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5
제4화
삼사 장이나 구른 고량이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노덕의 예상과는 달리 즉각 공격을 재개하지 않고 진천을 노려볼 뿐이었다. 고량의 주먹을 잡아채 그를 던져 버렸던 진천 역시 제자리를 고수했다.
“나는 오늘 당신의 무례함을 여러 번 참았소. 지금의 일수가 마지막이오. 여기서 더 나가면 당신에게 약속했던 안전 보장을 철회하겠소.”
공력이 담긴 고량의 막강한 안광을 정면에서 맞받으며 진천이 무뚝뚝하게 경고했다. 바뀐 것은 목소리와 말투만이 아니었다. 눈과 입가에 매달려 있던 미소가 사라진 그의 얼굴은 저승사자처럼 섬뜩해 보였다. 등골이 오싹해진 노덕은 입안에 고인 침도 삼키지 못하고 초조하게 고량의 반응을 기다렸다.
객잔에서 보았던 여섯 장한이 진천의 좌우로 모였다. 그들이 뿜어내는 삼엄한 기세에 노덕은 모골이 송연했다. 어쩌면 그들 하나하나가 털보에 뒤지지 않는 고수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들만으로도 어지간한 문파 전체를 감당하고도 남을 전력이었다.
형세 불리를 깨달은 듯 고량은 위축된 기색이었다.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노덕이 용기를 냈다.
“왜들 그러는가. 상견례는 이만하면 충분하니 객잔으로 돌아가 담소나 더 나누는 게 좋겠구먼.”
진천이 선뜻 굳은 얼굴을 풀었다.
“알겠습니다, 대인. 그런데 객잔 말고 다른 곳에 모시고 싶습니다.”
다시 부드러워진 진천의 태도에 안도하며 노덕이 물었다.
“다른 곳이라면?”
“대인을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여기에 나를 아는 이가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누군가?”
“가 보시면 압니다. 허 노야(老爺)가, 이런,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무튼 대인을 뵙고자 하는 어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코앞입니다. 제가 모실 테니 같이 가시지요.”
노덕이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진천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고량에게 눈을 돌렸다.
“당신은 객잔으로 돌아가구려. 계단을 올라가면 이 층에 객방들이 있소. 비어 있을 테니 아무 데나 써도 좋소.”
진천과 노덕을 일별한 고량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못 이긴 척 객잔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장한 다섯이 그를 쫓아갔다. 남은 장한에게 운기조식에 든 털보를 맡긴 진천이 고량과 반대 방향으로 노덕을 이끌었다.
그의 무릎 사정을 아는지 천천히 앞서가는 진천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노덕은 몇 번이나 말을 걸려다 자제했다. 그를 안다는 허 노야란 인물을 만나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궁금증이 해소될 것을 기대하며.
* * *
‘코앞’까지는 아니지만 목적지는 공터에서 가까웠다. 느린 걸음으로 좁은 골목을 서너 번 꺾으며 돌던 진천은 허물어진 담장이 문을 대신하는 허름한 집 앞에 멈춰 섰다.
“다 왔습니다, 대인.”
노덕은 진천을 따라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대인을 모셔 왔습니다, 노야.”
주인의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진천이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문을 열었다.
두 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협소한 탓인지 낡은 침상과 의자 하나가 가구의 전부였다. 사방의 흙벽에는 미역같이 생긴 풀들이 걸려 있었는데 거름처럼 고약한 악취를 풍겼다. 하마터면 코를 움켜잡을 뻔했던 노덕은 가까스로 손이 올라오는 것을 막고는 침상을 바라보았다. 아흔 살은 됨 직한 대머리 노인이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리고 주름과 흉터로 덮인 얼굴만 내민 채 누워 있었다.
밭은기침을 하며 노인이 노덕을 반겼다.
“어서 오게나, 노 장주(莊主).”
노인과 시선을 맞춘 노덕은 눈을 끔벅거렸다. 예상과 달리 생면부지의 인물이었다.
노인이 당황한 노덕을 내버려 두고 진천을 보았다.
“장초(張草)가 졌다던데, 많이 다쳤느냐?”
“늑골이 부러지고 아마 간도 상했을 겁니다, 노야. 허리와 다리도 온전치 않습니다. 나으려면 서너 달은 정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장초가 그리 쉽게 당할 녀석이 아닌데. 이 장주의 호위무사가 보통이 아닌 게로군. 하긴 그러니 달랑 하나만 대동하고 이 험지까지 찾아온 것이겠지. 접전이었다고 들었다만 실상은 장초가 일방적으로 밀린 건 아니더냐? 네가 보기엔 어떻더냐?”
