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52
제51화
마부의 솜씨는 훌륭했다.
진천은 마치 고정된 집 실내에 있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전날 백도방과의 오인결을 치르느라 무연곡을 오갈 때 고량이 몰던 마차와는 천양지차였다. 흔들림만 적은 게 아니었다. 속도도 훨씬 빨랐다. 물론 이는 용마술(用馬術)보다는 말 자체의 차이에서 기인한 우열이었다. 노마(老馬)를 준마에 견주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노련한 오십 대 마부가 부리는 여덟 필의 준마는 두 시진도 지나지 않아 승객들을 연주 고흥에 데려다주었다. 백도방과 만나기로 시각보다 한 시진이나 일찍 도착한 진천 일행은 시인과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명소들의 감상을 자제하고 약속 장소인 오성객잔으로 직행했다.
진천의 예상대로 오재현은 이미 오성객잔에 와 있었다. 백도삼흉의 모습도 보였다. 모두들 본의에 반해 전장에 끌려 나온 병졸들처럼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다.
백도방이 사흘간 통째로 빌리며 숙수와 점소이들도 내보냈기에 널찍한 객잔은 텅 비어 있었다.
오재현은 진천 등을 일 층에 들였다. 식탁을 붙여 양편에 열 명씩 앉을 수 있는 기다란 탁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삼보장 측 인사들이 준비된 의자에 착석하기도 전에 오재현이 물었다.
“저들은 누군가?”
오재현이 가린과 하수린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진천의 대답과 삼안호리 장관의 보고가 동시에 나왔다.
“그들은 새로운 출전자입니다.”
“저 여인은 하남편봉인 것 같습니다, 방주.”
오재현의 면상에 가득한 흉터들이 일제히 꿈틀거렸다. 진천은 그의 동공을 유심히 살폈다. 재빨리 당혹감을 지운 오재현이 질문을 이었다.
“하남편봉이 나를 위해 나선다고? 어째서?”
하수린이 눈썹을 찡그렸다.
“분명히 해 두고 싶군요. 나는 당신을 위해 나서는 게 아니에요.”
그녀의 냉랭한 음성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장관이 오재현의 귀에 속삭였다.
“이유가 뭐든 우리에겐 무조건 이득입니다, 방주.”
백도방의 지낭 노릇을 하는 장관은 희희낙락했다. 하남편봉과 정체불명의 거인이 출전한다면 자기는 무시무시한 도귀(刀鬼)들의 칼을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광객을 빼고 남은 삼흉 중 그가 최약체였다. 아홉이라는 수를 채우기 위해 칠병귀와 초검은 나가야 하지만, 삼보장에서 둘이 추가되면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
오재현이 고개를 돌려 장관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을 접한 장관은 등골이 쭈뼛했다. 맞은편에서 지켜보는 이들이 없다면 방주는 불문곡직 비수를 꺼내 심기를 건드린 대가를 요구했을 것이었다. 손가락이든 목줄이든.
방주가 왜 화가 났는지 이해 불가였지만 장관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섰다. 그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오재현이 시선을 돌렸다.
“저 파란 낯짝은 누군가?”
“그는 가린입니다.”
오재현이 쏘아보자 가린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얄따란 입술을 벌리며 으르렁거렸다. 그의 송곳니를 본 백도방의 무사들이 신음성을 흘렸다.
진천이 추가 설명을 했다.
“가린은 밀림에서 왔습니다.”
오재현의 찢어진 눈이 일그러졌다.
“밀림? 하남 무림 아래의 밀림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그는 무인인가?”
“그렇진 않지만, 밀림 최강의 용사입니다.”
“너는 지금 본방의 운명이 걸린 중대사에 한낱 밀림의 이족을…….”
오재현은 불만을 마저 토로하지 못했다. 잠자코 있던 여상구가 별안간 호통을 쳤기 때문이었다.
“갈! 더는 못 들어 주겠군. 어이, 오 방주. 착각도 적당히 하시지. 지금 누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지 몰라? 아우님이 은덕을 베풀었으면 그냥 넙죽 엎드려 감사히 받을 것이지 뭔 잡설이야?”
여상구의 험언(險言)에 오재현의 양안에서 살벌한 안광이 폭사되었다. 하지만 오재현은 억지로 심화를 눌렀다. 나이도 아홉 살이 많고 강호에서의 위상도 약간이나마 위였지만, 여상구의 실질적인 무위를 알기에 감히 맞받아치기 어려웠다.
“네 지적처럼 본방이 아쉬운 입장이니, 이번은 묵과하겠다. 하지만 오늘의 무례는 결코 잊지 않겠다, 여 각주.”
