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51
제50화
여상구가 환하게 웃었다.
“용모화(容貌畵)에서 본 것보다 훨씬 미인이구먼. 만나서 반갑네, 하남편봉.”
외모 평을 싫어하는 데다 외관에 어울리지 않는 말투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하수린은 속을 감추고 침착하게 포권했다.
“팔정파의 하수린이 태극마선(太極魔扇)을 뵙습니다.”
하수린의 음성과 눈빛이 싸늘했지만 여상구는 여전히 싱글벙글했다.
“그 별호는 정말 오래간만에 듣는구먼. 그나저나 첫눈에 나를 알아보다니 기특할세, 그려. 흠, 아무리 두문불출하고 죽은 듯 지내도 이놈의 명성은…….”
“그쯤 해요, 청로.”
노미현이 여상구의 너스레를 끊었다. 여상구는 불쾌해하기는커녕 아예 파안대소했다.
“크하하핫, 그래, 그래. 귀인의 방문에 기뻐 내가 너무 들떴군. 그나저나 내 아우님과 복수전은 치렀는가, 하남편봉?”
하수린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진천이 대신 대답했다.
“조금 전에 가볍게 비무했습니다, 형님.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모처럼 노 대인도 오셨으니 출발하기 전에 다 같이 담소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비무의 결과를 묻지도 않고 여상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아우님. 나는 이 어여쁜 아가씨와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먼저 들어들 가게나. 나를 따라오겠는가, 하남편봉? 후원에 멋진 곳이 있다네.”
하수린은 혼란스러웠다. 은둔의 괴짜로 유명한 도화각주가 다짜고짜 독대를 청해서만이 아니라 진천과 호형호제하는 모습이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여상구가 웃음기를 거두고 엄포를 놓았다.
“아무도 나와 하남편봉의 친교를 방해해서는 안 될 것이야. 나는 오늘처럼 예민할 땐 인내심이 잠자리 날개처럼 얇아지거든.”
진천은 쓴웃음이 났다. 자기더러 말리지 말라는 소리였다.
“가세나.”
여상구가 성큼성큼 후원 쪽으로 걸어갔다. 고분고분 뒤를 따르지 않고 하수린이 그의 등에 질문을 던졌다.
“저와 무슨 얘기를 하시려는 건지 알아도 될까요?”
여상구가 고개를 돌렸다.
“여기 오다가 소문을 듣지 않았나?”
하수린은 말귀를 알아들었다.
“마령 문가와 백도방 간의 구인결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여상구가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쉿! 낮말을 엿듣는 쥐새끼들이 있을지 모르니 말을 아끼게.”
하수린은 자기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스스―
봄바람이 대나무 숲을 훑고 지나갔다.
여상구가 한껏 목소리를 낮춰 은근히 물었다.
“어떤가? 따라오겠는가?”
잰걸음으로 여상구의 옆에 붙음으로써 하수린이 대답을 대신했다.
* * *
반 시진 후 여상구가 홀로 후원에서 나왔다.
“들어가 보게, 아우님. 그녀는 너럭바위에 있다네. 아우님과 대화를 나눠 보고 결정하겠다는구먼. 거의 낚았으니 아무쪼록 놓치지 말고 뜰채에 잘 담게나.”
“…….”
“자네 마음은 아네. 하지만 오늘의 복운을 취하지 않는다면 하늘이 노할 걸세. 기껏 차려 준 밥상을 걷어찼다고 말일세. 어서 가 보게.”
여상구가 진천을 떠밀었다. 진천은 의형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너럭바위에 앉아 있던 하수린은 오솔길을 따라 걸어오는 진천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진천은 그녀의 삼 보 앞에 섰다.
“근간에 들리던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진천은 ‘어떤 소문’을 말하는지 몰랐기에 잠자코 있었다.
“도화각주와 주안일화(宙安一花) 말이에요. 그들은 그냥 친인 사이라면서요?”
“단순한 친인은 아니오.”
“어쨌거나 남녀 관계는 아니잖아요.”
“그렇소.”
“당신은 어떻죠?”
“뭐가 말이오?”
“주안일화와 어떤 사이냐고요?”
“…….”
“너무 사적인 질문인가요? 당신이 답할 의무는 없다는 걸 알지만 듣고 싶어요.”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진천은 당혹스러웠다.
