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40
제39화
진천은 소매 안의 철구를 아낌없이 뿌렸다.
도합 마흔네 개의 쇠구슬이 여상구에게 우박처럼 쏟아졌다. 여상구는 신법을 발해 피하지 않고 기막(氣幕)을 펼쳐 진천의 암기들을 막아 냈다.
따다다다당―!
철구들이 강기의 방패에 튕겨 나오며 일으킨 기음이 석실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여상구를 제지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반 호흡을 버는 데 성공한 진천은 비장의 패를 꺼내 들었다.
진천이 왼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뿔난 황소처럼 그에게 돌진하던 여상구는 저항할 수단이 소진된 자의 무기력한 몸짓으로 해석하고는 인정사정없이 부채를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선강의 범위에 들어왔기에 진천의 동체는 어깻죽지부터 반대쪽 옆구리까지 갈릴 터였다.
그러나 일방적인 수읽기였다. 진천을 양단하기 직전이었던 여상구는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하며 다급히 회보(回步)를 밟았다. 마무리를 고집하다간 그 역시 심장이 뚫릴 판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진천의 손끝에 고드름처럼 하얗고 뾰족한 기운이 일렁거렸다. 온전한 수강(手剛)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여상구는 그것이 자신의 호신강기를 관통해 몸에 구멍을 내리라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진천은 그의 측면으로 돈 여상구를 따라붙으며 수도를 찔러 넣었다. 반반퇴(半半退)로 피하던 여상구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허연 기운이 갑자기 두 자나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낫처럼 휘면서 그의 목을 감아 왔기 때문이었다.
여상구는 똥을 싸듯 쪼그려 앉음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동시에 부채로 진천의 허리를 잘라 갔다. 진천은 위로 도약하는 것으로써 대응했다.
여상구는 승부수를 던져야 할 장면임을 깨달았다.
태극선법을 회피하며 현시했던 진천의 신법은 그의 아래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 뼘이라도 윗길이었다. 지상전에서는 우위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그가 바닥에 닿기 전에 끝장을 보아야 했다.
십이 성의 공력을 주입받은 여상구의 부채가 공중에 뜬 진천에게 강기의 폭우를 날렸다. 진천은 아래로부터 쏟아지는 소낙비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천장이 없었다면 강기를 바람 삼아 연처럼 몸을 띄웠겠지만, 그럴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기에 진천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진천을 궁지에 몰았다고 확신하면서도, 여상구는 스스로에게 방심을 허용치 않았다. 상대는 생사가 오가는 흉험한 싸움에서도 냉정한 눈빛을 잃지 않는 전사(戰士)였다. 선천적인 재능인지 후천적 수련의 결과인지 불분명하나 그러한 평정심의 소유자는 만 명에 하나 꼴로 보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여상구의 경험상 그러한 덕목을 가진 이들 중 위험하지 않은 자는 전무했다.
여상구의 신중함은 보답을 받았다. 허공에서 발광하듯 몸부림치며 진천이 부챗살 사이의 결을 타고 강기들을 흘려 내는 신기를 과시하자, 여상구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진천은 그 와중에 하얀 빛살 같은 탄강까지 쏘았다. 여상구는 등골이 쭈뼛했다. 방심했더라면 그 음험한 일수에 속절없이 목을 내주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승패를 관장하는 신은 여상구의 편이었다. 미리 대비를 한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진천의 반격을 피해 낸 여상구는 촌각의 지체도 없이 운신의 여유가 사라진 그의 가슴팍에 일격을 가했다. 여상구의 선강에 적중된 진천은 입에서 피를 내뿜으며 삼사 장이나 나가떨어졌다. 설명이 길었으나 이 모든 건 진천이 공중으로 뛰어오른 지 숨 한 번 내쉴 동안 벌어진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눈 깜박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승자가 되었지만 여상구는 쾌재를 부르는 대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먼 바닥에 널브러진 진천을 바라보았다. 목덜미를 문지르는 그의 왼손이 풍을 맞은 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진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흉골(胸骨)이 빠개진 듯 뻐근했다. 여상구의 선강이 조금만 왼쪽으로 갔다면 심장이 상했을 터였다.
아니, 그가 마지막 순간에 공력을 회수하지 않았다면 가슴 전체가 함몰되고 즉사했을 것이었다.
