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50
제49화
열흘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여유가 없는 이에게 시간은 화살보다 빠른 법이었다. 결전의 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오자 진천은 마음을 비웠다.
진인사대천명.
제 할 바를 다 했으니 나머지는 하늘에 맡겨야 했다.
진천은 백도방과의 오인결을 준비할 때처럼 대웅에게 집중적으로 공을 들였다. 여상구의 말마따나 고량이 구인결에서의 승패를 가름할 결정적인 패가 될 공산이 크지만, 그는 내버려 둬도 스스로 최선을 다할 터였다. 대웅이 초반에 약점을 들켜 허무하게 진다면 고량이 예상을 뒤엎고 일 승을 가져온다고 해도 최종적인 승리는 기대 난망이었다.
대웅은 오인결 이전보다는 나아졌으나 여전히 불안했다. 실질적인 무력이 한 뼘은 위임에도 고량과의 비무에서 일방적으로 몰리다 꼬리를 내리기 일쑤였다. 친인과 치르는 비무에서의 압박도 견디지 못하는 대웅이 실전 대결에서 본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진천은 대웅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구인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주어야 해서만이 아니라 구인결을 계기로 고질병을 치유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고량처럼 몰아붙이는 방식으로는 대웅의 증상을 호전시킬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진천은 의형의 언급을 실마리 삼아 색다른 처방전을 마련했다.
노미현을 관전자로 동원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어떤 경우에도 실망감을 표하지 말고 무조건적으로 대웅을 응원해 달라고 부탁했다. 자칫 역효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으나 정상적으로 대웅의 울렁증을 해소하기엔 시간이 너무나 촉박했기에 응급으로 취한 조치였다.
진천은 차소영도 불렀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웅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서였다. 두 여인은 각각 한 사내를 열렬히 응원했다.
효과가 있었다. 관전자들의 눈길이 자기를 공격하는 화살이라도 되는 양 허둥지둥 대다 어이없이 패배하던 대웅이 차츰 힘을 내기 시작했다. 노미현의 끊임없는 격려 덕분이었다.
“당신이 더 세다는 걸 알아요. 오라버니를 봐주지 말아요.”
“멋진 방어였어요. 이젠 멋진 공격을 보여 줘요.”
“잘했어요. 다음번엔 오라버니를 혼내 줄 거죠?”
“바로 그거예요. 이제야 진면목이 나오는군요. 오라버니는 이제 큰일 났네요.”
노미현을 의식하느라 손발이 따로 놀던 대웅은 침착성을 되찾은 정도를 넘어 신이 나서 쇠몽둥이를 휘둘렀다. 진천은 고량의 보호를 위해 수시로 비무 중간에 뛰어들어 대웅을 말려야 했다.
하지만 대웅은 진천과의 비무에서는 한계를 드러내며 다시 움츠러들었다. 상수로 인정한 이에 대한 본능적인 위축이었다. 진천은 못내 아쉬웠지만 그래도 망외의 성과였기에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대웅은 하위의 용호를 상대론 제 몫을 해 줄 것이었다.
* * *
진천은 의형과 가린을 기다렸다. 두 사람이 합류하면 금일 중 연주(延州)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오기로 한 오시(午時) 경에 삼보장을 찾은 이는 묘령의 여인이었다. 그녀를 알아본 대웅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모두들 지남철에 달라붙는 쇳가루처럼 정문 쪽으로 모여들었다.
삼보장의 삼남이녀(三男二女)를 쭉 훑어보던 여인이 진천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오랜만이네요. 약속대로 찾아왔어요.”
진천은 당혹스러웠다. 언젠가 그녀가 반드시 오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다. 두 달은 무위를 유의미하게 향상시키기에 넉넉한 기간이 아니었다. 그녀는 설욕할 자신이 있다는 말인가.
진천은 여인, 하수린을 살폈다. 팔룡각에서 보았을 때와 똑같은 회색 무복 차림이었다. 허리엔 둘둘 말린 청사편이 걸려 있었다. 무복으로 인해 몸의 변화는 알아차리기 힘들었지만 얼굴의 변화는 확연했다.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는 그대로이나 동그랗던 턱선이 갸름해졌다. 진천은 그녀가 두 달간 뼈를 깎는 수련을 쌓았음을 알았다.
진천이 말이 없자 하수린이 말을 이었다.
“우선 사과부터 해야겠어요. 전날 사정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실례를 범했어요. 노 장주는 어디에 있나요?”
“노 대인은 지금 안 계시오. 요즘 워낙 바쁘셔서 우리도 뵙기 어렵다오.”
