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41
제40화
문 뒤에 누군가 붙어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고, 그 사람이 노미현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예측했지만 진천은 그녀가 불쑥 방으로 들어오자 당혹스러웠다.
진천과 시선을 마주친 노미현의 눈동자에는 전날의 독기 대신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속을 감추려는 듯 노미현이 여상구를 힐난했다.
“십 년이나 보아 왔지만 청로(靑老)가 이렇게 철부지 아이처럼 떼를 쓰는 모습은 처음이네요. 듣고 있기 민망해서 혼났어요. 창피하지도 않나요?”
진천은 노미현의 말에서 드러난 두 가지 사실에 주목했다.
첫째, 그녀와 여상구의 첫 만남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일이 년 전이 아니라 훨씬 오래전에 이루어졌던 모양이었다. 십 년 전이라면 노미현이 여덟 살 때였고, 그녀가 노덕을 밀어내고 모친을 직접 돌보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 중요한 사실을 노덕은 왜 언급을 하지 않았을까. 일부러 빠뜨렸을 리는 없으니 몰랐다고 보아야 했다.
둘째, 노미현은 여상구를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둘이 허물없는 사이라는 방증이었다. 그들은 정말로 연인 관계란 말인가.
여상구가 짐짓 역정을 냈다.
“내가 가장 후회하는 일이 무언지 알면서 그러느냐? 일생일대의 인연을 놓치고 내가 얼마나 회한의 세월을 보냈더냐? 다시 아우님을 무기력하게 떠나보낸다면 나는 폐인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너는 이러쿵저러쿵 참견하지 마라.”
진천은 은근슬쩍 ‘아우님’으로 호칭한 여상구의 뻔뻔함에 실소했다. 그러면서 그가 말한 ‘일생일대의 인연’이란 표현에 귀가 솔깃해졌다. 혹시 그녀의 어머니인 주안일미 전하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노미현과는 뭐란 말인가. 설마 연모했던 여인의 딸을 연인으로 삼았단 말인가.
진천의 상상을 방해하려는 듯 노미현이 거친 언사로 맞받아쳤다.
“청로는 원래 폐인이 아니었던가요? 새삼스레 뭘 걱정하는 거죠?”
“우는 양이 가여워 손바닥 위에 올려 주었더니 이젠 머리 꼭대기에서 춤을 추는구나. 그렇게 함부로 입을 놀리다간 그 길쭉한 분홍빛 혀가 반 토막 날지도 모른다.”
“저 사람에게 구걸한 걸로도 모자라 나에겐 협박인가요? 실행한 담력도 없으면서 일삼는 협박이 얼마나 한심해 보이는지 알아요? 오늘 청로의 추태는…….”
“그만하자. 아우님 면전에서 할 짓이 아니다.”
진땀을 흘리던 진천은 여상구의 눈가에 번지는 야릇한 미소를 보고는 그와 노미현의 언쟁이 장난임을 깨달았다.
“아우님 같은 평정심의 소유자도 당황하는군그래. 아니면 이 아이의 미모에 부동심이 흔들린 건가?”
낯이 붉어진 진천이 서둘러 침상을 내려왔다.
“그냥 누워 있게, 아우님.”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형님.”
손을 뻗어 진천을 만류하던 여상구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지금 뭐라고 했는가?”
진천이 수줍음을 타는 소년처럼 우물쭈물했다. 노미현이 대신 답했다.
“형님이라고 했잖아요. 소원 성취해서 흐뭇하겠어요, 청로.”
여상구가 와락 진천을 껴안았다. 진천은 그를 뿌리치지 못하고 밧줄에 묶인 듯 얌전히 있었다.
* * *
세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정방형의 탁자에서 진천은 노미현과 마주 보고 앉았다. 여상구는 마치 중재자처럼 다른 면의 의자에 착석했다.
“아우님이 누워 있는 동안 현아에게 모든 이야기를 해 주었다네. 그런 줄 알고 대화 나누게나.”
“고맙습니다, 형님.”
진천의 호칭에 여상구가 싱글벙글했다. 그러나 노미현의 표정은 열흘 전 삼보장에서처럼 싸늘했다.
“청로가 보장하는 대로 당신이 정직한 사람이라는 건 인정하겠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그’의 말이 진실임을 보증해 주지는 못해요.”
진천은 노덕을 ‘그’라고 칭하는 노미현의 냉정함에 회합의 앞길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소저의 지적이 맞소. 그러나 그것은 소저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오. 소저가 가진 믿음의 근거도 결국 소저 모친의 전언밖에 없지 않소?”
