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37
제36화
버드나무 가지가 휘장처럼 늘어진 갓길은 묘화산(妙華山)으로 향하는 상춘객들로 붐볐다.
진천 일행은 인파를 역으로 거슬러 갔다. 그들의 목적지는 주안 외곽이 아니라 도심에 있었다.
대웅이 구시렁거렸다.
“빌어먹을, 이렇게 다르게 생겼는데 구별을 못 하다니.”
대로를 달리는 마차가 일으킨 흙먼지 때문에 그가 열이 받았을 거라 여겼던 노덕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린가?”
“저 작자들이 떠드는 소리가 안 들리오, 노인네?”
“허허, 내가 자네처럼 오 장 밖의 개미들이 싸우는 미음(微音)까지 포착해 내는 절정의 무인은 아니지 않은가?”
“흥, 편리하군.”
듣다 못한 진천이 노덕에게 설명해 주었다.
“몇몇 사람들이 저와 대웅을 두고 누가 하남신룡인지 언쟁을 벌이는군요.”
노덕은 그제야 이해했다.
반년 동안 종적이 묘연했던 삼보장주가 열흘 전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은 이미 주안 전역에 알려져 있었다. 세인들은 삼보장주의 귀환보다 그가 달고 온 청년들에 관해 더욱 관심을 보였다. 그중 한 명이 근래 강호를 떠들썩하게 만든 하남신룡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었다.
대웅이 진천에게 따졌다.
“근데 어째서 나한텐 아직 별호가 붙지 않았지? 금세 생길 거라며?”
진천이 입을 열기 전에 노덕이 답했다.
“백도방과의 오인결은 비밀에 붙이기로 하지 않았나. 위신이 걸려 있으니 백도방주는 그날의 상황에 대해서 발설하지 못하도록 방도들에게 엄격하게 입단속을 했을 걸세. 유감스럽지만 자네의 활약상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을 공산이…….”
드물게 인내심을 발휘하던 대웅이 기어이 노덕의 말을 끊고 들어갔다.
“천이 얘기하곤 다른데, 노인네? 누가 맞고 누가 틀린 거야? 물론 내기를 하라면, 나는 천이 쪽에 돈을 걸겠지만.”
노덕이 진천을 보았다. 진천이 머리를 긁적였다.
“저는 백도방주가 함구령을 내리지 않으리라 보았습니다, 대인. 백도사흉이나 방도들은 방주의 명 때문이 아니라 알아서 입조심을 하고 있을 듯싶습니다. 하지만 자발적인 침묵의 벽은 조만간 금이 갈 터이고 그러면 대웅의 무명(武名)도 널리 알려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진천에게 추론의 근거를 물어보려던 노덕은 뒤늦게 스스로 알아차렸다. 오인결이 있던 날, 무연곡에 모인 이들은 백도방과 삼보장의 인물들뿐만이 아니었다. 털보와 짝귀가 있지 않았던가.
“오 방주가 ‘그들’을 내버려 둔 건 애당초 소문의 둑을 막을 의사가 없다는 뜻이었군.”
노덕이 중얼거리자 진천은 미소를 짓고 대웅은 반사적으로 ‘그들이 누구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노덕이 동문서답했다.
“자네에게 어떤 별호가 붙을지 궁금하구먼. 광객을 일 초에 꺾었으니 ‘무적신룡’이나 ‘절대신룡’ 같은…….”
이번에도 노덕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대웅이 도중에 잘라먹었다.
“뭣 좀 아는군, 노인네. 하지만 나도 양심이 있다고. 천이한테 졌으니 무적은 좀 그렇고 뒤의 것으로 하지.”
제멋대로 별호를 결정한 대웅이 의기양양했다. 진천과 노덕은 몰래 쓴웃음을 교환했다.
* * *
주안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주안표국의 정문은 마차 다섯 대가 동시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제법 장사가 잘되는 모양이군.”
대웅의 감상에 노덕이 쓰게 웃었다. 무림의 현황에 대해서는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한 대웅이지만 상계에 관해서는 정보가 빈약했다.
“주안이 중원 중북부를 대표하는 상도(商都)이듯 주안표국은 중원을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형 표국일세. 일급 표사가 오륙십에 표두도 일곱이나 된다네. 무림방파는 아니지만 주안의 지배자나 다름없네.”
“흥, 내 집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야.”
“허허, 물론일세. 주안표국이 대단하다 한들 어찌 사파칠문 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벽력도문(霹靂刀門)에 비하겠는가.”