“꽤 세더군요, 그 사람.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리지요, 노야.”
진천이 노덕을 힐끗거리자 노인이 실태를 알아차렸다.
“허어, 내 정신 좀 보게. 손님을 불러 놓고 딴소리를 하고 있었다니. 미안하네, 노 장주.”
노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노덕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어르신.”
노인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나를 몰라보는구먼, 노 장주.”
노덕이 허둥지둥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아닐세. 옛 모습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데 알아본다면 더 이상한 일이지. 더욱이 본 지 벌써 이십 년도 더 지나지 않았는가.”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난감해진 노덕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이십여 년 전에 알던 허(許)씨들을 모조리 기억에 소환했지만 노인의 정체는 오리무중이었다.
“가서 장초를 돌봐 주거라, 천아.”
노인이 진천을 쫓았다.
“네, 노야.”
노덕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진천이 방을 나갔다. 노인과 둘만 남자 노덕은 혼잡한 장터에서 잡고 있던 어미의 치맛자락을 놓친 코흘리개처럼 불안해졌다. 이 노인은 대체 누굴까.
“예의가 아니네만 몸을 가누지 못하니 누워서 얘기함세.”
“괘념치 마십시오, 어르신.”
“어르신이라니. 자네보다 겨우 두 살 위구먼. 소싯적에는 서로 이름을 부르곤 했잖은가. 그러니 편히 대해 주게나.”
“…….”
“병마에 시달리느라 내 노화가 빨리 진행된 것뿐일세. 그렇더라도 자네의 신색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는구먼.”
“외람되지만 나는 아직 어르신, 그러니까 그대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잘 생각해 보게. 몇 가지 실마리가 있잖은가. 자네보다 이 년 연상이고 젊은 시절부터 안면이 있었으며 이십이삼 년 전에 마지막으로 본 자가 누구겠는가. 하나 덧붙이자면 내가 중원에 있을 때 쓰던 성은 조(趙)일세.”
“…….”
“흠, 세월이 자네의 명민함을 앗아 간 겐가. 아니면 근간에 했음 직한 고생 탓인가. 예전의 자네라면 금방 내 얼굴과 이름이 떠올랐을 텐데. 좋아. 결정적인 단서를 주지. 함께 일하던 무렵, 우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수담(手談)을 즐겼네. 자네는 지나치리만치 실리에 민감한 기풍이었지. 자네가 매번 삼삼을 연속으로 두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두터운 포석을 짜도록 강요받은 나는…….”
“조 총관!”
“어이구, 귀는 먹지 않았으니 그렇게 고함을 지르지 않아도 된다네.”
“정녕 조 총관이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오? 그들이 천참만륙한 조 총관의 시신을 해골이 될 때까지 성문에 걸어 두었다고 들었는데.”
“말 그대로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긴 시체가 아닌가. 그게 나라는 증거는 그들의 말밖에는 없지 않은가?”
“아아, 이렇게 무사한 걸 보니 참으로 다행이오, 조 총관.”
“큰일 날 사람이구먼. 아무리 밀담이라도 쥐와 새가 밤낮으로 엿듣는다는 교훈을 잊었는가. 자나 깨나 입조심하게나. 그들이 알면 자네의 껍질을 벗긴 후 산 채로 솥에 넣고 삶을 걸세.”
노덕은 노인의 말이 농담만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십일 년 전 엄청난 거금을 횡령하고 사라진 총관의 행방을 알아내려 마령(馬嶺) 문가(文家)는 그와 친분이 있는 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잔혹한 고문을 가했다. 그중에는 방금 조인상(趙仁湘)이 말한 팽형(烹刑)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인상과는 오랜 기간 교류가 없었음에도, 마령으로부터 팔백 리나 떨어진 주안까지 노덕을 찾아온 문가의 무사들은 사흘이나 그를 괴롭히며 아는 바가 있는지 추궁했다. 노덕은 며칠이나 잠도 자지 못하고 했던 말을 수십 번이나 반복하느라 진이 빠졌던 당시의 기억이 생생했다.
