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36
제35화
고량의 목소리가 엄숙해졌다.
“너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은덕을 입었다. 이제부터 나는 네가 자갈로 밥을 짓는대도 먹을 터이고 섶이 아니라 화약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들라고 해도 따를 것이다. 나는 기꺼이 네 충복이 되련다.”
진천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럴 필요 없소. 내가 원해서 한 일인데.”
고량이 사랑하는 여인을 보듯 진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이었으나 더 이상 평범하게 보이지 않았다.
“왜 나를 도와주었나? 창인에서 가볍지 않은 죄를 지었거니와, 너에겐 위험만 따를 뿐 아무 이득도 없는 일이었는데.”
진천이 정색했다.
“말했잖소? 고 형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나와 창인의 벗들이 기회를 주기로 한 건 고 형이 강호를 누비며 벌였다는 협행 때문이었소. 자고로 선업은 복을 부르는 법이오.”
“…….”
“그러니 나보다는 그 사실을 전해 주고 고 형의 선처를 간청한 노 대인에게 감사하는 게 어떻소? 대인이 아니었다면 고 형이 뇌옥을 나오기는 불가능했을 거요.”
“…….”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고량이 조각구름들이 돛단배처럼 떠다니는 천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진천은 가만히 기다렸다.
이윽고 무겁게 닫혀 있던 고량의 입이 열렸다.
“내가 열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뚱딴지같은 말에 진천이 처진 눈을 살짝 치뜨고는 내렸다.
“상행을 나가시기 전 나를 찾아온 아버지는 대뜸 실전 비무를 청하셨다.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피골이 상접했던 아버지와 손을 섞고 싶지 않았지만, 워낙 완강하게 요구하시는지라 어쩔 수 없이 비무에 나섰다. 아버지는 당신의 부상을 염려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 나를 엄히 꾸짖으셨다. 당신을 넘지 못하면 불효자식으로 간주할 거라는 말씀까지 하시면서.”
“그랬군요.”
“나는 놀랐다. 내가 성장한 이후 가장 약해 보이던 아버지는 그날 이전 어느 때보다 강력한 무위를 뽐내셨다. 나는 그분을 이기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야 했다. 오백여 초의 접전 끝에 간신히 아버지의 항복을 받아 낸 나는 탈진해서 쓰러졌다. 내 곁에 나란히 누운 아버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두 가지를 당부하시더구나.”
고량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진천은 ‘두 가지’가 뭔지 묻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잠시 후 고량이 말을 이었다.
“하나는 훗날 기필코 정맹의 용호가 되어 권문(拳門)의 일가를 이루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량이 말끝을 흐렸다. 진천은 뒷내용이 노덕과 관련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과연, 짐작은 옳았다.
“……노숙(盧叔)을 당신처럼 받들고 평생 은혜를 갚으라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음성이 전에 없이 비장했기에 나는 예감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감히 아버지께 새삼스러운 당부의 연유를 여쭙지 못했다.”
고량이 고개를 돌려 진천을 응시했다. 샘솟는 눈물을 억지로 누른 그의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나중에서야 그날의 말씀이 유언임을 알았다. 나는 둘 다 지키지 못했다. 전자는 능력이 부족해서. 후자는 도저히 그럴 수 없어서.”
“…….”
고량의 안광에 귀기가 서렸다.
“그들 부부는 각각 내 부모를 죽였다. 고백컨대 나는 지난 십여 년간 몇 번이나 그들에게 살의를 일으켰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아버지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내가 자라면서 두 사람에게 진 빚이 머리통만 한 혹처럼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진천은 노덕의 아내와 고량의 모친 사이에 있었을 비화가 궁금했으나 고량의 심사를 고려해 질문을 삼갔다. 대신 그를 격려했다.
“아직 선친의 유언을 지킬 시간은 충분하오, 고 형. 열심히 수련해 나와 함께 용호단에 듭시다. 정도를 걷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무위에 이르면 구차스럽게 문을 두드리지 않아도 그들이 알아서 찾아올 거요.”
진천은 노덕에 관해서는 말을 아꼈다. 고량이 진천의 팔뚝을 잡았다.
“내게 어떻게 이런 복운이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맹세컨대 나는 앞으로…….”
고량의 팔뚝을 맞잡으며 진천이 그의 입에서 부담스러운 선언이 나오는 것을 막았다.
