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48
제47화
진천은 고량과 대웅이 별채의 지붕에서 그와 가린의 비무를 지켜보았음을 알아차렸다.
밤인 데다 거리가 멀어 노미현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테지만, 절정의 무인인 그들 두 사람에겐 대낮에 지척에서 관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을 터였다. 그들은 일방적으로 몰리던 진천으로 하여금 단박에 역전을 이루게 한 비장의 패를 보았음에 틀림없었다.
“그게 뭐냐, 천?”
대웅이 노골적으로 물었다. 그의 왕방울 눈에 절멸도를 목격한 충격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뭐가?”
진천이 시치미를 뗐다.
“야, 우리 사이에 그러기야?”
기실 타인의 비기를 캐묻는 건 금기였다. 하지만 대웅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진천이 고소만 짓자 대웅이 대답을 재촉하며 그의 목을 조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별안간 가만히 있던 가린이 씨근덕거렸다. 진천이 재빨리 말렸다.
“괜찮아, 가린. 친구들 간의 장난일 뿐이야.”
대웅을 쏘아보며 가린이 경고했다.
“가린이 먼저다.”
자기 먹이를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노미현 옆에서 기가 죽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으나, 대웅은 거한의 위압감에 오금도 펴지 못했다. 진천은 상황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 전에 수습했다.
“절멸도라고 한다. 일 사부의 무학이다.”
말을 알아듣기에 가린도 대웅에게 신경을 끄고 관심을 보였다.
“일 사부라면 잔살광마 말인가요?”
노미현이 물었다. 그녀는 진천의 내력에 대해 알고 있었다. 여상구가 진천의 동의를 얻어 그녀에게 그의 신상에 관해 알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드러내기 어려운 진실을 밝힘으로써 그녀와 신뢰를 쌓고 싶었다.
“그렇소.”
묵묵히 있던 고량도 입을 열었다.
“수강(手剛)이었나? 그런데 어째서 도(刀)라는 이름을 붙인 거지?”
“엄밀히 말하자면 강기는 아니오. 강기처럼 단단하지 않으니까. 강기와 검사(劍絲)의 중간 형태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거요. 그리고 절멸도라 칭한 까닭은 원래 도법에서 발현된 무공이기 때문이오.”
대웅이 이죽거렸다.
“쳇, 뭔가 엄청난 비술인 줄 알았는데 그냥 평범한 수법이었군. 나도 좀 무리하면 강기를 형성할 수 있는데. 내공만 따지면 내가 너보다 우위구나, 천.”
노미현이 들으라는 듯 대웅이 으스댔다.
가린이 끼어들었다.
“가린은 강기를 배운다.”
진천은 난색을 표했다.
“그건 어려울 거다, 가린. 하지만 너는 강기가 없어도 훨씬 강해질 수 있다. 강기를 부리는 무인도 이길 만큼.”
가린이 불만을 토해 내기 전에 진천이 정리에 나섰다.
“자 자, 이렇게 모였으니 서로 인사들 하자. 여긴 가린이다. 아타족의 수호자이자 파티아 숲의 제왕이지. 이들은 내 친우들이다, 가린. 둘 다 나처럼 무인들이다. 그리고 이이는 이곳의 작은 주인이다. 앞으로 신세를 져야 하니 그녀에게 잘 보이는 게 좋겠다.”
가린은 절세미녀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진천이 무인이라 소개한 두 사내에게만 관심을 보였다. 대웅은 그런 가린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대웅이다. 가린이라고? 제법이던데 나중에 나하고 한 판 하자고. 그런데 몇 살이야? 위아래는 정해야 할 것 같은데.”
웬일인지 가린이 우물쭈물하며 진천을 내려다보았다. 진천이 그를 대신해 답을 주었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대충 일백 살 정도 됐을 거야. 그렇지, 가린?”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가린의 돌출된 입술이 벌어지며 크고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노미현이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가린으로서는 엄연한 미소였다.
* * *
그날 지찬주와 가린에 이어 또 다른 방문객이 심야에 삼보장을 찾았다. 도화각주 여상구였다. 그가 올 가능성이 크리라 예상했으면서도, 막상 보니 진천은 반갑기 이를 데 없었다. 진천은 와옥이 아니라 후원의 천년노송으로 의형을 안내했다. 둘은 소나무 옆의 너럭바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아우님의 서찰을 받자마자 달려왔다네.”