여상구가 콧방귀를 꼈다.
진천이 상황을 수습했다.
“출전자들에 관해서는 저에게 전적으로 일임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상대가 여상구에게서 진천으로 바뀌자 오재현은 내심 환영했다.
대웅의 목소리가 작지 않았기에 틀림없이 들었을 테지만, 오재현을 비롯해 백도방의 누구도 반발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렇긴 하다만, 나는 이미 우리 쪽 명단을 마령 문가에 전했다. 구인결을 코앞에 두고 내용을 변경하면 그들이 트집을 잡지 않겠느냐?”
“그들도 아홉이 아니라 열두 명의 이름을 올린 명단을 주었잖습니까? 그건 삼 인의 예비 출전자들을 두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별문제 없을 거라고 봅니다. 마령 문가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도 전면적인 재협상을 요구하면 됩니다.”
오재현은 마지못해 수긍했다.
“알았다.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할 텐데 올라가서 쉬어라. 우리는 객잔에 딸린 별원에 묵고 있으니 이 층의 객실들을 아무거나 골라서 써도 된다. 자세한 얘기는 밤에 하자.”
오재현이 백도방 무리를 이끌고 뒷문으로 나갔다. 그들의 꽁무니에 대고 대웅이 구시렁거렸다.
“제길, 은인들을 맞으며 변변한 음식조차 차려 놓지 않았다니. 누가 도박장에서 굴러먹은 뼈다귀들이 아니랄까 봐 기본적인 예절조차도 모르는군. 내가 저런 작자들을 위해 싸워야 돼?”
* * *
고흥은 경치가 수려하기로 유명했다.
하여 인구가 삼, 사만에 불과한 소도(小都)임에도 사시사철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 유람객들로 인해 늘 장날의 저자처럼 붐볐다. 평상시엔 고흥이 자랑하는 팔경(八景)을 화폭이나 시상에 담으려는 화공과 문사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요 며칠은 호사가들이 벌떼처럼 몰려드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령 문가와 백도방의 구인결을 친관(親觀)하러 불원천리 달려온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괜한 시간과 노력만 낭비한 셈이 되었다. 구인결의 장소가 고흥 외곽의 만수보(萬壽堡)로 공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장 높이의 방책으로 둘러싸인 만수보와는 달리, 담장이 낮아 주위의 전각에서 쉽게 관전할 수 있는 보금당(寶金堂) 경내에서 구인결이 치러질 거라 예상했던 사람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아무도 마령 문가에 그들의 편의를 봐 달라고 청하지 못했다.
백의를 걸쳤고 허리에 칼을 찼으나, 마령 문가의 도호는 아니었다. 노인은 판정관으로 선정된 강찬(姜燦)이었다. 강찬은 오대세가의 하나인 원주(原州) 강가(姜家)의 명숙이었다.
강찬은 용호에 들지 못했지만 무림에서의 비중과 배분은 상당히 높았다. 정파제일가로 꼽히는 강가의 대소사를 총괄하는 주무(主務)인 데다, 정맹의 맹주이자 정파 무림의 일인자인 북천도왕(北天刀王) 강운(姜雲)과 사촌지간이어서였다.
강찬을 판정관으로 삼은 걸 마령 문가의 농간이랄 수는 없었다. 같은 오대세가에 속해 있지만 마령 문가와 원주 강가는 적이나 다름없는 앙숙이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경쟁이 너무나 치열해 전쟁 직전까지 치닫기도 했다. 마련이나 서벌이 없었다면 정파는 내란으로 무너졌을 터였다.
좌우를 번갈아 가며 휘둘러본 강찬이 헛기침을 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백도방 진영에 시선을 둔 채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자기소개하고 주의 사항을 알렸다.
중인은 강찬의 일장 연설에 침묵으로 응답했다.
흡족한 미소를 머금은 강찬이 오재현을 보았다.
울화를 누르며 오재현이 어제 진천과의 최종 협의를 통해 제일장(第一將)으로 내정했던 초검(草劍) 양준에게 출전을 명하려는 찰나, 진천이 제지했다.
오재현만이 아니라 모두들 진천의 평범한 얼굴을 주시했다. 강찬은 진행을 방해한 하남 무림의 신성이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에게 꽂힌 따가운 시선들을 무시하고 진천이 오재현에게 물었다.
진천의 의도를 몰라 오재현은 동요했다.