“그녀와는 조금씩 친구가 되어 가는 중이오.”
“그게 전분가요?”
진천은 기시감이 들었다. 하수린의 자존심과 이지(理智)가 여과 없이 드러나는 저 눈빛은 지난 몇 년간 질리도록 경험한 것이었다.
인창에서든 밀림에서든 진천을 흠모하지 않는 소녀들은 드물었다.
이런저런 여난에 시달리며 진천은 하나의 원칙을 확립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모두를 받아들이거나 모두를 배척할 수는 없었기에 그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진천은 그의 애정을 갈구하는 소녀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무던하게 어울리는 방법을 터득했다. 지금은 그 기술을 발휘할 때였다. 그러나 그에게 그럴 겨를을 주지 않고 하수린이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 내었다.
“중대사를 앞두고 쓸데없는 문제로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진 않지만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겠기에 물어보는 거예요. 만약 당신과 그녀가 이미 연인이 되었다면 억지로 끼어들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 스스로에게 당신과 가까워질 기회를 허락하고 싶어요.
나는 아까 당신에게 아무것도 못 해 보고 패하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왜 그렇게 서둘러 주안으로 떠났는지. 나는 두려웠던 거예요. 당신이 경국지색의 미녀라는 주안일화와 연분이 싹틀까 봐. 그래서 승산이 충분하다고 나 자신을 속이고서 행여나 늦을세라 정신없이 달려온 거예요.
너무 당돌한가요? 나도 이런 내가 당황스러워요. 전날 당신이 나에게 패배를 안기고 떠난 후 많이 아팠어요. 오해는 말아요. 상사병이 아니라 무인으로서의 열패감 때문이었으니까. 실은 나야말로 당신을 오해했어요. 당신이 처음부터 나를 노리고 팔룡각을 찾아왔던 거라고. 나를 꺾고 내 무명(武名)을 가로채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한 후 나타났다고.
하지만 소란이 벌어진 전후 사정을 상세하게 조사하고 난 후 당신이 의도적으로 나를 끌어들인 게 아님을 알았어요. 그 멍청한 상인이 당신과 노 장주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요.
지난 두 달간 정말 열심히 수련했어요. 무공을 익힌 후 단 하루도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지만, 이번만큼 치열하게 수련한 적도 없었어요. 사실 여기로 오는 내내 이번엔 이길 수 있을 거라 자신했어요. 첫 대결에서 나는 내 밑천을 다 꺼내진 않았고, 짧은 기간이지만 그때보다 발전했거든요.
하지만 당신의 절멸도를 보고는 깨달았어요. 당신 것에 비하면 내 밑천이 너무나 초라하다는 것을. 당신이 일찍 끝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민망한 재롱을 떨었을 거예요. 천만다행이에요.
당신이 내 청사편을 잘랐을 때 심장이 두근거렸어요. 당신은 두 달 전에 떼를 쓰며 달려드는 나를 얼마든지 두 동강 낼 수 있었어요. 그러지 않았던 이유를 백 가지쯤 떠올릴 수 있지만 지금은 하나의 정답을 알 것 같아요.
너그러운 마음. 아닌가요?
전력을 다해 싸운 상대에 대해서는 일만 마디의 대화를 나눈 것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된다는 격언이 있다는 걸 아나요? 나는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던 두 번의 대결을 통해 당신의 본성을 보았다고 믿어요. 그리고 그 본성에 반했어요. 진심으로요.
구인결에 출전하겠다는 뜻을 밝히기 전에 꼭 말하고 싶었어요. 나는 마령 문가의 도호(刀豪)를 이겨 명예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 구인결에 나갈 참이에요. 당신이 백도방주 같은 쓰레기의 수하가 되는 꼴을 두고 볼 순 없어요. 나를 일원으로 받아 줘요.”
줄기차게 떨어지던 폭포수가 드디어 끝나자 진천은 참았던 침을 꿀꺽 삼켰다. 창인과 밀림의 소녀들로부터 일백 회가 넘는 고백을 들었지만 이런 장광설은 처음이었다.
진천은 목소리에 감정이 묻어 나오지 않도록 주의했다.
