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39
제38화
해가 완전히 떨어졌는지 하늘이 봉천의 고루거각들에서 발산된 빛을 받아 완연한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도화각주 여상구와 사오 장을 격하고 선 진천은 그가 쏘아 내는 강력하면서도 예리한 경기를 묵묵히 받아 내며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여상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어린 나이에 대단하구나.”
무엇이 대단하다는 건지 몰랐지만 요혈을 찔러 오던 기운이 일시에 사라지자 진천도 전신에 끌어 올렸던 내공을 풀었다. 하지만 긴장은 그대로였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여상구가 구사한 무형지기의 수준은 백도방주 오재현을 능가했다. 진천은 둘 중 후자가 약간이나마 강할 거라는 세간의 평가가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누가 진짜 상수일지는 강호의 격언대로 실제로 붙어 봐야 판명되겠지만, 풍기는 위압감과 음험함에서 여상구는 확실히 오재현보다 한 길 위였다.
“나에 관해 들어보았다면 알 테지만, 나는 비무를 극히 꺼리는 위인이라네. 하지만 오늘은 기꺼이 받아 주지. 자네의 진신 무력이 그 평정심에 준하는지 궁금하군.”
진천은 여상구가 그의 방문 목적을 오해했음을 알아차렸다.
“저는 각주께 비무를 청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삼보장주 노 대인의 영애를 보러 왔습니다. 처음부터 밝혔습니다만.”
여상구가 쭉 뻗은 검미를 치켜올렸다.
“허어, 아이들이 거물의 출현에 심히 당황했던 모양이군. 그 기본적인 사항을 빠뜨리다니. 미안하네. 자네가 하남편봉에 이어 나를 입신양명의 제물로 삼으러 온 거라 지레짐작하고는 추태를 부렸네 그려.”
“아닙니다.”
여상구가 진천에게로 걸어왔다. 진천도 앞으로 나아갔다. 손을 내밀면 닿을 거리에서 멈춘 두 사람은 잠시 서로의 면상을 감상했다. 여상구는 엄청난 동안일 뿐만 아니라 상당한 미남자였다. 흉터처럼 이마를 가로지른 일자 주름이 유일한 옥에 티였다.
여인의 것처럼 섬세하고 붉은 여상구의 입술이 벌어졌다.
“나는 여상구라네. 도화각의 허울뿐인 주일일세.”
진천은 다시 자기소개를 했다.
“진천이라고 합니다. 하남 무림에서 왔습니다.”
여상구가 짓궂게 캐물었다.
“하남 무림도 상하 이천 리에 좌우가 칠팔천 리에 달하는 방대한 지역이 아닌가. 개중 어디인가?”
잠시 망설이던 진천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창인입니다.”
여상구의 검미가 이마로 치솟았다.
“일명 ‘도망자들의 땅’이라는 그 창인 말인가?”
“그렇습니다.”
“허, 놀랍군. 혹시 사문을 물어도 되겠는가?”
“…….”
진천의 침묵을 수용한 여상구가 화제를 바꾸었다.
“초면에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군. 그런데 현아는 어인 일로 보러 왔나? 설마 전날 삼보장에서 그 아이에게 첫눈에 반하고는 불면의 밤들을 보내다 도저히 참지 못해 찾아온 건가?”
여상구의 농담에 진천이 낯을 붉혔다.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거듭 부인하는 진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상구가 대소를 터뜨렸다.
“자넨 숙성된 평정심에 어울리지 않게 순진한 구석이 있군. 현아에게서 독특한 사내라고 들었는데 그 아이의 안목도 제법일세 그려.”
진천은 노미현을 ‘그 아이’라고 칭하는 여상구의 언사에 위화감이 들었다. 나이 차가 난다고는 하나 연인 관계에 있는 여인을 ‘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상했다. 하지만 그가 참견할 문제는 아닌지라 바로 용건으로 들어갔다.
“노 대인과 관련하여 그녀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여상구가 안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무슨 얘기?”
“노 대인 부부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가 모친에게서 들었던 것과 사뭇 다른 내용입니다.”
여상구의 동공에서 불길이 일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현아는 지금 봉천에 없네. 하지만 늦어도 술시(戌時)까지는 돌아올 걸세. 그동안 내가 먼저 그 이야기를 들었으면 하네만.”
진천은 즉각 여상구의 요구에 응했다.
“알겠습니다.”
* * *
여상구가 와옥으로 들이지 않았기에 진천은 마당에 선 채로 말을 쏟아 내야 했다.