“앞으로도 잘 지내 봅시다. 서로를 아끼고 도우며.”
마주 보고 선 두 사내의 동공에 우정의 싹이 돋았다.
* * *
달빛이 호젓했다.
진천은 후원으로 나갔다. 낮에 고량과 대화를 나누었던 너럭바위에 노덕이 앉아 있었다. 진천이 다가가자 노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맞았다.
“좀 눈을 붙이지 않고서. 자네도 많이 피곤할 터인데. 아까 나올 때 보니 대웅 군은 아직도 곯아떨어져 있더구먼.”
마차 안에서 흥분에 겨워 몇 번이나 승리의 장면을 되새김질하던 대웅은 삼보장에 돌아오자마자 진천에게 ‘호위’를 부탁하고는 실신하듯 잠에 빠졌다. 긴장 탓에 지난 엿새 동안 거의 수면을 취하지 못했으니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대인이야말로 좀 쉬시지요.”
“허허,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냥 머릿수만 채웠을 뿐인데.”
‘그렇지 않습니다.’라는 입에 발린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진천을 보며 노덕이 고소를 지었다.
“아무튼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일세.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지만, 나도 한편인지라 내내 간을 졸였다네. 솔직히 대웅 군이 나설 때만 하더라도 나는 절망적인 국면이라 보았네만…… 자네의 활약이 컸어. 단순히 큰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이었다고 해야 옳겠구먼.”
노덕의 예상대로 진천이 겸양지덕을 보였다.
“아닙니다, 대인. 우리 모두가 제 몫을 한 덕분입니다. 특히 대웅의 공이 지대했지요. 칠 할 오 푼이니 말입니다.”
진천이 덧붙인 농에 노덕이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러더니 별안간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내가 자네의 휴식을 방해한 것 같구먼. 월광을 감상하러 나오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괜히 나 때문에 이 야심한 시각에…….”
진천이 노덕의 넋두리를 끊었다.
“겸사겸사 나왔습니다. 저는 생각할 일이 있으면 산책을 하곤 합니다. 후원이 이렇게 넓고 아름다우니 사색하며 거닐기엔 딱 좋지 않습니까. 물론 대인을 만나 모처럼 담소를 나누고 싶은 기대도 가지긴 했습니다. 요 며칠간 오인결 준비로 대웅에게 매달려 있느라 대인과는 적조했잖습니까.”
노덕은 진천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같이 걸으면서 얘기를 나눔세.”
노덕의 무릎 상태가 걱정스러웠으나 이미 뱉은 말이 있는지라 착석을 권유치 못하고 진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소는 이른 봄꽃이 드문드문 피어난 화원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왕 이렇게 만난 김에 자네의 조언을 얻고 싶으이.”
“조언이라 하심은?”
“내 딸아이 말일세. 그날 현아를 본 이후 너무 심란해서 사업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네. 부끄럽지만 구휼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그 아이를 찾아가 용서해 줄 때까지 빌고 싶을 따름일세. 그런다고 용서받을 리 만무함을 알면서도.”
“그렇군요.”
“부디 쓴소리를 아끼지 말고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게나. 이번 오인결을 치르면서 나는 자네를 다시 보았네. 창인의 거친 사내들이 자네의 지시에 순응했던 까닭이 단지 자네가 그곳의 최강자라서가 아님을 비로소 깨달았네.”
“지시라니요. 저는 다만 부탁했고 아저씨들이 너그럽게 수용한 것뿐입니다.”
“아무렴. 어쨌든 그들이 자네의 힘보다는 덕과 지혜에 승복했으리라는 것이 내 판단일세. 허어, 자네는 온당한 금칠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구먼. 그렇게 얼굴이 붉어지면 내가 도리어 민망스럽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대인.”
“내가 할 말일세. 하지만 염치 불구하고 자네의 지혜를 빌리고 싶네. 절망의 늪에 빠져 있던 내 의질을 구해 주었듯, 나에게도 기사회생의 묘수를 알려 줄 수 없겠는가?”
“저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시는군요. 오인결은 운이 좋았을 뿐, 제겐 남들보다 뛰어난 지모 같은 건 없습니다. 허 노야께서도 늘 답답해하셨지요.”
