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38
제37화
진천은 전자를 택했다.
“그 얘기와는 별개로 만약 노 대인이 지 국주께 재기를 위한 자금을 빌려 달라고 부탁한다면 어쩌시렵니까?”
진천의 의도와 달리 지찬주는 이 질문을 승부수로 받아들였다.
지찬주는 형세 판단을 했다. 결국 이 싸움은 노덕과 노미현 부녀가 내세운 하남신룡과 도화각주의 대결로 판가름될 것이었다. 누가 우세할 것인가.
미래를 내다본다면 당연히 하남신룡 쪽이 월등했다.
그가 꺾은 하남편봉은 사벌의 사령인 흑창을 물리침으로써 포성 무림 대회에서의 우승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입증한 신진 강호였다. 무인 간의 상성이 있다지만 장차 천하십대고수에 들 거라 만인이 인정하던 소후(小后)를 이겼으니, 하남신룡 역시 먼 훗날 무림을 대표하는 절대강자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남신룡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현명한 선택임은 삼척동자도 알 일이었다.
그럼에도 지찬주는 도화각주에게 운을 걸기로 작심했다. 현재의 무위만 놓고 보자면 하남신룡보다는 도화각주가 한 수 위라고 보아야 했다. 노미현은 결코 부친을 옹호하는 하남신룡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고, 그녀의 부추김을 받은 도화각주는 틀림없이 손을 쓸 것이었다.
지찬주가 믿는 패는 도화각주만이 아니었다. 삼보장의 막대한 재산을 삼등분해 하나를 차지한 백도방 또한 괜한 짓을 벌이려는 하남신룡과 척을 질 게 분명했다.
도화각주 여상구에 백도방주 오재현이라면 제아무리 하남신룡이 무림의 초신성이라도 역불급일 터였다.
저울질을 마친 지찬주는 부담스러운 젊은 용 대신 만만한 삼보장주를 상대했다.
“내게 한다던 부탁이 그것이었나, 노 장주? 아직도 모르겠는가? 우리 사이의 정리(情理)는 그날 그 자리에서 끝났음을.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 했는데 나는 인면수심의 악종인지도 모르고 자네를 벗으로 두었던 세월이 통탄스러울 뿐일세.”
창백해진 노덕의 면상을 노려보며 지찬주가 몸을 일으켰다.
“이만 나가 주게나. 다시는 자네를 볼 일이 없을 걸세.”
진천이 말릴 새도 없이 대웅이 벌떡 일어서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구 맘대로. 너는 다시 노인네를 보게 될 거야, 늙은이. 그땐 노인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좀 전에 지껄인 개소리를 용서해 달라고 싹싹 빌걸. 하지만 국물도 없을 줄 알아. 노인네는 봐줘도 나는 안 봐줄 거니까. 아니, 나중에 볼 것 없이 이 자리에서 끝장을 볼까?”
지찬주의 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노여움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었다.
방금 전 그의 호통 한 방에 시모 앞의 새색시처럼 위축되었던 말라깽이가 지금은 태산 같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름 고수임을 자처하는 지찬주로서도 감당키 어려운 외기(外氣)였다.
지찬주는 간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잘못된 형세 판단을 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일수불퇴였다. 이제 와서 되 물리려 한들 받아 줄 리가 없었다.
“그만해라, 대웅.”
당장이라도 쇠몽둥이를 빼 들 기세였던 대웅이 진천의 말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싹싹하게 내기를 갈무리하자 지찬주는 황망한 중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죄송합니다. 이 친구는 흥분하면 말이 과해지는 버릇이 있습니다.”
진천의 사과에 지찬주는 대꾸도 못 하고 눈만 끔벅거렸다.
“국주의 의사는 잘 알겠습니다. 사전 통보도 없이 불쑥 찾아왔는데 면담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이상의 대화를 원치 않는 듯하니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예의를 잃지 않았지만 진천의 음성은 차가웠다. 지찬주는 불청객들을 붙들고 실책을 만회하고 싶었으나 왕방울처럼 큼직한 눈을 위협적으로 부라리는 말라깽이의 서슬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진천과 대웅, 그리고 노덕은 못 박힌 듯 선 지찬주를 뒤로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지찬주는 문이 닫히고서야 참았던 날숨을 내쉬었다.
* * *
오 층 건물을 나오자마자 대웅이 변명하듯 말했다.