노덕의 음성엔 한줌의 조롱기도 없었다. 하지만 대웅이 씩씩거렸다.
“목소리 낮춰, 노인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아니, 아예 입도 벙긋하지 마. 벽력의 벽자도 꺼내지 말라고.”
“알았네. 미안하네.”
진천이 대웅의 팔을 툭 쳤다. 대웅이 마지못해 분기를 누그러뜨렸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대인.”
진천의 재촉에 노덕이 고대 왕국의 성문 같은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천과 대웅이 호위무사들인 양 뒤에서 그를 따랐다.
경비 무사들은 노덕을 알아보았고 보고를 받은 표국주는 즉시 사람을 보내 진천 일행을 안으로 들였다.
광장을 가로지른 일행은 꼭대기에 삼각뿔 모양의 탑이 솟은 오 층 석조 건물에 들어섰다. 기다란 회랑을 지나자 정병(精兵)들이 도열한 듯 질서 정연하게 늘어선 문들이 나왔다. 일행을 안내해 온 이가 첫 번째 문을 가리키자 대웅이 성큼성큼 다가가 스스럼없이 방문을 열었다.
구조를 보아하니 응접실인 듯했다. 일백 평 남짓한 넓이에 묘화산의 춘하추동을 담은 산수화가 사방의 벽에 걸려 있었다. 은은한 자줏빛을 띤 가구들이며 이곳저곳에 배치한 장식품들이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입구에 홍안백발(紅顔白髮)의 노인이 서 있었다. 주안표국의 주인인 지찬주일 터였다.
진천은 노덕에게서 들은 지찬주의 신상명세를 상기했다.
지찬주는 주안표국의 전(前)국주인 지환승(池煥承)의 양자였다.
정실부인 외 일곱 명의 첩을 두었음에도 슬하에 자식이 없었던 지환승은 친척들 가운데 싹수가 보이는 젊은이 넷을 골라 후계자 경쟁을 시켰다. 여러 차례 중요한 거래를 성사시키고 어려운 표행에 성공하며 일찍이 두각을 드러낸 지찬주는 마흔의 나이에 공식적으로 주안표국을 이어받았다.
그로부터 삼십 년간 주안표국은 전례 없는 성세를 구가했다. 지찬주 자신도 상당한 수완가였지만, 욱일승천의 기세로 성장하던 삼보장과의 상부상조가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삼보장은 자체적으로 상단을 운영했음에도 상행의 대부분을 주안표국에 맡겼다. 지찬주가 삼보장주 노덕과 막역한 사이가 된 덕분이었다.
지찬주는 십칠 년 전 구원산맥에서 비명횡사한 주안철권 고숭과 더불어 주안의 일인자를 다투던 무인이기도 했다. 비록 절정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의 무위는 일류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평가받았다.
* * *
“오랜만일세, 노 장주.”
지찬주가 대웅에 이어 방으로 들어선 노덕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노덕이 아니라 그 뒤의 진천에게 꽂혀 있었다. 노덕의 응답이 나오기도 전에 지찬주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귀빈을 모시고 왔군.”
진천이 포권을 하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진천이라고 합니다.”
지찬주의 백미가 꿈틀거렸다. 진천의 공손한 태도에 놀란 모양이었다.
“어서 오시게. 노부는 이곳의 국주인 지 모(某)요. 강호에 위명이 자자한 신성이 본국을 찾아주다니, 영광이오.”
대웅이 뒤질세라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대웅이야.”
지찬주는 이름을 밝히는 말라깽이 청년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의 노골적인 무시에 대웅이 골을 낼 기색이자 진천이 친우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대웅은 여느 때처럼 진천의 제지에 순응했다.
노덕이 뒤늦게 지찬주의 인사를 받았다.
“정말 오랜만일세, 지 국주. 일 년도 넘었구먼. ‘그날’ 이후로 처음 만났으니.”
노덕이 제 입으로 ‘그날’을 언급하자 지찬주의 대춧빛 얼굴이 더 붉어졌다. 노덕의 의도를 탐색하려는 듯 지찬주가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을 게슴츠레 떴다. 노덕은 본론으로 직행했다.
“염치없지만 자네에게 몇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네.”
노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찬주가 등을 돌렸다.
“일단 앉지.”
