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4
제3화
금방이라도 큼직한 식도를 휘두르며 고량에게 달려들 것 같던 털보가 기물 파손을 염려해서인지 문으로 걸어갔다.
진천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공(孔) 할아버지 말씀이, 요 며칠이 수십 년 만에 찾아온 폭염이라던데 그래선지 다들 여간 신경이 날카로운 게 아닙니다. 아까 패싸움도 그렇고 장 아저씨도 평소엔 저렇게 예민하지 않은데 말입니다. 성가시겠지만 잠시 어울려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크게 위험하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안전을 보장하겠습니다.”
노덕은 어이가 없어 입이 벌어졌다. 이거야말로 쥐가 고양이 염려하는 꼴이 아닌가.
웬일인지 고량은 침묵하고 있었다. 노덕은 고량이 갈등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즉시 진천을 제압해 창인을 벗어나는 게 현명한 처신임을 모르지 않을 테지만 털보에게 승부욕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결정을 내린 듯 고량이 진천에게 말했다.
“내가 그와 겨루는 동안 도망치지 마라.”
진천이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망이라뇨? 누가요?”
매서운 눈으로 진천을 쏘아본 고량이 문으로 향했다.
노덕의 백미가 꿈틀거렸다.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 불가였다. 고량은 어째서 진천의 마혈을 찍지 않고 자유롭게 둔 걸까. 달아나더라도 언제든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인가. 그리고 겨루다니? 설마 털보를 맞수로 인정한다는 말인가.
진천이 넋 놓고 선 노덕의 등을 떠밀었다.
“자, 우리도 나가지요, 대인. 뭐니 뭐니 해도 싸움 구경이 최고 아닙니까?”
망설이던 노덕은 고량이 문을 빠져나가자 진천의 귀에 속삭였다.
“여기는 땅 아래 미로가 있다고 들었네. 살고 싶으면 기회를 보아서 숨게나. 내 동행이 악한은 아니지만…….”
진천이 노덕의 말을 막았다.
“걱정 마십시오, 대인.”
일 점 흔들림도 없는 진천의 동공을 본 노덕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자. 어서 가십시다, 대인. 늦으면 좋은 자리를 뺏길지도 몰라요.”
진천의 재촉에 노덕이 그와 함께 객잔을 나왔다.
무릎이 불편한 노덕과 다리를 절뚝거리는 진천이 잰걸음으로 고량을 따라붙었다. 노덕은 눈을 부릅떴다.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사방에서 몰려나온 군중이 인적 없던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남녀노소가 골고루 섞여 있었지만 젊은 층이 다수여서 그런지 활기가 흘러넘쳤다. 그들의 태반은 까무잡잡한 피부의 이족이었다.
“창인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지 몰랐군.”
노덕의 놀람에 진천이 구체적인 숫자를 밝혔다.
“모두 사천사백구십팔 명입니다. 아, 제가 떠나 있던 일 년 동안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어쩌면 사천오백을 넘겼을 수도 있겠군요.”
“자네도 여기서 나고 자랐는가?”
“좀 애매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 가지 못했다. 진천이 그를 알아보고 다가온 이들에게 인사를 하느라 바빠졌기 때문이었다. 진천을 대하는 군중의 태도를 본 노덕은 그가 창인에서는 상당한 유명 인사임을 알았다.
“다 왔습니다.”
진천의 말에 노덕은 발걸음을 멈추고 시큰거리는 무릎을 주물렀다.
널찍한 공터였다.
먼저 나온 이들이 만든 원형의 공간 안에 식도를 든 털보가 혼자 서 있었다. 고량은 사람들이 터 준 좁은 통로를 통과해 급조된 싸움터 속으로 들어갔다. 중인은 그를 따라가는 진천과 노덕의 새치기를 가로막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맨 앞줄에 이른 진천이 군중을 뒤로 물렸다.
“너무 좁아요. 이건 애들 주먹다짐이 아니에요. 자칫하다 눈먼 칼에 다칠 수도 있으니 더 떨어져야 해요.”
군중은 순순히 그의 요청에 응했다. 지름이 팔구 장으로 길어지며 원이 세 배로 커졌다. 원을 둘러싼 관중은 계속 불어났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인파를 바라보며 노덕은 고소를 머금었다.
반 시진 전에는 텅 비어 있던 유령 마을이 지금은 장날의 저자처럼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마치 비무의 주관자인 양 진천이 사오 장의 거리를 격하고 대치한 두 사내의 중앙으로 걸어가서는 소리쳤다.
