 무지하게 으스대겠군.”
“운이 좋았을 뿐이다. 네 지적처럼 승부수가 실패하면 애꿎은 피해를 볼 이들도 있었기에 내심 간을 졸였다.”
“솔직히 말해 봐라. 그런 경우에도 대책을 갖고 있었지?”
“대책까지는 아니고 일이 틀어지면 희생자를 최소화할 방도가 무엇일지 고심하긴 했다.”
“흥, 보나 마나 내 신세를 지려고 했겠지.”
“하하, 그래, 대웅. 네가 뒤를 든든히 받치고 있었기에 과감한 작전을 실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백도방주가 물러선 것도 따지고 보면 절반은 네 공이다. 네가 선보인 초절한 무공에 누구보다도 그가 더 놀랐을 테니까. 그는 필경 내 뒤에 버티고 선 너를 의식해 타협을 받아들였을 거다.”
“절반의 공이라니. 칠팔 할이지.”
“하하, 맞다. 다 네 덕분이다.”
“이게, 누굴 욕심쟁이로 아나. 칠팔 할이라니까.”
“그래, 그래. 칠 할로 하자.”
“그건 아니고, 팔 할.”
“칠 할 삼 푼.”
“칠 할 칠 푼.”
두 청년의 유치하고 유쾌한 실랑이에 마차 안과 밖에서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천과 고량은 삼보장 후원의 천년노송 옆에 놓인 바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차 소저는 좀 어떻소?”
“일 년하고도 백일이나 뇌옥에 갇혀 있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멀쩡하다. 타고난 강골인 데다, 반드시 구해 줄 거라는 내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운신이 어려운 상태에서도 혈도를 짚으면서 철저하게 관리를 했다더군. 그렇더라도 손가락 하나 까딱거리기 어려울 만큼 탈진지경이었는데, 너와 알게 된 과정과 오인결을 어떻게 성사시켰는지 다 듣고 나서야 잠들었다.”
“다행이군요.”
진천은 반 시진 전 고량의 처소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를 붙잡고 연신 감사 인사를 하던 차소영이 떠올랐다. 어지간한 사내보다 덩치가 컸지만, 가까이서 보니 꽤나 미인이었다. 자신을 잡은 그녀의 양손은 오랜 기간 수련을 하지 못했음에도 손바닥은 물론이고 손등까지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진천은 백도방이 고량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들은 고량이 황금을 구해 올 경우를 대비해 그녀의 단전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그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만약 그녀의 무공을 폐했다면 고량이라는 만만치 않은 강자와 원수지간이 되는 셈이니 백도방로서도 부담스러웠을 터였다.
진천은 엿새 전 바로 이 자리에서 들었던 고량과 차소영의 기이한 사연을 상기했다.
* * *
서로에 대한 순정을 간직한 채 헤어졌던 어린 연인들은 십팔 년이 지난 어느 날 엉뚱한 장소에서 다시 마주쳤다.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평생 단 한 번도 기루 출입을 한 적이 없었던 고량이 화월루(花月樓)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유력 가문 자제들과의 교제를 위해서였다.
수년간의 비무행을 통해 신흥 강호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지만, 고량은 필생의 숙원인 용호 입단에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몇 년간 그와 비슷한 무위의 경쟁자들이 용호에 뽑히는 걸 본 고량은 꿈을 이루기 위해선 무력만이 아니라 뒷배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하여 고량은 오대세가에 속하는 성주(盛州) 성가(成家)의 후예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열 살가량 어린 데다 무위의 격차 또한 상당했지만, 성가의 후기지수들은 고량을 호위무사 취급했다. 수모를 감내하며 그들의 비위를 맞추었지만 친분이 깊어지기는커녕 고량의 자괴감만 커져 갔다.
명사들만 드나들 수 있다는 특급 기루 화월루에 간 건 고량이 그들과 인연을 지속할 건지를 두고 마지막으로 시험해 보기로 결심했던 날이었다.
친구도 아니고 친위대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있던 고량은 그날 미희들을 옆에 끼고 질펀한 음주가무를 즐기는 성가의 청년 무인들과 동석하지 못하고 곁방에서 대기해야 했다. 노골적인 길들이기였다.
옷과 격식을 벗어던지고 저마다 날것 그대로의 본색을 드러내는 기루에서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확인한 고량은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뒤늦게 ‘융숭한 대접’을 떠벌리며 그를 붙잡으려 드는 성가의 피라미들을 뿌리친 고량은 화월루를 나가는 도중 오 층에서 운명의 여인과 조우했다.
도박장에서 험한 일을 처리하는 도차(賭叉)처럼 기루엔 궂은일을 담당하는 호화나찰(護花羅刹) 있었다. 화월루 같은 특급의 기루들은 사내 대신 여인이 그 역할을 맡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차소영은 화월루의 호화나찰이었다. 그날 오 층 복도에서 술과 약에 취해 기녀들에게 몹쓸 짓 하며 행패를 부리던 일당을 적수공권으로 제압하는 여인을 본 고량은 먼발치에서도 그녀가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소녀임을 알아차렸다. 엄청난 속도 탓에 팔이 서너 개로 보이는 현란한 환권은 그녀의 주특기였다.
차소영 역시 그녀 뒤로 다가온 근육질의 사내가 오래전 정인이 될 뻔했던 소년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다른 이들이 소란을 수습하는 와중에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은 어색한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과거와 현재를 탐색했다.
십팔 년 전과 다름없이 서툴렀지만 그때만큼 어리지는 않았기에 고량과 차소영은 서로가 홀몸이라는 것과 아직도 서로에 대한 호감이 남아 있음을 알고는, 그들로서는 놀라운 행위를 감행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상대에게 달려들어 포옹을 하며 입을 맞춘 것이었다. 나중에 둘 모두 그런 경험은 난생처음이었음을 알고는 감동이 배가되었다.
차소영은 고량을 떠난 후 단 한 번도 연애해 본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관심을 보이며 접근해 온 사내들이 숱하게 많았지만 자기 쪽에서 한사코 교제의 청을 거절했다는 그녀에게 고량이 이유를 묻자 차소영은 가슴속에 이미 정인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녀가 말하는 심중의 정인이 자신임을 깨달은 고량은 소스라쳤다. 그가 무공 수련에 전념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서른 살이 넘도록 그에게 추파를 던지는 각지의 미녀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까닭도 그러해서였다.
고량은 십팔 년 전의 그날 삼보장을 떠나가면서 몇 차례나 뒤돌아보며 그에게 원망스러운 눈빛을 던졌던 소녀의 얼굴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세월이 가면 엷어지기 마련인 그리움이 그녀의 경우엔 어찌 된 영문인지 갈수록 짙어졌고, 고량도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유일한 연정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한때는 주위의 이목을 피해 은밀히 그녀의 행방을 수소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부친인 팔비객 차유섭이 삼보장을 나가고 육 년 후 요량에서 신분이 불명확한 사파의 고수에게 걸려 비명횡사했다는 소문만 접했을 뿐, 차소영에 관해서는 소재는 고사하고 생사 여부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이삼 년을 주기로 서너 번 더 그녀를 찾기 위해 노력해 보았지만 매번 별무소득이었다. 그녀와의 인연이 현세에서는 이어지지 않을 거라 여기고 포기했던 차였기에, 고량으로서는 더욱 감격스러운 해후였다.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하기 위해서라도 두 남녀는 아낌없이 연정을 불태울 참이었다. 그들의 운명적인 사랑을 시샘하는 암운이 머리 위에 드리우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