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43
제42화
“차 소저와 방주님의 차자(次子) 사이에 일어난 일도 사고였습니다.”
진천의 말에 오재현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재작년 가을 배수의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배수는 도박의 도시지만, 도박꾼들이 도박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봉천만큼은 아니지만 배수에도 백도방 소유의 특급 기루들이 즐비했다. 차소영은 그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화월루(花月樓)의 제일호화나찰(第一護花羅刹)이었다.
소녀 시절의 풋사랑과 극적으로 재회한 차소영은 그와 더불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날은 그녀의 마지막 근무일이었다.
이십이 층 높이인 화월루에서 가장 등급 낮은 삼사 층의 태화관(太和館)에서 발생한 소동이 발단이었다. 인사불성으로 취한 일군의 불한당들이 몸을 팔지 않는 청기(靑妓)들에게 교합을 강요하며 행패를 부린다는 보고를 받은 차소영은 제 소관이 아님에도 직접 처리하기로 마음먹고 아래로 내려갔다. 다소 감상에 젖은 결정이었다.
늘 겪는 일이었기에 차소영은 가벼운 마음으로 난동꾼들을 제압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들 무리에 섞여 있지 않았던 사내 하나가 느닷없이 노기를 터뜨리며 차소영에게 달려든 것이었다.
기세와 자세로 보아 만만치 않은 자임을 간파한 차소영은 최선을 다해 응전했다. 십여 초의 공방에서 그녀가 우세를 점하자 분기탱천한 사내가 소매를 펄럭이더니 양손에 비수를 쥐었다. 까닭 모를 위기감을 느낀 차소영은 그가 수를 쓰기 전에 그녀의 최절초인 삼비각(三秘脚)으로 사내의 사타구니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낭심이 터진 사내는 그 자리에서 거품을 물고 혼절했다.
사내의 정체는 백도방주 오재현의 둘째 아들인 오준상이었다.
오준상은 호부견자(虎父犬子)의 전형이었다. 무재로는 형인 오준열에게 크게 밀릴 바가 없었으나, 워낙 성정이 성급하고 지도력이 부족해 일찌감치 후계 구도에서 탈락했던 오준상은 약관을 넘기고부터는 개망나니의 길을 걸었다. 배수의 백성들치고 오준상의 패악질에 당하지 않은 이들이 드물었다.
그날 오준상의 계획은 이러했다. 뒷골목에서 대충 추려 온 흑도들로 하여금 소란을 부리게 한 후 제가 나서서 겁에 질린 청기들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청기 중엔 곧 최상층인 화월관으로 올라갈 미완의 보석이 숨어 있었다. 지체 높은 방주의 차자가 하급의 태화관에 등장해 멋진 모습을 보이면 누군들 반하지 않으랴.
그런데 웬 덩치 큰 여자가 말릴 새도 없이 그들을 쓰러뜨리고 그의 몫이었어야 할 찬사를 독차지하자 오준상은 분통이 터졌다. 그래서 불문곡직 그녀에게 공격을 가한 것이었다.
오준상의 불행은 세 가지 불찰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그는 괘씸한 호화나찰에게 상전의 행사를 방해한 죄를 응징하러 달려들기 전에 까진 이마를 가린 두건을 벗고 코밑과 턱에 더덕더덕 붙였던 수염도 뗐어야 했다. 흑도들을 때려눕힌 후 극적인 등장을 알리기 위해 변장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가 그를 몰라보고 하극상을 범하게 하는 우를 초래하고 말았다.
둘째, 짧은 공방전에 밀렸을 때라도 신분을 밝히고 상황을 수습했어야 했다. 그랬으면 남성을 상실하는 최악의 사태는 모면했을 터였다.
셋째, 아무리 급했어도 비수는 꺼내 들지 말았어야 했다. 차소영은 일류의 무인일뿐더러 부친 사망 후 홀로 강호를 떠돌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여인이었다. 상대의 살기와 비장의 수가 지닌 흉험함을 간파하고도 남을 그녀로서는 생존을 위해 최강의 수법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의 경과는 다음과 같았다.
이틀 만에 정신을 차린 오준상은 그를 고자로 만든 ‘미친년’의 목줄을 따겠다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놀랍게도 그녀가 절정의 고수로 위명을 떨치는 금강권 고량의 연인임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개차반이라도 오준상은 금강권의 복수를 두려워할 정도의 이지는 갖고 있었다.