“장 아저씨야 다들 아실 거고, 저분은 중원에서 온 무인입니다. 상호 간에 특별한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고 서로의 솜씨를 보고 싶어 한판 하려는 겁니다. 재미있게 감상하시고 아낌없는 응원 부탁드립니다. 너무 장 아저씨 편만 들지 말고요.”
우레 같은 함성과 웃음소리가 터졌다.
진천이 고량에게 눈길을 주었다.
“규칙은 하납니다. 힘껏 싸우되 살생은 안 됩니다. 할 말이 있습니까?”
고량은 묵묵부답이었다. 정작 입을 연 이는 털보였다.
“너 같은 족속들을 안다. 힘으로 남을 핍박하고 제 뜻에 맞지 않으면 아무 잘못도 없는 이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무뢰한들이지. 네가 놀던 곳에서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어림도 없다. 나는 창인의 얼굴인 대왕객잔의 주인으로서 네놈의 무례를 응징하겠다.”
고량이 차갑게 대꾸했다.
“똥개도 제 마당에선 왕인 줄 안다더니. 하지만 겁먹은 똥개가 짖는 법이지.”
이로써 고량은 걸핏하면 그를 개로 비유했던 털보에게 설욕했다.
제법 효과가 있었는지 진천의 입에서 비무 개시 선언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털보가 고함을 내지르며 고량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털보의 식칼보다 고량의 주먹이 먼저였다.
군중이 술렁거렸다.
털보가 선공을 취하고도 황급히 물러나는 광경이 그들의 예상을 벗어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노덕은 그들과는 정반대의 이유로 충격을 받았다. 고량의 두 주먹에 일렁이는 황색 안개는 그가 권기(拳氣)를 끌어 올렸다는 뜻이었다. 놀랍게도 고량은 털보를 상대로 초반부터 전력을 쏟아 낸 것이었다.
팡팡팡!
고량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귀청을 찢는 파공성이 터졌다. 권풍(拳風)에 스치기만 해도 뼈가 으스러질 판이었기에 털보는 고량의 동체에 붙지 못하고 진퇴를 거듭했다.
그러나 털보도 상당한 강자였다. 덩치는 곰이되 몸놀림은 표범이었다. 간혹 털보가 주먹 바람을 뚫고 고량에게 붙어 식도를 찔러 갈 때면 노덕은 소름이 돋았다. 철갑피공(鐵甲皮功)을 익힌 고량의 살갗은 악어 껍질보다 질기고 암석처럼 단단하지만 도검불침의 경지는 아니었다. 평범한 이가 휘두르는 칼이라면 생채기만 나겠지만 내공이 실린 털보의 식도는 고량의 팔뚝을 무처럼 베어 버릴 터였다.
두 사내가 펼쳐 내는 치열한 공방전에 장내는 불에 올린 솥처럼 후끈 달아올랐다. 털보를 향한 일방적인 응원 소리가 노덕의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수천 명의 열렬한 응원을 한 몸에 받은 털보의 기세가 갈수록 맹렬해졌다.
사위는 차츰 어두워졌다. 석양의 빛을 반사한 털보의 식칼이 먹구름 속의 번개처럼 번쩍거렸다. 방어에 치중한 고량이 조금씩 뒤로 밀렸다.
노덕은 울컥했다. 고량은 이제 쓸모가 없어진 그를 버릴 터이지만, 노덕에게 그의 고전은 전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배 속에서 치솟아 오른 뜨거운 감정 덩어리가 노덕의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지지 마라, 소저(小猪)!”
노덕이 고량을 어릴 적 애칭으로 부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노덕은 그 순간 고량이 그를 바라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그의 외침은 고량의 귀에 닿기도 전에 군중의 함성에 묻혀 버렸을 터였다. 더욱이 고량은 그를 등지고 있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노덕의 격려에 자극을 받은 듯 고량이 힘을 내기 시작했다. 퇴보를 밟던 고량이 별안간 전진하며 압박을 가하자 털보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느닷없는 전세 역전에 군중이 동요했다.
싫어하던 별명인 ‘새끼 멧돼지’ 시절로 돌아간 듯, 고량이 털보를 일직선으로 밀어붙였다. 쌍권(雙拳)은 물론이고 양족(兩足)까지 동원한 고량의 파상 공세에 털보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연신 허둥댔다. 결국 옆구리와 장딴지에 잇달아 권풍을 허용한 털보가 만취한 주정뱅이처럼 비틀거렸다. 털보가 필사적으로 찔러 온 식도를 겨드랑이로 빗겨 낸 고량이 왼 주먹으로 결정타를 가했다.
