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47
제46화
“가린은 싸운다. 너는 약속을 지킨다.”
괴인이 으르렁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달려들려는 듯 자세를 낮췄다.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괴인의 면상을 직시하며 진천이 양팔을 벌렸다.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물론 나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가린. 하지만 여기선 안 된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괴인이 뿜어내는 맹렬한 투기(鬪氣)에 잔뜩 주눅이 든 대웅과 경계심이 최고조에 올라 바짝 긴장한 고량을 대신해 노미현이 물었다.
“저이는 누군가요?”
진천은 노미현이 아니라 대웅에게 동문서답했다.
“노 소저와 같이 있어라, 대웅.”
겁을 집어먹은 기색을 감추려고 안간힘을 쓰던 대웅이 철곤을 빼 들었다.
“그래, 천. 노 소저는 걱정하지 마라.”
대웅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노미현의 앞에 섰다.
“고 형은 차 소저와 지 국주님이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해 주시오.”
고량은 진천의 지시를 거부했다.
“나는 너를 거들고 싶다.”
진천도 고량의 청을 거절했다.
“그럴 필요 없소. 개인적인 일이니 내게 맡겨 주오.”
괴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진천이 후원을 향해 걸어갔다. 괴인이 어슬렁거리는 걸음걸이로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별채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자 노미현이 참았던 날숨을 토해 냈다.
“도대체 누구죠?”
대웅도 고량도 답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 고량이 무언가 생각난 듯 갑자기 인상을 썼다.
“그자는 대(大)밀림의 이족일 거다.”
“하남 무림 이남의 밀림 말인가요?”
“그래.”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단신에 체격도 왜소하다고 들었는데요.”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정말 무서웠어요. 마치 산중에서 호랑이를 만난 느낌이었어요.”
대웅이 대뜸 큰소리를 쳤다.
“호랑이쯤은 백 마리가 달려들어도 내 몽둥이 한 방이면 쫓아 버릴 수 있소. 노 소저는 조금도 두려워할 것 없소.”
완벽한 좌우 균형을 자랑하는 노미현의 입술이 살짝 비틀렸다.
“정말 든든하군요.”
그녀의 음성에 담긴 조롱기를 감지하지 못하고 대웅이 헤벌쭉 웃었다. 그를 무시하고 노미현이 고량을 보았다.
“진 소협은 괜찮겠지요, 오라버니?”
“그 거인이 내가 짐작하는 인물이 맞는다면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무슨 말이죠?”
“전날 천은 밀림에서 어느 이족과 싸우다가 팔과 발목이 부러진 적이 있다고 했다. 그자가 그 이족이라면 천이라도 간단히 다루기는 어려울 게다.”
노미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러면 가서 도와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마령 문가와의 소인결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부상이라도 당하면 큰일이잖아요.”
고량이 고개를 저었다.
“혼자 처리하겠다는 천의 뜻을 거스를 순 없다.”
대웅이 이복남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만약 천이 그 덩치에게 깨지면 내가 즉시 복수할 테니 염려 붙들어 매구려, 노 소저.”
오누이는 대웅의 호언을 못 들은 척했다.
* * *
후원의 연무장에 이른 진천은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그가 발을 멈추자 괴인은 연무장 끄트머리에 섰다. 진천은 오는 동안 그의 등을 노리지 않은 괴인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괴인은 흉포하되 정정당당한 성정이었다.
진천은 괴인이 언젠가 삼보장을 찾으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창인을 떠나며 진천은 장초 등에게 청면(靑面)의 거한이 나타나면 절대로 부딪치지 말고 자신의 행방을 알려 주라고 신신당부했다.
청면괴인, 가린은 식인의 습성을 가진 아타족(族)의 수호신이었다. 진천은 고전 끝에 그를 제압한 후 이틀 동안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가린은 중원어를 이해하는 데 크게 어려움이 없었고 어눌하지만 구사도 가능했다.
진천은 가린에게 자신을 다음번 제물(祭物)로 삼도록 꼬드겼다. 패배로 인한 분노에 휩싸인 가린은 진천이 던진 미끼를 기꺼이 물었다. 그를 이기고 먹기 전에는 식인은 물론이고 살인도 하지 않겠다는 가린의 언약을 받아 낸 진천은 창인의 위치를 알려 주고는 아타족을 떠났다. 정확히 넉 달 전의 일이었다.