“내 잘못이 아냐. 그 늙은이가 먼저 심한 소리를 했잖아. 나한테는 닥치라는 둥, 막돼먹었다는 둥…… 그러고 노인네한테는 인면수심이니 악종이니 하면서.”
진천이 대웅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했다, 대웅. 속이 후련하더라.”
대웅이 어리둥절해했다.
“어? 잔소리할 줄 알았더니?”
“네가 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의 험언에 대해 항의할 참이었다. 너처럼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쏟아 내진 않았을 테지만. 하여간 그 상황에서는 나보다는 네 방식이 더 나았다.”
대웅은 우쭐했다.
“그렇지? 나한테 고마운 줄 아쇼, 노인네.”
유일하게 편이 되어 줄 거라 믿었던 친우의 박대에 상처를 입은 노덕은 여전히 음울한 얼굴이었다. 진천은 섣부른 위로를 삼갔다.
대웅이 노덕의 심상에 개의치 않고 아픈 곳을 찔렀다.
“어째서 그런 작자를 친구로 뒀소, 노인네?”
노덕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를 탓하지 말게나. 모두 내 부덕의 소치일세.”
“제길, 소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권세가 있을 때 부리는 겸양은 멋이라도 있지. 지금 노인네 꼴은 딱 비루먹은 망아지나 병든 닭이 천리마나 매에게…….”
진천이 대웅의 과언을 막았다.
“그쯤 해라, 대웅.”
노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대웅 군의 말이 맞네. 그나저나 시작부터 계획이 어긋났으니 난감하구먼.”
“괘념치 마십시오. 이제 하나의 벽을 두드렸을 뿐입니다. 저는 기실 지 국주가 대인의 회상을 듣고 있을 때부터 오늘의 일이 잘 풀리지 않으리라 보았습니다. 그의 태도엔 석연치 않은 바가 있었습니다. 혹시 삼보장의 파산으로 주안표국이 이득을 보지는 않았습니까?”
“나는 그날 이후 폐인이 되어 주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네. 하지만 주안표국이 삼보장의 재산을 일부라도 취했으리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듯싶구먼.”
“그렇다면 지 국주의 입장에서는 대인의 귀환과 재기의 의사 표명이 달가울 리 없었겠군요.”
대웅이 끼어들었다.
“쳇, 누가 주판알을 튕겨 보고 이득이 있으면 제 누이도 팔아 치운다는 상인 나부랭이 아니랄까 봐. 나나 너 같은 무인이라면 그깟 보화 따위보다 우정을 훨씬 귀하게 여겼을 텐데. 안 그래, 천?”
표국은 무림과 상계 양측으로 동시에 발을 걸친 특이한 조직. 따라서 지찬주는 무인이자 상인이었기에 대웅의 비난은 어폐가 있었으나, 진천은 다른 문제를 지적했다.
“그렇게 특정한 대상을 한 묶음으로 취급하는 건 위험한 발상이다, 대웅. 상인이든 무인이든 다 인간일 뿐이다. 어느 분야건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법이다.”
대웅이 발끈했다.
“나는 우정과 신의의 중요성을 강조한 거야. 네 맘대로 곡해하지 마.”
“그래, 그래.”
진천이 한발 물러섰다. 한가하게 대웅과 논쟁을 벌이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긴급히 행해야 할 일이 있었다.
“봉천(鳳川)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시겠습니까, 대인?”
진천의 요청을 받는 순간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노덕이 꿀꺽, 침을 삼켰다.
* * *
서쪽으로 기울던 해가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입을 맞추자 사위가 일시에 어둑해졌다.
진천은 서둘렀다. 완전히 어둠이 내리기 전에 도화각(桃花閣)에 이르고 싶었다.
주안표국주는 필시 오후에 있었던 일을 노미현에게 알리려 할 것이었다. 진천은 그의 서찰을 품은 심부름꾼이 그녀에게 이르기에 앞서 그녀와 담판을 짓고자 했다. 이쪽의 패를 미리 본다면 그녀는 마음을 정리할 터이고, 그러한 상태에선 어떤 설득도 통하지 않을 공산이 매우 컸다.
이른 감이 없지 않았으나 진천은 승부를 걸어야 할 시점이라 판단했다. 그녀가 준비되기 전에 흔들어야 그나마 승산이 있었다. 노덕이 난색을 표했음에도 진천이 봉천 행을 고집한 이유였다.