세 사람은 지찬주를 따라 탁자로 향했다. 진천에게 착석을 권한 지찬주는 맞은편 의자에 대웅이 먼저 엉덩이를 붙이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진천의 낯을 살피고는 천둥벌거숭이처럼 행동하는 해골 청년을 내버려 두었다.
모두가 착석하자, 노덕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 * *
노덕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지찬주의 표정은 시종여일 변동이 없었다. 중간에 끼어들지도 않고 묵묵히 귀만 기울이던 지찬주는 노덕이 마무리를 짓고서야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거두절미하고 솔직히 말하지. 나는 방금 자네가 들려준 이야기를 믿지 못하겠네.”
대번에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아는 내용을 듣고 있기가 지겨운지 진즉 자리에서 일어나 실내를 배회하며 주인의 허락 없이 함부로 물건들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대웅이 촐랑거리며 탁자로 돌아왔다. 그가 말을 쏟아내기 전에 진천이 선수를 쳤다.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진천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지찬주가 그의 질문에 답했다.
“나는 여기 노 장주는 물론이고 그의 처인 전(全) 부인과도 오랫동안 알고 지냈소. 단지 안면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두 사람 모두와 꽤 친분이 두터웠소. 작년 겨울 전 부인이 소수의 명사들을 거처로 불러 비사를 털어놓았을 때 나도 그 자리에 있었소. 이야기를 마친 그녀가 혀를 깨물어 자진하는 모습을 코앞에서 목도하고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소.
만약 노 장주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는 뜻인데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소. 노 장주가 모두의 존경을 받던 부호였듯, 주안일미도 현숙함의 표본 같은 여인이었소. 피를 토하듯 절절했던 음성과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까지 버렸던 비장함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오. 내 어찌 그녀를 의심할 수 있겠소?”
대웅이 혀를 찼다.
“츳, 신용이 형편없군, 노인네.”
대웅의 불경스러운 언사에 지찬주가 굵직한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진천이 없었으면 당장 호통을 쳤을 터였다.
노덕이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렸다.
“면목이 없네, 지 국주.”
노덕에게로 눈을 돌린 지찬주가 냉랭한 눈빛을 쏘아냈다.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저의가 뭔가, 노 장주? 변명이든 해명이든 그날 했어야지.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잖은가? 그날은 전적으로 시인해 놓고 지금에서야 전혀 다른 진상이 있었다고 주장하면 누가 받아들이겠는가? 나뿐만이 아니라 그날 모였던 이들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걸세.”
“나는, 나는…….”
“아직도 할 말이 남았는가? 나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네만.”
노골적인 축객령에 대웅이 분통을 터뜨렸다.
“제길, 엄청 친하다고 하더니 말짱 헛소리였군. 차 한 잔 대접하지 않고 쫓아내려 들다니 뭐 이리 인심이 야박해. 내가 노인네라면 저런 친구는…….”
지찬주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닥쳐라, 이놈. 하남신룡의 친인인 듯해 방관했으나 네놈의 막돼먹은 언동을 더는 묵과하지 않겠다.”
맹호 같은 지찬주의 기세에 대웅이 움찔했다. 대웅의 반발 가능성을 우려한 진천이 꼬챙이처럼 야윈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진정하시지요. 이 친구의 무례는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대웅을 노려본 지찬주가 못 이긴 척 다시 착석했다. 기가 꺾여 풀이 죽은 대웅을 옆에 끌어다 앉힌 진천이 지찬주를 응시하며 질문을 던졌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두 개의 상반된 이야기 중 어느 것이 옳은지는 누구도 절대적 확신을 가지고 판정할 수 없지 않습니까? 고인이 되신 주안철권 고 대협을 제외하면 당사자들만 아는 비화이니 말입니다.”
지찬주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즉답했다.
“그날 노 장주는 자신의 죄상에 대해 순순히 시인했을 뿐만 아니라, 모두의 면전에서 전 부인에게 사과까지 했소. 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소? 그날 그녀가 노 장주의 선처를 간곡히 청하지 않았다면 도화각의 여(呂) 각주가 그 자리에서 즉참했을 거외다.”
진천은 바로 반박하지 않고 자중했다.
목전의 노인이 보이는 완강함이 단지 주안일미 전하연의 주도면밀한 모함에 현혹된 결과만은 아님을 직감해서였다. 분명 무언가 다른 원인이 있었다.
황태가 끼어 누리끼리한 빛이 감도는 지찬주의 동공을 직시하며 진천은 일단 응수타진을 할지 아니면 곧장 승부수를 띄울지를 두고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