고통을 참으며 주위를 살핀 진천은 자신이 여상구의 지하 연무장이 아니라 세 평가량 되는 방의 침상에 누워 있음을 알아차렸다. 상체를 일으키던 진천이 신음성을 흘렸다.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된 듯 문이 열리고 여상구가 방으로 들어섰다.
“이제 깼군. 그냥 누워 있게.”
진천은 여상구의 권유를 마다하고 억지로 상반신을 세웠다.
“손속에 사정을 두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천의 말에 여상구의 이마 주름이 깊어졌다.
“자넨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군. 그럼 나는 자네에게 목숨을 살려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
“나는 반드시 이유를 알아야겠네. 어째서 자네가 최후의 노림수를 스스로 비틀었는지. 자네는 내 선강을 허용하기 전에 나의 목에 비수를 꽂을 수 있었어. 두 번째 비수 말일세. 겨냥이 빗나갔다는 식으로 얼버무리지는 말게. 그건 나의 안목에 대한 모독이니.”
광기 대신 동요가 출렁이는 여상구의 동공을 응시하며 진천이 쓰게 웃었다.
진천은 여상구와의 일전을 복기했다.
암기공과 권각술(拳脚術)로는 감당치 못할 진신 무력과 명백한 살기를 접한 진천은 생존을 위해 숨겨둔 발톱을 드러내야만 했다. 강기를 구사하는 초절정 고수를 상대하려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철구들을 날려 역천기공을 끌어올릴 시간을 번 진천은 좌수에 모인 공력으로 절멸도(絶滅刀)를 뽑았다. 여상구는 노련한 무인이었다. 절멸도와의 충돌이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간파했는지 그가 미련 없이 물러서자, 진천은 몸을 돌려 달아날지를 두고 찰나지간 고민했다. 비무 도중 여상구가 별안간 살벌한 살기를 폭사하는 까닭을 알 도리가 없었지만 아무런 원한도 없는 그와 생사를 걸고 사투를 벌일 까닭 또한 없어서였다.
하지만 기호지세였다. 칼을 뽑았으나 무라도 베어야 한다는 심산에서가 아니라, 철문을 열다가 등에 선강을 맞을 게 뻔했기에 진천은 여상구와의 싸움을 이어 가야 했다.
불리한 형국에 처하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공중으로 몸을 띄운 건 고육지책이었다. 역천기공으로 일으킨 내공은 반의반 각도 지속되지 않을 터이기에 진천으로서는 속전속결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예상대로 유리한 위치를 점한 여상구는 단박에 끝을 낼 작정으로 전력을 쏟아부었다. 맞불을 놓을 화력이 부족했던 진천은 팔영보의 최절초인 비환(飛幻)으로 버티며 절멸비(絶滅匕)로 일격필살을 노렸다. 현재의 성취에서 절멸비의 사용은 두 번만 가능했다.
여상구가 첫 번째 절멸비를 머리카락 한 올의 차이로 흘려 내자 하마터면 그를 죽일 뻔했던 진천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진짜 노림수였던 두 번째 절멸비를 빗겨 쏘았다. 그 직후 여상구의 선강에 강타당해 혼절한 것이었다.
진천은 솔직히 말했다.
“불구대천의 원수도 아닌데 어찌하여 각주께 살수를 쓸 수 있겠습니까?”
기습적으로 뒤통수를 맞은 사람처럼 여상구가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다 자기가 죽을 판인데도?”
진천이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지요.”
“…….”
입에 재갈이 물린 듯 침묵하던 여상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어, 이런 바보가 실재했다니. 옛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허상인 줄 알았거늘.”
진천이 웃었다.
“하하, 제가 좀 바보 같은 구석이 있습니다.”
여상구는 웃음으로 화답하지 않고 심각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나만 더 묻겠네. 내가 마지막에 공력을 거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가?”
“몰랐습니다. 다만 마지막 공방 시 각주님의 눈을 보았습니다. 광기가 사라지고 정기가 깃들어 있더군요. 찰나지간이라 확신할 순 없었지만, 저는 그 눈에 운을 걸어 보기로 했습니다.”