노덕은 지난 이십 일 동안 딱 두 번만 삼보장에서 묵고 내내 밖에서 머물렀다. 노미현과의 동거가 불편해서가 아니었다.
도화각에서 일차적으로 재산을 돌려받자마자 노덕은 구상했던 사업에 착수했다. 빈민들과 천민들이 거하는 불모지에 번듯한 마을을 건설하는 일이었다. 가옥 건축과 도로 및 기반 시설에 필요한 자재를 제공하며 노덕은 천민들과 빈민들을 일꾼으로 삼고 그들에게 노임을 지불했다. 숙식도 그들과 함께했다.
주안의 유력 인사들이 너도나도 삼보장주의 선업에 동참하겠다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그러다 마령 문가와 백도방 간의 구인결에 삼보장의 식객들이 깊숙이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나흘 전 삼보장으로 돌아왔던 노덕은 주안표국의 지찬주가 그들을 선동했다며 씁쓸히 웃었다.
하수린이 가지런한 눈썹을 찡그렸다.
“유감이군요. 그럼 노 장주는 나중에 보기로 하고 우리 볼일부터 처리할까요?”
요청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진천은 하수린과의 비무를 피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녀의 갈색 동공은 불퇴전의 전의로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런데 하수린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당신에게 이르려면 먼저 금강권과 철곤귀를 넘어야 한다죠? 누구부터 시작할까요?”
하수린이 허리춤에서 청사편을 꺼냈다. 비녀의 속박에서 풀려난 여인의 머리카락처럼 채찍이 허공에 넘실거리며 구불구불 춤을 추었다.
고량이 투기를 일으키며 흥미를 보이자 진천이 재빨리 말했다.
“와전된 이야기일 뿐이오. 그리고 여기는 비무장이 아니오. 자리를 옮깁시다.”
고량은 아쉬운 기색이었다. 그러나 구인결을 코앞에 두었기에 자중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진천에게도 적용되어야 했다.
“너를 믿는다만 혹여 부상이라도 입을까 봐 걱정이구나.”
차소영이 연인을 거들었다.
“그래요, 진 소협. 더욱이 그녀는 막 도착했잖아요. 하남 무림의 팔정포에서 주안까지는 수천 리 길이에요. 멀리서 온 분이니 우선 안에 들어가서…….”
하수린이 차소영의 말을 잘랐다.
“배려는 고맙지만 휴식은 필요 없어요. 가요.”
동심원을 그리며 돌고 있던 채찍을 갈무리한 하수린이 진천을 재촉했다. 진천은 후원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를 쫓으며 하수린이 고량 등의 동행을 막았다.
“이건 나와 저 사람 간의 사적인 행사예요.”
대웅이 반발하려는 찰나 진천이 하수린의 편을 들었다.
“갔다 오마, 대웅. 그동안 고 형하고 대숲에서 약식 비무를 해라.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고.”
불만으로 입이 튀어나왔으나 대웅은 진천의 뜻에 따랐다.
“후딱 끝내고 와라, 천. 봐주지 말라고.”
기분 나쁜 듯 하수린이 대웅을 쏘아보았다. 그녀의 매서운 눈초리에 대웅이 움찔했다.
* * *
하수린은 연무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좁군요.”
진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연무장은 각 변의 길이가 공히 팔구 장에 달했다. 하수린의 소감은 연무장의 넓이를 트집 잡음으로써 전날 대결했던 객잔이 그녀에게 불리한 장소였음을 암시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준비됐소.”
비스듬히 몸을 튼 진천은 왼팔을 앞으로 뻗으며 자세를 잡았다. 하수린도 청사편을 풀었다. 하지만 바로 진천에게 공격을 가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할 거예요.”
진천은 하수린의 채찍이 얌전히 땅바닥에 똬리를 틀고 기다리자 마지못해 응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청사편이 기음을 일으키며 일직선으로 진천에게 날아왔다. 나선형의 궤적을 예상하고 있던 진천은 일순 당황했다. 하수린의 선공엔 필승의 각오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진천에게 날아든 청사편이 그의 복부를 꿰뚫었다. 그리고 두 남녀의 이차전은 그대로 종결되었다.
* * *
익숙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충격은 두 배 이상이었다.
하수린은 멍한 눈으로 힘을 잃고 축 늘어진 채찍을 내려다보았다. 창두(槍頭)처럼 생긴 편두(鞭頭)가 싹둑 잘려 나가 남의 것처럼 낯설어 보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하수린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는 답을 주지 못했다.
