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44
제43화
진천이 머릿속 한 귀퉁이에서 기억하는 게 신기하다 싶은 이름 하나를 끄집어냈다.
“곽찬.”
한 달 전, 주안으로 오는 길에 들렀던 포성에서 보았던 인물이었다. 당시 그는 자하무관 출신의 송구와 포성 무림 대회의 십육강전을 치르고 있었다.
진천은 노덕과 함께 비무대에서 멀리 떨어진 건물 지붕에서 그들의 비무를 지켜보다 대웅과 조우했었다.
“허어, 자네가 맞추리라 생각했으면서도 놀랍구먼. 자네는 무공이 아니라 이 방면으로 나갔어도 크게 성공했을 걸세. 참으로 대단하이.”
노덕의 찬사에 진천은 쑥스러워했다.
“대인께서 답을 알려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잖습니까? 패를 보고도 짝을 맞추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요.”
“그렇지 않네. 꼬리만 보고 몸통이 무언지 알아맞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세.”
반박하는 것도 우스운 노릇인지라 진천은 더 이상의 겸양을 삼갔다.
“이왕 하는 김에 하나만 더 하세나.”
진천은 노덕의 다음 질문을 예상했다. 예상한 대로였다.
“그가 왜 삼보장을 찾았을 것 같은가?”
즉답을 하면 또 노덕이 구름 위에 띄울 게 빤한지라 진천은 고심하는 척했다. 하지만 삼척동자도 풀 만큼 간단한 문제였다.
삼도방의 곽찬은 그날 대웅이 예언한 대로 팔십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포성 무림 대회의 우승자가 되었다. 세인들은 당연히 그와 전 대회 우승자인 하남편봉을 비교하며 누가 더 센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을 터였다. 갑론을박이라고 했지만 절대다수는 하남편봉의 우세를 점쳤을 게 뻔했다. 곽찬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무림 대회의 당기 우승자가 그보다 나은 평가를 받는 전기 우승자를 찾아가 우열을 가리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곽찬 또한 하남편봉을 상대로 멋진 승리를 거둠으로써 세간의 일방적인 열세 평을 일거에 뒤집고 싶었을 것이었다. 다만 곽찬은 값어치가 떨어진 하남편봉보다는 그녀를 물리친 신성을 잡는 것으로 목표를 변경했을 터였다. 말하자면 봉(鳳) 대신 용(龍)을 잡으려는 심산이었으리라.
“그는 저를 꺾고 제가 얻은 무명을 취하려 했을 듯싶습니다만.”
진천의 말에 노덕이 어김없이 탄성을 뱉어냈다.
“허어, 역시. 그렇다네. 어제 해 질 녘에 삼보장에 들어와서는 대뜸 ‘하남신룡’을 불러내라고 윽박지르더구먼. 워낙 그자의 기세가 사나워 움찔했던 대웅 군이 별안간 ‘내 친구를 만나려면 나부터 넘어야 돼!’라고 소리치더니 쇠몽둥이를 바닥에 내리쳤지 뭔가. 굉장한 위력이었네. 구름 위에서 만근거석이 떨어진 듯 지축이 울리고 열 개의 벼락이 한자리에 꽂힌 것처럼 땅이 갈라졌으니. 그걸 본 곽가는 혼비백산하더니 칼을 뽑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바로 줄행랑을 쳤다네.”
“그랬군요.”
“대웅 군은 지난번 오인결에서의 쾌승으로 자신감이 붙은 모양일세. 나는 그가 곽가의 거친 언행에 움츠러들어 자라가 될 줄 알았다네. 그런데 바로 목을 빼고 용기를 내더구먼.”
진천은 쓴웃음이 났다. 노덕의 분석도 일리가 있으나 대웅이 무력을 과시한 건 자신감의 발로가 아니라 자신의 조언에 따른 행동일 공산이 컸다.
진천은 잔살광마로 알려진 일 사부가 정맹의 무인들에게 쫓겼을 때 썼던 수법을 대웅에게 알려주었다. 일 사부는 도주하는 도중에 석조 건물의 벽을 박살 냄으로써 추적자들을 벗어나곤 했다. 설익은 데다 한 번밖에 구사할 수 없는 절멸도(絶滅刀)였지만, 정맹의 고수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의 무위에 충격을 받은 추적자들의 발이 느려진 틈을 타 일 사부는 쏜살같이 달아났다.