뻑.
갈비뼈가 부러지는 기음과 함께 털보가 쓰러졌다.
고량이 오른발로 털보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잽싸게 바닥을 구른 덕분에 털보는 턱이 박살 나는 참변을 가까스로 모면했다. 고량은 가일수를 하지 않고 멈췄다. 부들거리며 일어서던 털보가 도로 주저앉았다.
이방인의 승리에 군중의 입들이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진천이 털보에게로 걸어갔다.
“괜찮아요, 장 아저씨?”
울혈을 뱉어 낸 털보가 이를 갈았다.
“제길, 만날 국수만 삶다가 칼이 녹슬었어.”
털보에게 손을 내밀며 진천이 웃었다.
“하하, 그럴 리가요. 내가 본 아저씨 칼춤 중에 최고였는데. 상대가 더 강했을 뿐이에요.”
진천의 부축을 받고 몸을 일으킨 털보가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는 고량에게 눈을 돌렸다.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고 싶었는데, 제길. 어쨌거나 내가…….”
털보가 말끝을 흐리더니 마지못해 덧붙였다.
“……졌다.”
털보의 승복에도 고량의 무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의 시선은 털보가 아니라 내내 진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진천은 고량의 눈을 외면하고 군중을 보았다.
“다 끝났으니 다들 돌아가시죠.”
누군가 ‘복수’를 주창하자 대번에 호응이 일었다. 수백 명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복수’라는 두 글자가 북소리처럼 대지에 울려 퍼졌다.
진천이 짐짓 울상을 지었다.
“다들 보셨다시피 정정당당한 승부였는데 복수는 무슨 복숩니까? 그리고 다친 거 안 보입니까?”
진천이 부목을 대고 칡넝쿨을 감은 왼팔을 들어 보였다. 그래도 소요가 가라앉지 않자 이번에는 우족을 건들거렸다.
“발도 성치 않다고요.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내상도 입었습니다. 설마 내가 망신당하는 꼴을 보고 싶어서 이러는 겁니까들?”
그제야 군중의 악다구니가 수그러들었다.
* * *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공터에 엷은 어둠이 밀려왔다. 연거푸 피를 토해 낸 털보가 그 자리에서 운기조식을 취했기에 진천을 비롯한 몇 명은 계속 남아 있었다. 노덕은 그들이 객잔에 있던 패거리임을 알았다.
“만약 네가 부상을 입지 않았다면 나를 대적할 수 있다는 말인가?”
침묵을 지키던 고량이 노덕의 의구심을 대변했다.
창인의 민초들이 진천에게 털보의 복수를 요구했을 때 노덕은 위화감이 들었다. 고량의 무위를 목도하고서도 그들이 그렇게 나왔다는 것은 진천이 털보를 능가하는 강자라는 뜻이었다.
노덕은 도저히 믿기 어려웠다. 뛰어난 후기지수들이 강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다는 중원 무림을 통틀어도 약관의 나이로 금강권 고량에 맞설 무력에 도달한 신성(新星)은 극소수에 불과할 터였다.
불현듯 객잔을 나오기 직전의 상황을 상기한 노덕은 신음성을 삼켰다.
고량이 진천을 제압하지 않고 내버려 둔 건 혹시 그를 경계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섣불리 손을 썼다가 급전으로 치닫게 될까 봐 자중한 게 아닐까. 호랑이는 호랑이를 알아보는 법이었다.
노덕은 눈을 비비고 진천을 다시 보았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던 진천의 모습이 갑자기 달라졌다. 유순한 눈매는 매처럼 날카로웠고 야윈 체구는 산 정상을 차지한 거암인 양 커 보였다. 머릿속에는 능구렁이가 열 마리쯤 들어 있을지도 몰랐다.
“글쎄요.”
진천의 대답은 고량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백문이 불여일견.
섬전보(閃電步)를 밟아 단숨에 거리를 지운 고량이 진천의 가슴팍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그의 기습에 마치 자신이 표적이 된 양 노덕이 움찔거렸다.
바위도 부순다는 강권에 강타당한 진천이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노덕은 그의 시야에 들어온 장면을 그렇게 해석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노덕의 노안이 한껏 치떠졌다. 진천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제자리에 서 있었다. 황급히 그의 뒤편으로 눈을 돌린 노덕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땅바닥을 뒹구는 자는 진천이 아니라 공격을 가했던 고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