봉천으로 가는 길은 간단했다. 워낙 교류가 많았기에 주안과 봉천 사이엔 네 갈래나 되는 대로가 뚫려 있었다. 하지만 진천은 그중 어느 경로도 택하지 않고 인적이 없는 산길을 따라 달렸다. 마차들로 바글거리는 대로에서 경공을 펼치기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전력으로 경신을 전개한 덕분에 표국을 떠난 지 한 시진도 안 돼 주안에서 남동으로 일백오십 리 떨어진 봉천에 이른 진천은 도화각으로 직행했다. 굳이 행인들에게 도화각의 위치를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도화각은 ‘환락의 도시’라는 별칭을 지닌 봉천의 중앙에 봉우리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진천은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삼십삼 층의 높이를 자랑하는 도화각은 바로 아래에서는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했다. 외관도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거대한 건물 내부의 층층마다 야릇한 기음과 교성이 새어 나왔다. 얼굴을 붉히며 진천은 수십 개의 출입구 중 한 곳으로 접근했다. 거지 행색과 별반 차이가 없는 그가 다가가자 늘씬한 몸매를 훤히 드러내는 백색 경장 차림의 두 여인이 앞을 가로막았다.
시간 낭비를 꺼린 진천은 바로 신분과 용건을 밝혔다.
“나는 하남신룡 진천이오. 삼보장주 노 대인의 영애를 보러 왔소. 안내를 부탁하오.”
불문곡직 거지의 팔을 꺾어 혼쭐을 내줄 심산이었던 호화나찰들은 그의 별호를 듣고는 일순 몸이 굳었다.
“정말 하남신룡인가요?”
둘 중 연장자로 보이는 여인이 물었다.
“그렇소.”
진천은 슬쩍 내기를 흘렸다.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기운이었으나, 여인들은 강풍을 맞은 갈대처럼 휘청거렸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여인들이 진천을 두고 허둥지둥 도화각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조용한 소요가 일더니, 잠시 후 염소수염을 한 오십 대 중년인이 나왔다. 진천을 유심히 살펴보다 황급히 허리를 반으로 접은 염소수염이 방금 전 여인들이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 *
기다림은 짧았다.
도화각이 아니라 바깥 어디론가 뛰어나갔던 염소수염은 반 각도 지나지 않아 숨을 헐떡거리며 돌아왔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제가 각주께 모시겠습니다.”
만나기를 청한 이는 노미현이었지만, 진천은 잠자코 염소수염을 따랐다. 그녀가 도화각주를 대동하리라는 건 각오했던 바였다.
대로를 벗어나 후미진 골목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던 염소수염이 호화찬란한 봉천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담한 장원으로 진천을 이끌었다. 열린 대문을 가리키며 염소수염이 말했다.
“안에 각주가 계십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진천의 감사 인사에 염소수염은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에게 미소를 던지고는 진천이 천천히 대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지나자 이백 평가량 되는 마당과 단층 와옥이 나왔다.
진천은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런 마의(麻衣)를 입은 이가 화단에 무릎을 꿇고는 꽃들을 손보고 있었다. 진천의 처진 눈꼬리가 올라갔다. 그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지만 마의인의 자세는 빈틈이 없었다. 진천은 허름한 의복에도 불구하고 그가 도화각주일 거라 결론 내렸다.
“저는 진천이라고 합니다.”
귀를 먹은 듯 마의인은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진천은 뒷말을 보태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일다경이 지난 후에야 마의인이 꽃밭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흙 묻은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진천에게로 돌아섰다.
“손님이 왔는데 딴청을 피워서 미안하네. 하지만 하던 일을 끝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성미인지라. 넓은 이해 부탁하네.”
진천의 눈가에 엷은 경련이 일었다. 한 줄기 굵은 주름이 이마를 가로지르긴 했지만 마의인은 일견 서른 살 전후로 보였다. 도화각주 여상구는 그 두 배인 환갑을 넘겼다지 않은가. 그러나 말투와 태도로 보건대 그가 도화각주가 아닐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기실 진천이 놀란 까닭은 지나치리만치 젊어 보이는 도화각주의 외관 때문이 아니었다. 진천은 그의 안광에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마치 송곳에 눈을 찔린 듯 섬뜩한 느낌이었다.
진천의 본능이 강렬한 경고 신호를 보냈다. 목전의 인물은 위험한 자였다. 매우 위험한 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