“……그래도 좋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세. 자네는 나의 사정을 잘 알뿐더러 속이 깊으니 어떤 고언이라도 달게 받겠네.”
“꼭 그러시다면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마우이. 경청하겠네.”
걸음을 멈춘 진천은 에둘러 가지 않고 단도직입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게 어떨까요?”
노덕의 낯빛이 새파래졌다. 그의 반응을 기다리며 뜸을 들이던 진천은 서너 호흡 후에도 노덕이 입을 벌리지 않자 말을 이었다.
“좀 전에 용서라 하셨는데 제가 보기엔 용서가 아니라 이해를 구해야 할 문제일 듯싶습니다. 대인은 적어도 따님에겐 죄를 짓지 않았잖습니까.”
노덕이 급히 부인했다.
“아닐세. 전부 내 잘못일세.”
진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책임을 지고자 하는 대인의 마음은 알겠으나 그런 식으로는 매듭을 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전날 따님을 보았을 때, 저는 그녀의 냉담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느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긴 뭐하지만 그녀는 제 어머니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원(怨)과 한(恨)이 혼(魂)을 잠식한 상태가 아니라면 말이 통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렇던가.”
힘없이 대꾸하는 노덕의 음성은 안색만큼이나 음울했다. 진천은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고 있었다.
“따님을 얻고자 한다면 우선 그녀를 버려야 합니다. 진상을 알게 된 따님이 어떤 선택을 할지 저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차피 이대로는 그녀가 대인을 부친으로 인정할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
노덕의 암담한 심사를 헤아리면서도 진천은 좀 더 밀어붙였다.
“실은 시간이 촉박합니다, 대인. 그녀가 그날 던졌던 경고를 실행에 옮길 가능성이 농후하니까요. 설령 도화각을 앞세운 그녀의 공격을 무사히 받아 낸다고 해도 후유증이 상당할 겁니다.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관계 회복의 기회가 영영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노덕이 보름달 못지않은 광휘를 뿜어내는 반달을 올려다보았다. 진천도 노덕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서늘한 바람이 노소의 뺨을 훑고 지나갔다. 진천에게 고개를 돌린 노덕이 들릴락 말락 나지막이 말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게나.”
진천이 즉시 응답했다.
“물론입니다.”
* * *
우직끈.
대웅의 쇠몽둥이에 맞은 거목이 수숫대처럼 부러져 나갔다. 진천은 황급히 물러섰다.
“조심해야지, 대웅. 나무들을 상하게 하면 안 돼.”
진천이 주의를 주자 대웅이 투덜거렸다.
“제길, 이렇게 넓은데 마음 놓고 수련할 공간이 없다니.”
진천은 쓰게 웃었다. 기실 대웅은 불만을 표할 자격이 없었다. 멀쩡한 연무장을 두고 두 사람이 삼보장의 담장 역할을 하는 숲에서 비무를 펼치는 연유는 대웅이 먼 고루거각의 눈들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참나무와 대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의 가장자리는 외부의 시야에서는 완벽한 사각지대였다.
대웅은 삼백 평 넓이의 창고를 비무장으로 쓰기를 원했다. 비어 있는 데다 석조 건물이었기에 비무 장소로 활용할 수 있었지만, 파손의 위험성을 들어 진천이 반대했다. 대웅은 볼이 부었지만 진천의 뜻을 거스르지는 않았다.
진천이 대웅을 달랬다.
“여유가 생기면 와옥 뒤편에 지하 연무장을 만들자, 대웅.”
“쳇, 어느 세월에.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돌아다니며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할 노인네가 나흘이 지나도록 방에 틀어박혀 도통 나올 생각을 안 하는데. 그렇다고 우리가 체면 빠지게 자금을 조달하러 나갈 수는 없잖아. 대체 뭔 거창한 사업을 구상하기에…… 어럽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드디어 나타나셨군.”
손님들이 묵는 별채 귀퉁이를 빠져나온 노덕이 두 청년에게로 걸어왔다. 장기간의 여행을 마치고 막 돌아온 이처럼 초췌한 몰골이었다.
“그래, 일확천금의 묘안이라도 쥐어짰소, 노인네?”
대웅이 느물거렸다. 그의 질문을 묵살하고 노덕이 진천을 응시했다.
“자네 충고에 따르겠네.”
진천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행동에 나서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