“고맙습니다, 형님.”
“이제 어쩔 참인가?”
아직 고민하던 중이었기에 진천은 답을 미루었다.
낮에 백도방주 오재현이 마령 문가와 지난 이레간 협상한 내용을 들고 왔었다. 그에 따르면 마령 문가는 소인결을 받아들이되 진천이 원한 오인결이 아니라 구인결로 확대하자고 역제안을 했다고 한다.
오재현은 반드시 오인결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진천의 지시를 어기고 마령 문가의 요구를 수용했다. 칼자루를 쥔 쪽이 마령 문가이기에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댔으나 고량과 대웅을 끌어들이려는 수작에 불과했다. 둘 모두 용호단의 낮은 서열 고수들에겐 승산이 충분하다는 게 오재현의 계산이었다.
진천으로서는 난감한 사태였다. 마령 문가와의 대립이 친우들에게 피해를 줄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고량은 결과와 상관없이 그와 선친의 숙원인 용호단 입단을 포기해야 할 터였다.
그럼에도 사정을 알게 된 고량은 백도방이 아니라 진천을 위해서 구인결에 출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진천은 다른 대안을 찾아보겠다며 고량을 만류했다.
대웅은 고량에 비해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이 있는 데다 노미현에게 겁쟁이라는 비난을 받을까 봐 대놓고 발을 빼지는 못했다.
“나는 그 교활한 너구리가 처음부터 구인결로 하자고 요청하지 않았을까 의심스럽네, 아우님.”
진천의 답이 늦어지자 여상구가 운을 띄웠다.
진천은 여상구의 짐작이 반만 맞을 거라 생각했다. 오재현은 고량과 대웅을 염두에 두고 칠인결을 주장했을 터였다. 구인결은 마령 문가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방식임을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백도사흉에게 일 승을 기대하기란 난망하기 때문이었다. 오재현은 작은 이익을 취하려다 큰 손해를 본 격이었다.
“여하간 이렇게 됐으니 금강권과 철곤귀의 참여는 불가피해졌네그려. 아우님이 백도방 너구리의 수하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여상구가 본론을 꺼냈다. 사실 여상구는 고량을 배려한 진천이 옥쇄를 각오할까 봐 염려되어서 친히 삼보장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전날 진천은 오재현을 도와주는 대가로 그에게 삼보장의 재산을 돌려주고 앞으로 백도방이 정도방파에 준하는 행보를 보일 것을 주문했다. 오재현은 진천이 그를 궁지에서 꺼내 준다는 전제하에 따르겠다고 조건을 달았다.
진천은 소인결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오재현은 실망을 넘어 분노했다. 그의 입장에서 진천의 안은 백도방을 통째로 마령 문가에 갖다 바치는 짓에 다름 아니었다. 소인결에서의 승산이 희박하다 못해 전무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오재현을 데리고 후원 연무장으로 갔다. 그리고 그와 정식으로 비무를 했다. 오재현은 그의 암기 폭우를 빗겨 낸 진천의 현묘한 신법에 충격을 받았고, 그의 옆구리를 베어 버린 진천의 수강(手剛)에 경악했다.
진천은 또 하나의 패를 내밀었다. 다름 아닌 도화각주 여상구였다. 진천이 여상구의 무위가 강호에 알려진 것보다 한 단계 이상 윗길임을 밝히며 자신이 부탁하면 오인결에 나서 줄 거라 호언하자 오재현은 크게 고무되었다. 진천의 말이 사실이라면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더라도 해 볼 만한 승부였다.
암흑 속에서 한 줄기 서광이 비친 셈이었으나, 오재현은 욕심을 부렸다. 오인결에서 패배하면 졸지에 알거지가 되어야 하는 처지이니 최소한의 담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도박판의 개평처럼 최소한의 떡고물을 보장해 달라는 요구였다.
진천은 전날 고량을 판돈으로 걸었듯 스스로를 내걸었다. 출전 순서만 잘 맞추면 승산이 충분하리라 자신하기도 했거니와, 그래야 오재현이 물고 늘어지지 못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역으로 마령 문가와의 문제가 해소되면 백도방도 정도를 걷겠다는 맹세를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횡재한 셈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오재현은 군소리 없이 물러났다. 그러고는 진천과 세부적인 사항들을 의논한 후 문가와의 협상을 위해 마령으로 떠났다. 칠 일 전의 일이었다.