진천은 가린이 어떻게 삼보장까지 찾아왔는지 신기했다. 창인이야 밀림 부족들의 도움을 얻어 어렵지 않게 도달했을 터이지만, 거기서 주안까지는 전혀 얘기가 달랐다. 중원의 지리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잘 아는 허 노야가 상세한 경로를 알려 주었다고 해도 직선거리로만 육천 리에 이르는 장도가 아닌가. 더욱이 가린은 눈에 확 띄는 외관의 소유자였다. 필시 주안까지 오는 동안 크고 작은 소동을 일으키거나 소란에 휘말렸을 터였다.
가린의 여정이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진천은 나중에 물어보기로 했다. 지금은 그와의 이차전(二次戰)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진천이 소매에서 쇠구슬 하나를 꺼냈다.
철구를 본 가린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전날의 일전에서 그의 눈을 공략하던 돌멩이들에게 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번의 용도는 달랐다.
“이걸 던질 거다, 가린. 구슬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시작하자.”
진천의 말에 가린이 엎드리다시피 자세를 한껏 낮췄다. 진천이 엄지에 올려놓은 쇠구슬을 위로 튕겼다. 수직으로 치솟은 철구가 사오 장의 높이에서 정점을 찍은 후 하강했다.
탕!
쇠구슬이 연무장의 돌바닥에 부딪치며 기음을 냈다. 그와 동시에 가린의 거대한 몸이 진천에게 짓쳐들어왔다.
* * *
진천은 측보를 밟으며 성난 황소처럼 돌진해 오는 가린을 빗겨 냈다.
육박전을 장기로 삼는 그였지만, 가린과의 정면충돌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린의 괴력은 절정 고수의 공력을 능가했다. 그의 주먹에 적중당하면 곰 발바닥에 두들겨 맞은 토끼 꼴이 될 터였다. 조공(爪功)을 익힌 무인의 강조(剛爪) 같은 손톱도 주의해야 했다. 그 손톱에 걸리면 뼈까지 잘릴 게 뻔했다.
충돌을 회피하며 진천은 연무장을 넓게 활용했다. 가린은 잡힐 듯 말 듯 하면서도 진천이 매번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자 부아가 치민 듯 괴성을 질렀다. 그러나 진천으로서도 여유 있는 형국은 아니었다.
가린은 발이 빨랐다. 속도만 따지면 진천을 능가했다. 거기에 몸놀림 또한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유연하고 날렵했다. 제한된 공간 안에서 팔영보만으로 버티기엔 버거운지라 진천은 간간히 철구를 날려 가린의 접근을 견제해야 했다. 가린은 눈을 노리고 날아오는 쇠구슬들을 가볍게 쳐 냈다.
일차전과 마찬가지로 진천의 고전이었다.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린을 물리치려면 절멸도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다른 방법을 모색하려다 전날처럼 그에게 잡히는 날엔 끝장이었다.
그날 가린에게 발목을 붙들린 진천은 지옥을 경험했다. 무지막지한 거력에 발목이 으스러졌을 뿐만 아니라 땅에 패대기쳐지는 바람에 왼팔이 부러져 버렸다. 만약 흙이 아니라 지금과 같은 돌바닥이었다면 상체의 좌측이 모조리 으깨졌을지도 몰랐다.
천만다행으로 의식을 잃지 않고 가린의 눈을 찌른 덕분에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지만, 실로 아찔했던 위기였다. 일차전의 실수를 되풀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진천은 마침내 역천기결을 운용했다. 곧이어 그의 왼손에서 절멸도가 돋아났다.
진천의 좌수에서 고드름 같은 것이 튀어나오자 그를 잡으려 발광하던 가린이 주춤거렸다. 그러고는 훌쩍 물러섰다. 진천은 즉시 그가 비운 공간을 메우며 전진했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가린은 달아나고 진천은 쫓았다. 비무대의 개념이 없는 가린이 연무장을 벗어나 죽림으로 들어갔다. 대나무 숲을 파괴하긴 싫었기에 진천은 그를 추적하지 않고 멈춰 섰다.
잠시 후 가린이 다시 튀어나왔다.
“항복이냐, 가린?”
“카앗!”
진천의 질문에 가린이 노기를 터뜨리며 행동으로 대답했다. 진천은 일직선으로 돌진해 오는 가린에게 절멸도를 겨냥했다. 가린이 감히 맞서지 못할 거라 자신했던 진천은 그가 방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달려들자 당황했다. 가린은 칼에 맞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붙잡을 심산임에 분명했다.
예상치 못했던 가린의 승부수에 진천은 맞불을 놓는 대신 후퇴를 선택했다. 전날처럼 가린의 복부에 절멸도를 꽂아 넣는 정도로는 그를 제지하지 못할 공산이 컸다. 그렇다고 목을 자를 수는 없었기에 일 수 양보는 불가피했다.