노미현의 선홍빛 입술에서 분노를 억누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은 내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모르는군요. 안다면 결코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을 거예요.”
진천은 주안일미 전하연이 생전에 얻었던 평판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경국지색의 미모가 아니라 자애로움과 현숙함으로 만인의 칭송을 듣던 여인이었다. 삼보장주의 선업도 그녀의 간곡한 권고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파다했다. ‘그날의 폭로’가 있은 후 세인들이 노덕에게 등을 돌린 데는 그녀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베풀었던 음덕도 큰 몫을 했다.
“나도 소저 모친께서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에 대해 많이 들었소. 나는 다만 여인이 한을 품을 때 얼마나 무서운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알기에 그분의 평소 인품과 무관하게…….”
노미현이 진천의 말을 끊었다.
“여인의 한? 우습군요. 당신 같은 사내가 어떻게 그걸 알겠어요? 착각은 자유지만 자랑스레 내세우지는 말아요. 역겨우니까.”
진천은 침중해졌다.
“……몇 년 전 나의 어머니가 내 눈앞에서 자결하셨소. 나는 태어나서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줄곧 내 혈육들에 대한 그분의 증오와 원한을 먹으며 자랐소. 그래서 아주 조금이나마 소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소.”
노미현의 옥용이 석상처럼 굳었다. 무거운 정적이 좌중을 내리눌렀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여상구가 침묵을 깼다.
“아우님에게 그런 아픈 사연이 있는 줄 몰랐네. 그런데 노 장주는 어째서 그날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을까? 그때도 그렇지만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자신이 주장하는 진실을 밝힐 기회가 있었는데.”
“노 대인은 그날 죄를 뒤집어쓰는 것보다 노 소저가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게 훨씬 두려웠답니다. 그래서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답니다. 나중에 정신을 수습했을 때는 이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 되었지요. 자신은 물론이고 의형과 아내가 모두 추문의 올가미를 쓰게 될 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 모든 치욕을 혼자 감내하기로 했답니다. 만약 거지 패에게 구원을 받고 그들로부터 되살아나야 할 이유를 얻지 못했다면 노 대인은 작년 여름 거리를 방황하다 이승을 하직했을 것입니다.”
노미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일언반구도 남기지 않고 방을 나갔다. 진천은 그녀를 잡지 못했다.
여상구가 진천을 위로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다 잘될 걸세, 아우님. 현아는 제 어미를 닮아 외골수의 기질이 있지만 미련한 아이가 아닐세.”
“노 대인을 믿으십니까?”
진천이 ‘형님’을 덧붙이지 않자 여상구는 서운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가 아니라 아우님을 믿네. 진상이 무엇이든 상관없네. 아우님이 옳다면 옳은 거야.”
진천은 여상구의 무조건적인 신뢰가 부담스러웠다. 허나 여상구는 맹목적이되 둔한 이는 아니었다.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걸세. 아우님이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우긴다면 맞장구를 치겠지만 속으로야 그렇게 생각하겠는가? 광증을 지병으로 달고 살지만, 그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네. 노 장주와 주안일미의 경우 나는 전자의 진술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네. 아우님의 결론과 일치하니 다행이 아닐 수 없네. 속마음과 다른 시늉을 할 필요가 없으니 말일세. 여하간 나도 도움세. 워낙 고집불통인 아이인지라 현아에게 내 설득이 먹힐 거라는 자신은 없지만 시도는 해 보겠네. 그 아이도 내 의견을 아주 무시하지는 못할 걸세.”
“고맙습니다, 형님.”
여상구가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핫, 고맙긴. 아우님을 위해 이 형님이 그만한 것도 못 해 주겠는가? 심장을 꺼내 달래도 줄 터인데. 어디 볼 텐가?”
여상구가 부채로 제 가슴을 쑤시자 선혈이 배어 나왔다. 진천은 기겁했다.
“그러지 마십시오.”
여상구가 다시 껄껄 웃었다.
“아쉽군. 내 진심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느닷없이 정색한 여상구가 목소리를 깔았다.
“내 심혼을 뒤흔든 아우님과 이렇게 의형제가 되다니 기쁘기 한량없구먼. 그런데 형제끼리는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아우님의 지난 삶을 듣고 싶으이.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내 인생사도 솔직히 털어놓음세. 물론 지금부터 나눌 이야기는 우리끼리만 아는 걸로 하세. 어떤가?”
“알겠습니다, 형님.”