백도방주 오재현은 맡은바 소임을 다하다 벌어진 불상사라는 점을 들어 차소영을 방면해 달라는 고량의 간청을 거부했다. 그러고는 그녀의 몸값으로 황금 일백 관을 책정했다.
터무니없는 액수였으나 고지식한 고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들였다. 오재현의 계산대로였다. 고량의 의숙이자 주안의 거부인 삼보장주 노덕이라면 얼마간 무리가 따르더라도 황금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진천이 대꾸 없는 오재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방주께서 이번 사태를 계기로 고 형의 심사를 이해하게 되었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암담했겠습니까?”
오재현이 진천을 쏘아보았다.
“나더러 똑같이 당해 보란 말이더냐? 결국 본방을 도와주지 않겠다는 뜻이렷다?”
진천은 대답 대신 반문했다.
“제게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모든 걸 밝히셨습니까?”
“무슨 소리냐?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려 주었다.”
“빠뜨린 게 있을 텐데요. 거짓말도 하셨고.”
“머리를 과신하는구나. 함부로 넘겨짚지 마라. 내가 무얼 빠뜨리고 무슨 거짓말을 했단 말이더냐? 발을 뺄 구실을 구하려고 구차스럽게 굴지 말고 딱 잘라 거절을 하려무나. 그러면 나는 전날의 맹세를 어긴 죄를 물어 마령 문가에 앞서 너와 이곳의 사안부터 정리하련다. 어차피 이십오 일 후면…….”
잔뜩 흥분해서는 협박성 발언을 내뱉던 오재현이 말끝을 흐렸다. 위협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진천의 안광이 엄격해졌다.
“거짓말부터 따져 보지요. 아까 귀 방의 재산을 다 긁어모아도 황금 일천 관도 나오기 어렵다고 했잖습니까? 하지만 작년 여름 삼보장의 자산을 삼등분해 하나를 가져가셨으니 그것만 해도 족히 그 정도는 될 터인데요?”
“그건…….”
“어제 도화각주님에게 그에 관해 자세히 들었으니 부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파혼도라는 이가 요구한 ‘일만 관’은 충동적으로 내뱉은 숫자가 아닐 겁니다. 얼핏 차 소저와 방주님의 차자에게 일어난 일과 흡사해 보이지만, 저는 이번 사태가 돌발적인 사고였던 그때와 달리 처음부터 마령 문가의 계획 아래 진행되었으리라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귀 방의 재산 규모를 사전에 조사하고 파악해 두지 않았을까요? 추측건대 ‘황금 일만 관’은 귀 방이 감당할 순 있지만, 그리되면 파산을 각오해야 하는 금액일 듯싶습니다. 즉, 마령 문가는 방주께 양자택일을 강요한 것입니다. 망하더라도 목숨은 보존할 텐가, 아니면 재산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 텐가?”
오재현이 이를 갈았다.
“……어떻게 일군 사업인데. 설령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승냥이들에게 거저 갖다 바칠 순 없다. 네 지적이 맞다. 황금 일만 관은 결국 본방이 거느린 모든 도방과 기루의 소유권을 내놓으라는 개소리다.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굴하지 않을 것이다.”
오재현의 동공에 절망과 투지라는 이질적인 감정이 동시에 일렁거렸다.
“거짓말에 대해서는 사과하마. 행여나 네가 나중에……. 아니다. 변명하지 않겠다. 얄팍한 짓거리였다. 그런데 내가 빠뜨렸다는 건 무엇이더냐?”
오재현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령 문가에 용서를 구하며 합의금을 일천 관으로 낮춰 달라고 요청하는 서찰을 보냈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런데? 일말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다.”
“그들에게 보낸 게 서찰뿐이었습니까?”
오재현이 일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진천은 침묵으로써 압박했다. 오재현이 준엄한 진천의 시선을 외면하고 천장으로 눈을 올렸다.
“그래, 서찰 말고 다섯 개의 수급도 함께 보냈다.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성의 표시이니.”
진천의 음성에 노여움이 묻어났다.
“성의가 아니라 만행입니다. 그날 그 자리에 있던 도차들은 차 소저가 그랬듯 자기 임무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그들에겐 고 형 같은 뒷배가 없었지만 그들 역시 차 소저만큼이나 소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백도방의 재산을 모조리 넘겨주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목숨 하나하나는…….”