진천은 대웅에게 싸움을 회피하고 싶으면 사전에 무력행사를 하라고 일러 주었다. 물론 특별한 경우에만 써먹으라는 덧붙임도 잊지 않았다. 응급 처방은 자주 사용하면 할수록 약발이 떨어지는 법이었다.
진천이 심중의 의문을 제기했다.
“고 형이 옆에 있었다면 대웅이 나서지 않았을 텐데요. 곽 무인이 삼보장에 들자마자 소리를 질렀다면 나와 보지 않았을 리도 없고요.”
노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놓치지 않는구먼. 의질은 당시 후원의 연무장에서 성주 성가의 후기지수와 비무를 벌이고 있었다네. 아까 내가 오 방주가 오기 전에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첫 번째 방문객이 성가의 신예였다네. ‘하남신룡’에게 명가의 위엄을 보여 주겠다며 거드름을 피우더구먼. 의질은 분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네. 그러면서 자네를 보려면 자기를 먼저 넘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지. 대웅 군이 곽가에게 했던 말은 기실 의질을 흉내 낸 것이라네. 성가의 후인은 꿩 대신 닭이라고 여겼는지 의질과의 비무를 받아들였네. 금강권의 무명도 작지는 않지 않은가. 비무는 삼십 초도 안 돼 끝났다네. 관전하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차 소저에게 듣기로는 어른과 아이의 대결이었다는구먼. 아무것도 못 해 보고 일방적으로 밀리던 성가의 애송이는 나중에 다시 보자는 말을 하고는 떠났다네. 패배를 인정하지도 않고 말일세.”
“고 형이 저 때문에 고생했군요.”
“앞으로 그런 일이 잦을 걸세. 자네의 명성을 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불나방들이 수시로 본장을 찾아올 걸세. 하지만 자네는 성가신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 듯싶으이. 의질과 대웅 군이 자네에게 이르기 전에 헛된 욕심을 부리는 자들을 다 쫓아 버릴 테니 말일세.”
진천은 그저 씁쓸할 따름이었다.
이제는 진천이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였다.
진천은 봉천행의 결과를 알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테지만 차마 묻지 못하는 노덕에게 직설했다.
“대인의 따님과 만났습니다. 실은 도화각주님을 먼저 만나 대인의 입장에서 정리한 과거의 전모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분이 그녀에게 내용을 전해 주었고요.”
노미현의 반응이 궁금할 터인데도 노덕은 묻지 못했다.
“도화각주님은 대인의 진술을 믿겠다고 했습니다.”
노덕의 축 늘어진 노안이 휘둥그레 떠졌다.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아아…….”
노덕의 동공에 피어오른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기 싫었지만, 진천은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따님은 아직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진실을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필요할 듯싶습니다.”
“…….”
진천이 노덕을 위로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대인.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저는 그녀에게서 긍정적인 신호를 보았습니다. 전날 말씀드린 것처럼 그녀는 모친의 한을 물려받았으되 잠식된 상태는 아닌 듯했습니다. 대인께서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간 마음을 돌리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부디 힘을 내십시오.”
노덕은 목이 메었다.
“자네의 은혜가 한량없구먼.”
“은혜라니, 받들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무언가?”
“도화각과 백도방이 전날 삼보장에서 가져간 재산을 전부 돌려주기로 했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말입니다.”
노덕의 눈이 튀어나올 듯했다.
“허어, 자네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기에 진천은 어깨만 으쓱거렸다.
“하나 더 있습니다. 도화각과 백도방은 대인의 관점에서 술회한 삼보장의 비사(悲事)를 널리 알리기로 했습니다. 그래야 공평하지요. 세상 사람들이 부부의 주장 중 어느 쪽을 인정할지는 모르지만 저는 대인에게 씌워진 굴레가 벗겨질 가능성이 크리라 봅니다.”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던 노덕이 간신히 말을 뱉었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으이…….”
진천이 노덕의 손을 잡았다.
“꿈이 아닙니다, 대인. 이제 정신없이 바빠지실 터이니 건강 관리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노덕이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분부를 따르겠네. 따르고말고.”
눈물을 참기 위해서 노덕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오 방주의 방문 목적이 뭐였던가? 밤새도록 자네의 신상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기만 하고 우리의 질문에는 함구로 일관했다네.”
진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는…….”
첫마디를 꺼내고는 진천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처진 눈이 올라가자 노덕이 물었다.
“왜 그러는가?”
“방금 삼보장에 마차 한 대가 들어왔습니다.”