“먼저 아우님의 사문을 알려 주면 안 되겠는가? 그 난리를 치고도 아우님 무공의 내력을 알아내는 데 실패했네. 밤새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구먼.”
진천이 처진 눈을 치떴다. ‘밤새’라니?
“지금 시각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형님?”
“글쎄. 얼마 있으면 먼동이 터올 터이니 묘시(卯時) 초쯤 되지 않았을까?”
진천은 쓴웃음이 났다. 기껏해야 한 시진 정도라 생각했는데 다섯 시진이나 혼절해 있었단 말인가. 여상구의 선강으로 인한 내상의 여파라기보다는 급작스럽게 역천기결을 운용한 후유증일 공산이 컸다.
진천이 사문을 밝히기 싫어 말을 돌린다고 여긴 여상구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휴우, 절대 비밀이라면 캐묻지 않겠네.”
“아닙니다, 형님. 말씀드리지요. 제 사부들은 강호에서 잔귀쌍마(殘鬼雙魔)로 불렸던 이들입니다.”
“뭣이?”
의자 바닥에 송곳이 돋은 듯 펄쩍 튀어 올랐던 여상구가 엉거주춤 도로 앉으며 물었다.
“쌍마라면 잔살광마와 귀도마의 말인가?”
“그렇습니다, 형님.”
충격이 심한지 여상구는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 * *
진천은 해 뜰 무렵 여상구의 장원을 나섰다.
간다고 알렸지만 자기 방에 틀어박힌 노미현은 대꾸도 없었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의형을 달랜 진천은 날이 밝았음에도 쥐 죽은 듯 고요한 봉천의 거리로 나갔다. ‘환락의 도시’ 봉천은 새벽녘에 절정을 이룬 후 일출 직전에 ‘유령의 도시’로 변모한다고 했다. 그렇더라도 고루거각이 즐비한 곳에서 사람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다니 너무 심하다고 진천은 생각했다.
봉천을 벗어난 진천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대로가 아니라 산기슭을 따라 달렸다. 인적이 드문 길이었지만 드문드문 부지런한 약초꾼들이 눈에 띄었다. 진천은 그들이 준마보다 빠른 자신의 경공을 보고 놀라지 않게 더 깊숙한 산중으로 들어갔다.
경로가 달라졌지만 진천은 길을 잃거나 헤매지 않았다. 밀림에서 단련된 그의 지리 감각은 천공에서 지상을 조망하는 새들만큼이나 뛰어났다.
여상구의 거처를 떠난 지 한 시진 남짓 만에 주안에 이른 진천은 곧장 삼보장으로 향했다. 담벼락 역할을 하는 테두리 숲을 돌아 정문에 다다른 진천은 안으로 들어가다 멈춰 섰다. 너른 마당 오른편에 마치 벼락이 떨어진 것 같은 자국이 보였다. 대웅의 철곤(鐵棍)이 만든 생채기였다.
가까이 다가간 진천은 보다 자세히 조사했다. 깊이와 길이로 보아 대웅이 거의 전력으로 쇠몽둥이를 내리쳤음에 분명했다. 주위를 살핀 진천은 전투의 흔적이 없음을 확인했다.
진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대웅이 애꿎은 땅바닥에 화풀이를 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무슨 일로 화가 났을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힘자랑이라도 한 걸까. 그게 맞는다면 그 누군가는 누구일까?
해석 난망의 사태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진천은 기감을 끌어 올렸다. 그가 선 곳에서 가까운 우측의 와옥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잡혔다.
차소영인 듯했다. 최고조로 집중했지만 고량의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고량은 연인의 간호를 위해 하루 종일 그녀와 붙어 있었다. 그의 기운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와옥에 없거나 운신을 극도로 조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진천은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고량은 차소영을 홀로 두고 나갔을 터였다. 그의 외출이 땅에 가한 대웅의 몽둥이질과 연관이 있지나 않을지 진천은 걱정스러웠다.
진천이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좌측의 와옥으로 접근했다. 그러고는 창가에 붙어 내부를 훑었다. 일 층에서 두 사람이 기감에 들어왔다. 한 명은 노덕임에 분명했다. 다른 한 명은 대웅이나 고량이 아닌 외인이었다.
진천은 잠시 기다렸다. 하지만 한자리에 있음이 명백함에도 노덕과 정체불명의 인물은 일절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노덕은 혹시 인질로 잡힌 걸까?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웠다.
반 각 후, 결단을 내린 진천은 창으로 잠입하지 않고 문으로 당당히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대인.”
진천의 인사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줄기 은빛 광선이 그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