한 시진 전 노덕이 주안표국주에게 자신의 사연을 들려주었을 때보다 시간을 두 배나 잡아먹었다. 여상구가 진천이 노덕을 만나 인연을 맺은 과정을 상세하게 듣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진천은 그러리라 예측하고 진즉 출신지를 토설한 것이었다.
여상구는 어느 시점부터 노덕이 고백한 비화(秘話)의 진위 여부보다는 진천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러니까 자넨 노 장주를 믿고 그를 돕기 위해 중원으로 나왔단 말이지? 정맹의 용호가 되라던 자네 모친의 원도 들어줄 겸.”
“그렇습니다.”
“어느 쪽이 우선순위인가?”
“딱히 순서를 정하진 않았습니다. 그때그때 닥친 일을 풀어 나갈 따름입니다.”
“그런데 노 장주가 자기를 편들다가 나나 백도방주와 충돌할 거라는 얘기는 하지 않던가?”
“당연히 그런 우려를 하셨습니다.”
“하면 자네는 우리 둘쯤은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다고 여겼던 건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세상 사람에게 진상을 알리고 노 대인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다 다칠 수 있는대도? 자네에겐 이득보다는 위험이 훨씬 크지 않은가?”
“무릇 일을 행함에 있어 손익을 따지기보다는 옳고 그름을 헤아리라고 배웠습니다.”
“훌륭한 사부를 두었네 그려. 너도나도 패권을 추구하는 시대인지라 요새는 골수 정파에서도 그런 고리타분한 가르침을 전하는 인물이 극히 드문데 누군지 정말 궁금하군.”
“…….”
진천을 노려보듯 쳐다보던 여상구가 돌연 등을 돌렸다.
“따라오게.”
진천은 그의 발길이 와옥이 아니라 화원 쪽으로 향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천을 뒤에 두고서 여상구가 뚱딴지같은 질문을 던졌다.
“바둑 둘 줄 아나, 자네?”
“방법은 알지만 형편없는 수준입니다. 제 고향의 허 노야란 어른에게 다섯 점을 깔아도 이기지 못합니다. 허 노야도 중원에 가면 당신을 넉 점 접어 주는 고수들이 수두룩하다고 하더군요.”
“아쉽군. 수담을 나누고 싶었는데. 술은?”
“때때로 마시기는 하나 즐기지는 않습니다.”
“그거 유감이군. 뭐니 뭐니 해도 낯선 이들이 친해지는 데는 술만 한 게 없거든. 도박은 어떤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화원가의 우물에 이른 여상구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진천에게 질문들의 의도를 밝혔다.
“바둑과 술과 도박은 어떤 이의 본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도구일세. 아, 미인도 빠뜨리면 섭섭하겠군. 아름다운 여인은 사내의 속을 캐내는 호미나 다름없네.”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 진천은 조용히 있었다. 여상구가 진천을 시험했다.
“내가 왜 이런 허접한 소리를 늘어놓는지 알겠는가?”
진천이 처진 눈을 살짝 올렸다.
“제 무공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여상구가 감탄했다.
“허어, 자넨 보기보다 명민한 사람이군. 바로 그걸세. 이러니저러니 해도 싸움만큼 인간의 본성을 정확히 알려 주는 수단은 없다네. 나는 자네를 알고 싶어졌네. 무인의 방식으로.”
진천은 여상구와의 대결이 썩 내키지 않았다. 급작스럽기도 하거니와 꺼림칙한 예감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여상구의 단호한 눈빛을 접한 진천은 그가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좋습니다.”
여상구의 청을 수락하면서도, 그가 어디서 비무를 하려는 심산인지 의아했던 진천은 의문이 풀렸다.
우물 바닥엔 물 대신 문이 있었다. 밑으로 뛰어내린 여상구가 벽의 고리를 잡아당기자 바닥이 갈라지더니 계단이 나왔다. 진천은 그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가파른 경사의 계단 끝에 철문이 보였다.
두꺼운 철문을 밀자 널찍한 석실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오백 평은 됨직했다. 이 장 높이의 천장에 알알이 박힌 야명주들이 내부를 낮처럼 훤히 밝히고 있었다.
“내 개인 연무실(鍊武室)일세.”
진천은 석벽들에 새겨진 흔적들을 살폈다. 어떤 생채기들은 깊이가 상당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여상구의 무위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여상구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한 자 길이의 쥘부채였다.
“내 애병(愛兵)인 소연(小鷰)일세. 강호의 동도 몇몇은 태극마선(太極魔扇)이라고 부른다더군. 자네는 따로 무기를 부리지 않는다고 들었네만, 어떤가?”
‘작은 제비’라는 이름을 붙인 부챗살을 애첩의 머릿결인 양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여상구가 물었다.