한동안 중원 중서부 일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은 문가에서 두 달 후 평북 무림으로 달아났던 죄인을 체포해 갈기갈기 찢긴 몸뚱이를 성문 망루에 걸어 둠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진즉 유부(幽府)에 가서 터를 잡았을 조인상이 버젓이 살아서 그를 보고 있으니 노덕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노덕은 침상의 병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기루의 미희들을 홀리던 청수한 용모는 흉측하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격변해 있었지만 조인상인 줄 알고 보니 눈빛이 낯익었다. 그와는 육 년간 대주상단(大州商團)에서 한솥밥을 먹던 사이였다. 둘 다 혈기왕성한 이십 대 초반이었고 성격이 통하는 데다 바둑이라는 공통의 취미를 가지고 있었기에 막역하다고 할 만큼 친하게 어울렸다.
기실 그들이 가까워진 진짜 이유는 서로의 재주를 인정한 데 있었다. 대주상단을 나온 후 연락이 끊겼던 두 사람은 십여 년 후 자신들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주안에 자리를 잡은 노덕은 삼십 대 후반에 그가 거쳐 간 대상(大商)들을 능가하는 거부가 되어 명성을 날렸고, 마령 문가에 들어간 조인상은 나이 마흔에 정파오가(正派五家)에 속한 거대 가문의 총관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조인상의 근황을 알게 된 노덕은 일부러 마령까지 그를 찾아갔다. 그러나 조인상은 옛 지인의 방문에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내비쳤다. 그가 가진 막강한 뒷배를 이용할 심산으로 노덕이 접근했으리라 속단한 탓이었다.
그런 계산속이 아주 없지는 않았으나 팔구 할은 순수한 마음으로 친우의 성공을 축하해 주러 불원천리 달려갔던 노덕은 조인상의 냉대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불편했던 재회는 금방 끝났고 노덕은 쫓기듯 마령을 떠나야 했다. 그 이후 조인상과는 부상(富商)들의 회합에서 이따금 만나 어색한 인사만 나누었을 뿐이었다.
“자네에게 사과부터 해야겠구먼. 전날의 내 태도는 본의가 아니었네. 문가에 들어갈 때부터 크게 일을 벌일 작정이었기에 나로서는 의도적으로 자네를 멀리해야 했네. 나중에 자네에게 피해를 줄 게 빤하니 말일세. 나하고 어울리던 자들이 문가에 의해 어떤 곤경을 치렀는지 알 테니 내 말을 이해하리라 믿네.”
“그렇다면 그들을 처음부터 골랐단 말이오?”
“이를 말인가. 내가 문가의 칼을 빌어 처단한 자들은 엄격하게 추린 악종들이라네. 나는 그들이 이득을 취하도록 허용할뿐더러 지원까지 아끼지 않았다네. 그치들은 문가의 막대한 재산을 운용하는 총관을 제 편으로 구워삶았다고 여겨 희희낙락했지만 내가 따라 주는 술이 자기들의 목숨을 앗아 갈 독주(毒酒)임을 모르고 들이켰던 걸세. 저마다 비상한 두뇌를 가졌다고 뽐내던 너구리들이지만 기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두꺼비들에 지나지 않았네. 아, 내가 엄한 두꺼비를 폄하하는 것은 아닐세. 말이 그렇다는 거지.”
“왜 그랬소?”
“허어, 글쎄 말일세. 내가 왜 그랬을까. 그냥 문가의 권세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며 살 수도 있었는데. 아마 나쁜 놈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꼴이 보기 싫어서 그랬던 것 같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젊은 날부터 심사가 배배 꼬인 종자가 아니었던가.”
“대의를 위해 그랬다는 말이오?”
“그럴 리가 있나. 그럴듯하게 포장했지만 순전히 개인적인 원한에서 비롯된 일일세.”
“당시의 일로 망가진 이들이 허다하오. 조 총관과 연루된 자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식솔들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은 걸로 알고 있소.”
“이런, 아픈 데를 찌르는구먼. 십 년에 걸쳐 은밀하고도 면밀하게 준비했지만 나는 완벽한 사람은 아닐세. 내 복수가 일으킬 부정적인 여파를 다 예상하거나 예방하기는 불가능했네. 나로서는 선의의 피해자를 최소화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구먼. 그렇지만 자네의 비난은 쓰디쓰게 받겠네.”
“…….”
“시시한 내 얘기는 이쯤하고 자네의 사연이나 들려주겠는가? 탁월한 상술과 고결한 덕행으로 명성이 자자한 주안 삼보장(三寶莊)의 주인이 이 궁벽한 곳까지는 어인 행차신가? 자네의 동행은 호위무사라고 하기엔 너무나 불경스러운 언행을 일삼았다던데.”
“내 사정을 알기 전에 한 가지 알고 싶은 게 있소만.”
“뭔가? 말해 보게나.”
“진천이라는 청년은 얼마나 강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