여상구가 다시 침묵에 잠겼다. 그러고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자네는 내 평생 만난 이들 중 최고의 기인일세. 극한 상황까지 몰아붙임으로써 자네를 파악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놀라운 내면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앞으로 자네의 정심(正心)을 의심하는 작자가 있다면 내 부채로 목을 따 줄 걸세.”
“그러지 마십시오.”
진천을 바라보는 여상구의 눈빛이 온화해졌다.
“싸움은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수단이라고 했던 말 기억하는가. 자네는 나에게서 무엇을 보고 느꼈는가. 허심탄회하게 말해 주게.”
진천은 낯빛을 바로 했다.
“각주님은 살기가 강합니다. 단순히 강한 정도가 아니라, 접하는 순간 간이 오그라들 만큼 강렬한 살기였습니다. 익히신 무공의 영향이라기보다는 아마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타고난다는 천생살기(天生殺氣)가 아닌가 싶습니다. 날숨처럼 저절로 배어 나오는 살기를 갈무리하고 제어하기 위해 평소에 많은 수양을 쌓지는 않았는지요? 마지막에 제 숨통을 끊지 않은 것은 각주께서 살기를 의지로써 다룰 수 있다는 반증이라 여겨집니다.”
여상구의 야윈 몸에 전율이 일었다.
“아무래도 내가 지음을 얻은 것 같군. 내 인생은 주체할 수 없이 솟구치는 살심과 그것을 억누르려는 의지가 벌이는 투쟁의 연속이었네. 소년과 청년 시절엔 본성이 나를 지배했고, 중년에는 둘 사이에 팽팽한 평수를 이루었으며, 환갑을 넘긴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내 속의 괴물을 뜻대로 부릴 수 있게 되었다네.”
진천은 오한이 일었다.
“제가 운이 좋았군요.”
“내가 할 말일세. 간밤에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 행운이 떨어지기 전의 액땜이었나 보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여상구가 돌연 정색했다.
“자네에게 청이 있네만.”
“말씀하시지요. 도의에 어긋난 일만 아니라면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여상구가 뜸을 들였다. 진천은 잠자코 기다렸다. 이윽고 여상구가 내용을 밝혔다.
“나는 자네와 형제 결의를 맺고 싶네. 내 아우님이 되어 주겠는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진천은 당황했다.
여상구가 재빨리 몇 마디를 덧붙였다.
“내 나이는 괘념치 말게. 진정한 관계에서는 나이 따윈 장애가 될 수 없네. 더군다나 나는 겉으로는 서른 살 전후로 보이지 않은가. 자네와 호형호제를 해도 크게 어색하지는 않을 걸세.”
진천은 문득 여상구와 연인 사이로 알려진 노미현이 떠올랐다. 그의 속을 읽었는지 여상구가 검미를 치떴다.
“현아, 그 아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닐세. 이건 그 아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네.”
“알겠습니다. 제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진천의 보류에 여상구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도의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다 들어주겠다지 않았는가? 내가 값싼 감상에 빠져 충동적으로 제안했으리라 오해할까 봐 고백하네만 내 평생 누군가에게 형제 결의를 청한 적이 없었네. 형제는커녕 친우가 되자고 한 경우도 없다네. 나는 어떻게든 지금 이 자리에서 자네의 승낙을 받고 싶네. 그러지 않으면 자네가 손에 쥔 연기처럼 내 삶에서 빠져나갈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구먼. 부디 답을 주게나.”
진천은 여상구의 절박함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왜 저를 아우로 삼고자 하십니까?”
진천의 질문에 화난 사람처럼 눈을 부릅뜬 여상구가 반문했다.
“정녕 모르겠는가?”
“…….”
“나는 자네에게 반했다네.”
진천이 움찔하자 여상구가 고소를 머금었다.
“또 오해했군. 내 취향에 대해 시중에 떠도는 괴담들을 아네만 다 헛소리일세. 밖에서 뭐라고 입방아를 찧어 대건 일절 신경 쓰지 않았던 후과(後果)로 자네에게 이런 해명을 해야 한다니 씁쓸하기 이를 데 없군. 나는 문자 그대로 자네에게 반했을 뿐이라네. 무인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여상구가 여과 없이 표출하는 진심이 진천의 마음을 움직였다. 진천이 여상구에게 답을 주려는 찰나, 소리 없이 문이 열리더니 절세의 미녀가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