“혹시 외부에서 쓸 만한 이를 구할 순 없을까요, 형님?”
“아우님도 알다시피 나는 오랜 세월 은둔자로 보냈기에 친하게 어울리는 이가 한 명도 없다네. 설사 그런 이가 있더라도 마령 문가와 척을 지는 일에 나서 줄지는 의문이구먼. 문가의 위세는 자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일세.”
“그렇군요.”
“돈을 들여 마련의 마두들을 초빙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나 위험 부담이 너무 크네. 자칫하면 또 다른 호랑이 떼를 불러들이는 꼴이 될 터이니.”
“먼젓번 서찰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이번 사태와 관련해 정맹과 마련, 나아가 사패(四覇) 간에 사전 모의가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령 문가는 훨씬 정교하게 덫을 놓았을 테니까요. 아마 백도방에 벌어졌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 중립 지대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패가 각자 하나씩 먹이를 취할 속셈으로요. 그렇다면 마련은 마령 문가와의 일에 끼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나에겐 그렇게 큰 그림을 그릴 안목은 없네만, 아우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보네. 실제로 마련과 사벌 사이 중립 지대의 터줏대감인 농막(農幕)에 최근 수상쩍은 기미가 있다는 보고를 받았네. 아우님의 추론과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구먼. 어쨌거나 우리는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신경 씀세. 소인결까지 겨우 보름밖에 남지 않았잖은가.”
“알겠습니다.”
“철곤귀한테서 마령 문가의 전력을 자세하게 들었다고 했었지, 아우님? 구인결로 할 시, 그리고 금강권과 철곤귀가 우리 편에 합류할 시 승산이 어느 정도나 될 것 같은가?”
“정상적인 대결이라면 승산이 삼 할에도 미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낮은가? 아우님과 내가 승리해도 말인가? 거기에 셋만 더하면 될 터인데. 일단 백도방주가 있지 않은가?”
“마령 문가는 그가 암기공의 대가임을 알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그에 맞추어 최적의 인물을 상대로 내세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위와 무관하게 백도방주에겐 일 승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럼 큰일일세그려. 아우님 분석이 들어맞는다면 금강권과 철곤귀가 승리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지 않은가. 백도사흉 중 칠병귀가 그나마 재주 있다지만 용호를 감당할 성싶지는 않은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형님.”
여상구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걸 어떡한다? 백도방이 마령 문가에 넘어가는 거야 내 알 바 아니네만, 장차 무림의 지존이 될 아우님이 그 야비한 너구리 밑에서 십 년이나 졸개 노릇을 해야 한다니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어쩌자고 그런 약속을 했나 그래. 그 작자와 합의하기 전에 나하고라도 상의를 했으면 좋았을 것을.”
진천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형님. 제가 경솔했습니다.”
여상구가 손사래를 쳤다.
“아닐세. 명민하다고는 하나 아우님은 자신감과 혈기가 넘치는 나이가 아닌가. 아우님의 인생에 양분이 될 쓴 약이라 여기게나. 귀중한 경험이 될 걸세. 그리고 이건 아우님의 실수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 빌어먹을 너구리 잘못일세. 아우님의 복안에 따랐으면 승산이 육 할을 넘었을 터인데 제멋대로 구인결을 덥석 받았으니. 따라서 그 너구리와의 약속도 무효일세. 만약 너구리가 억지를 부리면 내 부채로 목을 따 버릴 걸세.”
진천은 의형의 말이 농담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형님. 제가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아직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동안 최선을 다해 돌파구를 찾아보겠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자세는 훌륭하네만 현실을 냉정하게 보아야 하네, 아우님. 제아무리 고수라도 마상(馬象)만 가지고 차포(車砲)를 가진 상대에게 이길 수는 없는 법일세. 이건 마치 시작하기도 전에 외통수에 몰린 격이 아닌가. 구인결이 아니라 패배 이후의 대책을 고민하는 게 낫다고 보네만.”
지극히 타당한 지적이었기에 진천은 반박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암울한 상황이었다. 기사회생의 묘수가 절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