진천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하잘것없는 하급 도차들을 빌미 삼아 원조를 거절할 심산이라 판단한 오재현이 반발하려 했다. 그러나 진천이 한발 빨랐다.
“여하간 귀 방을 도와 마령 문가에 맞서겠습니다. 그들도 무고한 죽음들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막 노화를 발산할 참이었던 오재현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귀 방을 돕겠다고 했습니다.”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니?”
진천의 입에서 답이 흘러나옴에 따라 오재현의 안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 * *
진천이 혈도를 풀어 주자 노덕이 눈을 떴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잠시 어리둥절해 있던 노덕이 서둘러 침상을 내려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오 방주가 대인의 수혈을 짚었습니다. 저하고 단둘이 얘기를 나누고 싶었답니다.”
“아! 그랬구먼, 그런데 봉천에서는 별일 없었는가? 자네 걱정에 모두들 밤을 새웠다네.”
“보시다시피 아무 일도 없이 멀쩡합니다, 대인.”
대답을 하면서 진천은 절로 쓴웃음이 났다. 하마터면 삼보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여상구의 지하 연무장에서 황천길로 떠날 뻔하지 않았던가.
“도화각주는 외인을 꺼리고 성미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위인일세. 그가 현아의 청을 받고 자네에게 해코지를 하려 들까 봐 심히 불안했다네. 자네를 믿지만 여 각주 또한 워낙 쟁쟁한 무명의 소유자라서 도무지 안심이 되질 않더구먼. 끝까지 말릴 걸 자네를 그냥 보냈다고 얼마나 자책했는지 모른다네. 하룻밤 새 몇 년은 늙은 것 같으이. 이렇게 자네가 무사한 걸 보니 감사할 따름일세.”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대인.”
“허어, 제발 그런 말 말게. 내 일로 인해 수고하는 것만으로도 자네에게 면목이 없는데.”
진천이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대웅이 왜 정문 근처에 몽둥이질을 했는지 아십니까?”
노덕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어제 여기에 여러 일들이 있었다네. 오 방주의 방문이 가장 큰 일이었지만 그전에 두 번의 사건이 일어났다네. 자네가 본 자국은 그중 하나의 결과일세. 어떤 상황이었는지 짐작하겠는가?”
진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각이 턱없이 부족해 그럴듯한 그림을 그리기 어려웠다.
“대웅이 땅바닥에 철곤을 내리친 건 과시용이나 위협용일 텐데요. 자국이 생긴 위치로 보아 후자일 듯싶습니다만. 혹시 삼보장에 들어선 누군가에게 겁을 주기 위해 그 친구가 몽둥이질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노덕이 감탄했다.
“허어, 마치 직접 본 것처럼 맞추는구먼. 그랬다네. 대웅 군은 방문객을 쫓아 버리기 위해 몽둥이를 휘둘렀다네. 그치는 땅이 쩍 갈라지는 걸 보고는 눈알이 튀어나올 듯 놀라더니 꽁무니가 빠져라 달아나더구먼.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더니…… 얼마나 마음이 급했던지 벗겨진 신발을 챙기지도 못하고 가 버렸지 뭔가. 대웅 군은 신이 났고 말일세.”
진천은 으스대는 대웅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 방문객이 누구였습니까?”
노덕이 다시 진천을 시험했다.
“자네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일세.”
진천은 머리를 굴렸지만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노덕이 정보 조각 하나를 더 던졌다.
“대웅 군도 그를 본 적이 있다네.”
진천이 처진 눈을 치떴다.
대웅과 그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 대웅이 위협을 가해 쫓아냈다면 뭔가 그에게 언짢은 언행을 보였다는 뜻이었다. 대웅의 무력시위가 있기 전 자신만만해했다는 것으로 보아 방문객은 무인일 공산이 컸다.
언뜻 백도방의 사흉이 떠올랐지만 바로 지워 버렸다. 백도방주 오재현이 그들 가운데 하나를 선발로 보냈다면 대웅과의 시비를 피했을 터였다. 더욱이 그들은 대웅의 무위를 알기에 대웅이 구태여 몽둥이질로 힘을 과시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누구인가.
불현듯 하나의 이름이 떠오른 진천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