“그래서? 일장을 다른 이로 바꾸자는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수만 명이 소리 없이 질러 대는 원성들을 밖에 두고, 만수보 내부엔 수십 인이 대치하고 있었다. 마령 문가의 도객(刀客)들은 정확히 스물두 명이었고 백도방 편에 선 이들은 그보다 두 명이 많았다.
저마다 혁혁한 명성을 지닌 도호(刀豪)들의 시선을 독차지한 이는 하남 무림이 배출한 초신성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길은 경국지색의 미녀에게 머물러 있었다. 부끄러운 듯 노미현의 볼에 홍조가 피었다. 오성객잔을 출발하기 전부터 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대웅이 불쾌감을 드러내며 씩씩거렸다.
진천은 마령 문가 무인들의 태도가 다분히 의도적임을 알아차렸다. 노미현을 응시하는 그들의 눈엔 한 점의 색정도 묻어 있지 않았다. 심지어 이십 대로 보이는 세 명의 청년들조차도 아름다운 꽃을 보는 정도의 담담한 눈빛이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아 기묘한 정적이 깔린 가운데, 진천은 마령 문가 진영을 찬찬히 살폈다. 모두들 양쪽 소매엔 자색 띠가 둘렸고 왼 가슴엔 마령 문가를 상징하는 반월도의 문양이 수놓아진 백색 무복을 입고 있었다. 혈족임을 과시라도 하듯 생김새도 놀라우리만치 흡사했지만, 용모화를 여러 번 확인했기에 진천은 마령 문가가 출전자로 통보한 십이 인을 어렵지 않게 구별할 수 있었다.
그들 중 단연 눈에 띄는 이는 일선 맨 우측의 노인이었다.
창천도군 문찬경.
당금 무림의 절대자들인 팔대무왕을 제외하면 아무도 상수임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도백(刀伯)이었다. 문찬경의 시선은 먹구름으로 뒤덮인 천공을 향해 있었다. 진천은 기감으로 그의 무위를 가늠하려던 시도를 포기했다.
문찬경이 구인결에 나설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사대사(四對四)의 진행이라면 그의 출전은 기정사실로 보아야 했다. 마령 문가는 사패(四敗)를 허락하지 않고 어떻게든 그 전에 마무리를 지으려 들 터였다. 닭들을 잡는 데 소 잡는 칼까지 쓰는 건 그들로서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백염 백발의 노인이 광장의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북천도왕의 등장으로 원주 강가가 일시에 주도권을 쥐며 거대 가문 간의 알력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앙금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강찬은 백도방의 입장에서는 공정할뿐더러 유리한 판정을 기대해도 좋을 인물이었다.
“노부는 문가와 백도방의 부탁에 따라 이번 구인결의 판정관을 맡게 된 강 모라고 하오. 양측이 사전에 합의한 대로 한쪽이 오 승을 거둘 때까지 한 사람씩 차례로 대결을 펼치게 될 것이오. 다들 숙지했으리라 믿지만 규칙들 중 중요한 것들을 두 가지만 다시 한번 상기시키겠소. 첫째, 내가 내린 판정은 번복이 불가능하오. 둘째, 내가 판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오. 설사 비무 상대가 운신불능이라 판단되더라도, 항복을 선언하지 않는 한 섣불리 손을 거두지 말라는 뜻이오. 그랬다가 불의의 암습을 당한대도 내 책임이 아니오. 말이 나온 김에 하나만 덧붙이겠소. 무승부는 없소. 예컨대 동귀어진이나 양패구상이 나오더라도 비무의 과정을 바탕으로 반드시 승패를 정할 거요. 그 경우에도 내 판정에 절대적으로 승복해야 하오. 양측에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소. 판정관을 수락하지 않거나, 내가 내건 조건의 수용을 철회할 요량이거들랑 지금 말하시오.”
잠시 뜸을 들이던 강찬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리도 구름이 낮게 내려와 있으니 곧 비가 올 것 같소. 아직 오시(午時)를 알리는 종이 울리지 않았지만 괜찮다면 바로 구인결을 시작하는 게 어떻겠소?”
마령 문가를 대표한 파혼도 문수창과 백도방주 오재현이 즉시 동의를 표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백도방에서 첫 번째 출전자를 먼저 내보내기로 한 것으로 아는데. 누구인가?”
강찬의 평대에 오재현이 면상을 우그러뜨렸다. 무력으로만 따지면 강찬은 그의 십초지적에 불과했다.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는 강찬의 언동이 아니꼬워 배알이 뒤틀렸으나 오재현은 꾹 참았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방주님.”
“출전 순서에 관해서는 제게 전권을 주기로 했잖습니까?”
“누구로?”
진천의 입에서 모두의 귀를 의심케 하는 대답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