청사편은 교룡삭과 천잠사, 그리고 만년한철의 철선을 서른여섯 겹이나 꼬아 만든 기병이었다. 거기에 해룡담즙을 더했다. 절정의 검사가 최고의 보검으로 내리쳐도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팔대무왕 같은 무존(武尊)들이 아니고서야 절편(絶鞭)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목전의 현실은 그녀의 확신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웅변했다. 청사편도 잘릴 수 있었다. 팔대무왕이 아닌 이에게. 그것도 신병이기가 아니라 맨손에.
고개를 든 하수린은 불가능한 일을 해내고도 덤덤한 신색의 사내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날의 쓰라린 패배를 수백, 수천 번 곱씹으며 분석하고 또 분석했다. 사내의 현란한 보법과 화려한 권각술, 그리고 예측 불허의 암기공을 어떤 상황에서도 대적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는 데 한 달이 걸렸다.
기실 처음부터 무력 자체로는 그에게 뒤지지 않을 거라 자신했다. 더욱이 그녀에겐 비장의 한 수가 남아 있었다. 그걸 꺼내 들면 생사결로 치달을 터이기에 자제했지만 설욕전에서까지 아낄 까닭은 없었다. 그녀의 비기(秘技)는 승리를 보장해 줄 것이었다.
하지만 혼자만의 상상이었다. 하수린은 눈앞의 사내가 그녀와는 다른 경지의 무인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의 최선은 그녀의 최선보다 훨씬 윗길이었다.
사내가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하수린은 패배를 시인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게 뭐죠?”
서툰 미소와 함께 사내가 답을 건넸다.
“절멸도라고 하오.”
유령을 방불케 했던 신법도 궁금했으나 하수린은 그걸로 만족했다.
* * *
진천은 충격을 추스른 하수린을 데리고 별채로 갔다.
이남이녀가 입구에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진천은 네 사람의 표정에서 그들이 별채 지붕 뒤에 숨어 비무를 지켜보았음을 알았다. 그럼에도 대웅이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됐냐. 천?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어? 나는 고 형하고 막 대숲으로 갈 참이었는데. 비무 안 한 거 아냐?”
하수린의 까무잡잡한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졌어요.”
대웅이 눈치 없이 이죽거렸다.
“그거야 당연하고.”
하수린의 눈빛이 사나워지자 그녀가 비무를 청할까 봐 대웅이 얼른 수습했다.
“그래도 대단하오. 천이로 하여금 나나 고 형에겐 맛도 안 보여 준 절멸도를 초장부터 꺼내게 했으니. 하 소저를 그만큼 높이 평가한다는 반증 아니겠소?”
결국 관전을 실토한 셈이 되었지만 대웅은 자신의 실언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로서는 다행스럽게도 하수린은 그냥 넘어갔다.
“영광이군요.”
복잡한 감정이 담긴 음성이었다.
진천이 화제를 돌렸다.
“정식으로 인사들 나누구려.”
하수린이 즉시 호응했다.
“나는 하남 무림 팔정파의 하수린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고량을 필두로 차소영, 노미현, 대웅이 차례로 자기소개를 했다. 하수린의 시선은 노미현에게 오래 머물렀다. 노미현이 그녀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기에 두 여인은 마치 눈싸움을 벌이는 듯한 모습을 자아냈다. 기묘한 긴장감이 흐르자 진천이 헛기침을 했다.
“다들 들어갑시다.”
차소영이 손뼉을 치며 어색해진 분위기를 일신했다.
“그래요. 멀리서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차라도 대접해야죠. 어서들 들어가요.”
차소영의 독려에 따라 별채로 들어서던 중인은 일제히 발을 멈췄다. 선두에 섰던 진천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왜 그래, 천?”
묻자마자 대웅이 스스로 대답했다.
“두 사람이 왔구나.”
두두두두―
잠시 후 내공이 없는 노미현의 귀에도 요란한 마차 소리가 들렸다. 세 남자와 두 여자는 방향을 바꿔 정문으로 우르르 몰려 나갔다. 하수린도 덩달아 그들의 뒤를 쫓았다.
삼보장 앞마당 중앙에 정지한 마차에서 두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이 내렸다. 노덕, 여상구, 그리고 가린이었다.
“좀 늦었구먼, 아우님. 오다가 노 장주를 만나 잠시 지체…….”
진천에게 지각의 이유를 해명하던 여상구가 말끝을 흐렸다. 그의 시선이 진천의 옆에 선 하수린에게 꽂혔다. 여상구의 눈이 커졌다.
“허어, 꿈은 반대라더니. 간밤에 흉몽에 시달리느라 잠을 설쳤는데 이런 행운이 떨어질 줄이야.”
뜻 모를 소리에 하수린의 가지런한 눈썹이 갈매기 모양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와 가린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여상구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