기세가 오른 가린이 바짝 따라붙으며 길이와 두께 모두가 진천의 두 배에 달하는 팔을 휘둘렀다. 머리를 젖혀 아슬아슬하게 갈고리 같은 손톱을 피해 낸 진천은 뒤로 누우며 앞으로 미끄러졌다.
반환(反環)! 관성을 거스른 신묘한 움직임에 깜짝 놀란 가린이 뱀을 밟은 말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그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가며 진천은 절구통 같은 가린의 오른쪽 종아리에 절멸도를 긋는 데 성공했다.
가린이 착지하며 비틀거렸다. 진천은 재차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거리를 벌렸다. 가린이 부상에도 불구하고 다시 달려들 기세이자 진천이 소리쳤다.
“그만, 가린.”
진천의 명에 응해 발을 세웠으면서도 가린이 전의를 밝혔다.
“가린은 싸운다.”
진천은 손바닥을 내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네가 다치면 중단하기로 합의했잖으냐?”
가린이 고집을 부렸다.
“가린은 안 다친다. 가린은 싸운다.”
가린을 응시하던 진천이 절멸도를 갈무리했다. 맥이 풀린 듯 가린의 어깨가 처졌다. 진천의 검지가 천공을 가리켰다.
“내가 이겼다. 약속대로 너는 저런 보름달이 세 번 더 뜬 후에 나와 다시 싸울 수 있다.”
가린이 진천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내 길게 숨을 들이쉬더니 진천의 판정을 수용했다.
“가린은 나중에 싸운다.”
* * *
진천은 가린에게 걸어갔다.
“밀림으로 돌아갔다가 올 텐가?”
가린의 파란 면상에 난처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진천은 그의 속을 헤아렸다.
“그러기엔 너무 멀긴 하군. 오가는 데만 석 달이 다 갈 테니. 그러면 여기서 나하고 같이 지내는 게 어때, 가린?”
진천의 제안에 솔깃한 기색이었으나 가린이 박처럼 커다란 머리를 흔들었다.
“가린은 산에 간다.”
진천은 가린이 주안 외곽의 효주산맥에 가려 함을 알았다. 곤란했다. 가린은 보기와 달리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온순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얌전했지만 자극을 받으면 상처 입은 맹수처럼 흉포해졌다. 험준하다고는 하나 약초꾼들과 사냥꾼들의 발길이 잦은 산중에 괴수 같은 거인이 거하면 어떤 불상사가 발생할지 몰랐다. 소문이라도 퍼지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게 불 보듯 뻔했다.
진천은 가린을 구슬렸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이곳에 있으면 무공을 배울 수 있다, 가린.”
가린의 귀가 쫑긋 섰다. 제대로 급소를 찔렀음을 알아차린 진천은 쐐기를 박았다.
“너는 더 강해져야 한다, 가린. 그렇지 않으면 석 달이 아니라 삼 년이 지나도 나를 꺾을 수 없다. 너도 알 테지?”
가린은 어눌했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가린은 어지럽다. 너는 죽음을 원한다.”
“아니, 나는 죽음을 원하지 않아, 가린. 네가 강해지는 것만큼 나도 더 강해질 테니까. 그러려고 온 힘을 다해 노력할 거다. 하지만 네가 언젠가 나를 따라잡는다면, 그래서 나를 이긴다면 약속대로 내 몸을 주마.”
진천의 진의를 탐색하듯, 가린이 부리부리한 눈을 일자로 붙이고는 뚫어져라 응시했다. 진천은 조용히 기다렸다. 이윽고 가린이 결정을 내렸다.
“가린은 머문다. 가린은 무공을 배운다.”
진천이 싱긋 웃었다.
“좋아, 가린. 이곳의 주인은 아니지만 네 방문과 동거를 환영한다.”
진천은 아타족의 친선의 인사를 나누기 위해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모험이었다. 가린이 주먹을 마주 내밀어 맞부딪치는 대신 불문곡직 낚아챈다면 낭패였다. 그러나 진천은 가린을 믿어 보기로 했다. 가린은 그의 믿음에 화답했다.
쇳덩이 같은 가린의 주먹이 그의 정권에 살짝 닿자 진천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린이 뒤통수를 칠 유형이 아님을 다시금 확인한 것은 안전 이상으로 소중한 성과였다.
“가자, 가린. 내 친우들을 소개해 주마.”
하지만 진천과 가린은 굳이 와옥으로 갈 필요가 없었다. 대웅과 고량이 노미현을 호위하듯 중간에 두고서 연무장으로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긴장이 풀려 평온한 신색이었지만 두 사내의 얼굴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