노덕의 누런 낯이 하얗게 질렸다. 보통의 마차라면 진천의 눈꼬리가 올라가지 않았을 터였다. 진천이 그의 불안감의 실체를 확인해 주었다.
“대인의 따님이 온 것 같습니다.”
노소는 와옥 밖으로 나갔다.
네 필의 준마가 끄는 고급 마차가 마당에 서 있었다. 고량이 마부석에서 뛰어내리자 마차 문이 열리더니, 양쪽에서 젊은 남녀가 나왔다. 대웅과 노미현이었다.
진천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고량이 막 반대편 와옥을 빠져나온 차소영에게 달려갔다. 진천과 노덕에겐 일별도 주지 않고 노미현이 고량을 따라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홀린 듯 쳐다보던 대웅이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진천에게 돌진했다.
“야!”
진천의 코앞에서 발을 멈춘 대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고막 터질 뻔했다, 대웅. 왜 그래?”
진천이 콧김까지 뿜어내며 씩씩거리는 대웅에게 물었다.
“그러기야? 그러기냐고?”
“뭘?”
“흥, 시치미를 떼다니. 실망이다, 천. 억만금보다 귀한 신의를 그렇게 배반하기 있냐?”
밑도 끝도 없는 대웅의 비난에 진천은 반발하기보다는 그의 속을 헤아렸다.
무엇이 이 친구를 흥분하게 만들었을까. 언뜻 한 가지 답이 떠올랐으나 진천은 즉시 삭제했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어떻게 나를 두고 다른 이와 형제 결의를 할 수 있냐고? 네가 그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정말 몰랐다. 나잇살에 어울리지 않는 징그러운 낯짝을 가진 그 늙은이가 뭐가 좋다고 형님으로 삼아. 그치가 말끝마다 아우님, 아우님 하며 나불거리는데 치가 떨리더라. 네 면을 봐서 꾹 참았지 안 그랬으면 내 몽둥이로 그놈의 주둥이를 뭉개 줄 뻔했다고.”
설마 했던 직감이 들어맞자 진천은 허탈했다. 대웅은 그와 의형제가 된 도화각주에게 질투가 난 것이었다.
“우리도 형, 아우로 지내자는 걸 네가 거부했잖아, 대웅.”
“그거와 이거는 달라. 그리고 나는 아우 따윈 필요 없어. 아우라면 넌덜머리가 난다고. 아무튼 너는 나를 배신한 거야, 천. 죽음도 갈라놓지 못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우리의 우정을 이토록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다니. 그러기야?”
대웅의 억지에 어이가 없었지만 진천은 인내심을 잃지 않고 그를 달랬다.
“네 말이 맞다, 대웅. 그거와 이거는 다르다. 너와 나는 서로에게 강호에서 사귄 첫 번째 벗이잖아. 우리가 앞으로 누구와 어떤 친교를 맺든 그 ‘특별한’ 사실을 바꿀 순 없어.”
우측의 와옥 쪽으로 멀어져 가는 노미현을 힐끗 바라본 대웅이 미끼를 물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네가 그걸 알고 있으니 이번만은 너그러이 눈감아 주마. 뭐, 우리가 대체 불가의 특별한 관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들과의 인연을 무작정 차단해서도 안 되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천?”
“그럼. 네 뜻이 내 뜻인데.”
대웅의 기분이 풀리자 진천이 노미현 쪽으로 턱짓을 하며 미뤘던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냐, 대웅?”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대웅이 아니라 노미현과 차소영을 두고 진천 등이 선 곳으로 다가왔던 고량에게서 나왔다.
“도화각의 여 각주에게서 네가 해가 뜬 직후에 출발했다는 말을 듣고 우리도 돌아오려는데 미현이가 같이 가자고 따라나서더구나. 그래서 그녀의 마차를 타고 함께 왔다.”
“그랬군요.”
진천에게 예기치 않은 노미현의 행동에 담긴 이유를 추론할 여유를 주지 않고 고량이 물었다.
“백도방주는 만났나?”
“그렇소. 불과 일다경 전쯤에 돌아갔소.”
대웅이 질문을 이었다.
“그 흉측한 노괴가 왜 너를 찾아왔대?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고 잔뜩 무게를 잡고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더라, 그 늙은이.”
“자기를 도와 달라더라.”
“뭘?”
“마령 문가와 싸우는 걸. 그러마고 했다.”
진천의 대답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노미현의 등장에 안절부절못하던 노덕조차 그녀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진천에게 시선을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