“마령 문가는 강대할뿐더러 은원이 분명한 가문으로 알려져 있소. 그들과 척을 지면 앞으로의 강호 활동에 적지 않은 지장이 초래될 것을 각오해야 하오. 하 소저 개인에게뿐만이 아니라 팔정파에게도 악영향을 끼칠 공산이 크오. 이 점을 충분히 숙지한 후 다시 결정하길 바라오.”
하수린이 아미를 찌푸렸다.
“그런 설명을 들어야 하다니 언짢군요. 나는 바보가 아니에요. 어린아이는 더더욱 아니고요. 내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요.”
진천은 하수린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기실 그녀에 대해서는 진즉부터 호감을 갖고 있었다.
첫 만남에서 그녀가 적대적으로 나온 까닭은 천하의 악종으로 알려진 삼보장주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다소 무례했지만 그녀로서는 악인을 응징하는 협행이라 여겼을 테니 이해할 만했다.
전날 진천은 무엇보다 비무 마지막 장면에서 하수린이 보인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의 철구에 손목을 맞고 청사편을 놓친 하수린은 선선히 승부를 접었다. 아직 비장의 수가 남아 있음에도!
그녀가 창인에 널리고 널렸던 독종들, 즉 목이 꺾일 때까지는 결코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유형이라 판단했던 진천으로서는 의외의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오늘 진천은 하수린의 또 다른 면모를 보았다.
솔직함. 열정.
남방 여인 특유의 성정이었으나, 그녀는 정도가 심했다. 불은 훤히 보여 좋지만 너무 가까이 하면 델 염려가 있었다.
진천이 말을 받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자 하수린이 결론을 재촉했다.
“도화각주에게서 당신이 이곳의 실질적인 수장이라고 들었어요. 어떡할래요? 나를 한편으로 받아들일 건가요?”
이번에는 진천에게서 즉답이 나왔다.
“같이 갑시다.”
하수린의 도톰한 입술이 좌우로 길게 늘어나며 미소를 그렸다. 진천도 싱긋 웃음으로 화답했다.
하수린이 방심한 진천의 허를 찔렀다.
“그게 끝인가요?”
그녀가 무얼 원하는지 알았지만 진천은 동문서답했다.
“무운을 비오.”
일순 멍한 표정을 짓더니 하수린이 깔깔거렸다.
“맞아요. 지금의 내겐 무엇보다 그게 절실하죠. 나는 여인이기 이전에 무인이니까.”
“…….”
* * *
중인은 하수린의 합류를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활달한 그녀는 한 시진도 안 돼 삼보장 무리에 녹아들었다. 다만 노미현과는 여전히 껄끄러웠다. 두 여인은 거의 말을 섞지 않고 신경전을 벌였다.
미시(未時) 초, 최상의 진용(陣容)을 꾸린 진천 일행은 노덕과 작별을 고하고 마차에 올랐다. 대형 마차였으나 가린이 타자 비좁은 느낌이었다. 노미현과 차소영도 동승했다.
마령 문가 측에서 출전자들 외에 십 인의 후진(後陣)을 두자고 했기에 그녀들의 참관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특히 노미현은 대웅의 선전을 위해 반드시 동행해야 했다.
구인결을 치를 장소로 내정된 연주(延州) 고흥(高興)까지는 주안에서 오백 리 거리였다. 고흥은 정맹과 중립 지대의 경계선상에 위치해 있거니와 마령 문가와 백도방의 중간 지점이기도 했다.
진천 일행은 그날 밤 술시(戌時)쯤 고흥의 오성객잔에서 오재현과 만날 예정이었다. 오재현은 대웅의 철곤에 중상을 입은 광객을 제외한 백도삼흉과 열 명 안팎의 수하들을 데려오기로 했다.
진천은 달리는 마차에 끈질기게 달라붙는 외부의 이목을 감지했다. 마령 문가의 감시자들은 길가의 잡초처럼 어디에나 있었다.
삼보장 용병들의 행보를 주시하는 이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열흘 전부터 주안에서 불기 시작한 황당한 풍문이 대륙 전역에 퍼진 이후, 온 천하가 불덩이에 달려드는 불나방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강호의 관심사는 구인결에서의 승패가 아니라 불나방들의 생존 여부였다. 정파 무림의 지배자인 오대세가에서도 으뜸을 다투는 마령 문가는 결코 그들의 권위에 도전한 불나방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