진천이 파리를 쫓듯 팔을 흔들었다. 그러자 소매에서 쩔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저는 가끔 쇠구슬을 사용합니다.”
일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여상구가 껄껄 웃었다.
“암기를 미리 공개하다니 너무 자신만만한 것 아닌가? 나를 만만하게 보았거나.”
“그럴 리가요. 여 각주님은 제가 만난 이들 중 가장 강한 분입니다.”
“자네 사부를 포함해서 말인가?”
허를 찔린 진천은 말문이 막혔다. 그를 추궁하지 않고 여상구가 부채를 활짝 펼치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어쨌거나 이제 시작하지. 격식을 차리지 말고 그냥 자연스럽게 겨루어 보세나.”
고개를 끄덕인 진천이 여상구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이십 보를 떨어진 곳에서 몸을 돌린 진천이 포권을 취했다.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여상구가 진천에게 쇄도했다.
* * *
삼사 장의 거리를 단숨에 지운 여상구가 부채를 횡으로 휘둘러 진천의 목을 베어 왔다. 뒤로 쓰러지듯 상체를 젖혀 여상구의 공격을 피한 진천은 우족으로 그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전날 염방주 신충을 쓰러뜨렸던 수법이었다. 그러나 여상구는 뒷다리를 돌림으로써 가볍게 진천의 반격을 빗겨 냈다.
첫수부터 흉험한 공격을 주고받은 양자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로 재격돌했다. 부채 끝에 날이 서 있었으나, 진천은 전권을 넓게 펼치는 대신 근접전을 시도했다. 여상구 역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기에 비무는 자연스레 육박전의 양상을 띠었다.
수십 초의 공방이 오갔다. 절묘한 보법과 현란한 몸놀림으로 여상구의 부채질을 흘려 내며 진천은 차츰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주먹과 팔꿈치, 무릎과 발을 어지러이 섞어 파상 공세를 퍼붓는 진천에게 밀려 여상구가 연신 퇴보를 밟았다.
석벽까지 여상구를 밀어붙인 진천은 우권(右拳)을 그의 늑골에 쑤셔 박았다. 치명상을 입히지는 않겠지만 승부를 매조지하기엔 충분할 터였다.
그러나 진천의 일격은 결정타가 되지 못했다. 가격에 성공했음에도 여상구를 허물어뜨리기는커녕 그가 오히려 손해를 입었다. 오른손의 뼈가 으스러지는 통증을 느끼며 진천은 급히 물러섰다. 그가 있던 자리에 여상구의 부채가 도끼처럼 수직으로 떨어졌다. 진천은 모골이 송연했다. 제때 피하지 않았다면 몸이 반으로 갈렸을 터였다.
진천은 신음성을 흘렸다.
그의 주먹을 튕겨 낸 것은 갑의(甲衣)가 아니었다. 여상구가 걸친 허름한 마의 안에는 살밖에 없었다. 여상구는 호신강기를 둘렀던 것이었다. 그가 초절정의 경지에 든 무인임을 확인한 진천은 비무 중단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하지만 여상구는 진천에게 의사를 표명할 겨를을 주지 않고 맹렬하게 짓쳐들어왔다.
진신 무력을 드러낸 여상구의 기세는 삼엄했다. 부채에서 뻗어 나온 선연한 강기에 진천은 마른침을 삼켰다. 부채의 움직임에 따라 청홍의 강기가 곡선으로 춤을 추었다. 진천은 여상구의 병기에 태극마선이라는 별칭이 붙은 까닭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변한 것은 기세만이 아니었다. 진천에게 소름을 돋게 한 건 예상을 초과하는 여상구의 무력이 아니라 그의 눈이었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잿빛 눈동자. 그 동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위장이 아니라 진짜였다.
한순간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여상구에게서 달아나듯 떨어지며 진천이 소리를 질렀다.
“진정하십시오.”
진천의 고함은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었다. 여상구는 손을 거두거나 공세를 늦추기는커녕 더욱 사납게 진천을 압박했다. 극상의 팔영보(八影步)를 펼친 진천은 아슬아슬하게 강기의 폭풍을 벗어났다. 그를 대신해 여상구의 강기에 찍힌 석벽과 돌바닥이 고양이의 발톱에 찢긴 창호지처럼 쩍쩍 갈라졌다.
진천은 갈등했다. 이제는 비무가 아니라 생사투(生死鬪)였다. 여상구가 분출하는 살의는 구름 한 점 없는 야천의 보름달만큼이나 확연했다. 설사 선강(扇鋼)에 맞아 중상을 입더라도 여상구는 살수를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그를 운신 불능으로 만들지 못하면 싸움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의미였다.
부지불식간에 입술을 깨문 진천은 결단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