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53
제52화
오재현의 면상에서 꿈틀거리던 흉터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잠시 후 경직이 풀리며 오재현이 방금 들은 내용을 확인했다.
“지금 나더러 나가라고 한 게냐? 일장(一將)으로?”
진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그렇습니다.”
오재현의 흉측한 얼굴이 다시 굳어 버렸다. 삼안호리 장관이 상전의 심사를 대변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오, 하남신룡? 방주를 일장으로 내보내겠다니?”
장관은 가까스로 ‘미친 거 아니오?’라는 뒷말을 입안에 가두었다. 진천은 그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오재현을 직시한 채 답했다.
“방주님이 기선을 제압해 주시길 바랍니다. 일승을 부탁드립니다.”
설명이라기보다는 결정을 고수하겠다는 의사 표명이었다.
오재현이 진천을 노려보았다. 진천도 그의 시선을 회피하지 않았기에 노소 사이에 때아닌 눈싸움이 벌어졌다.
백도방 무리는 전전긍긍했고, 삼보장 식구들은 진천을 지원하기 위해 암암리에 기세를 일으켰다.
외부인이 볼 때는 자못 흥미진진한 상황인지라 판정관 강찬은 출전자 선정을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령 문가의 무인들도 적진의 분란을 묵묵히 즐겼다.
이윽고 오재현이 입을 열었다.
“내가 거부하겠다면 어쩔 테냐?”
이를 갈아 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진천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하나의 약속이 깨지면 다른 약속들도 무너지는 법입니다.”
압박이자 협박이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전개에 오재현은 갈팡질팡했다. 인내심이 바닥난 강찬이 선택을 종용했다.
“누구든 어서 나와라. 제일전(第一戰)은 기권할 셈인가?”
진천이 버티자 오재현은 어쩔 수 없이 갈등을 끝내야 했다.
마지막으로 진천을 쏘아본 오재현이 앞으로 나갔다.
“내가 일장이오.”
이로써 구인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마령 문가의 대응은 진천의 변칙수 이상으로 중인을 놀라게 했다.
그들이 오재현의 상대로 내세운 이는 수라도(修羅刀) 문수경(文秀慶)이었다. 오십 대 중반의 문수경은 대륙 전역에 무명이 알려진 강자임에는 분명하나 일수천비 오재현에 비해서는 이름값이 다소 떨어졌다. 마령 문가에서는 무력 서열 오륙 위 정도로 평가받는 도호였다.
‘붙어 보기 전에는 승부를 알 수 없다.’는 격언이 있다지만 강호에 알려진 전력만으로 따진다면 초절정의 초입에 들어선 것으로 인정받는 오재현이 절정 상(上)의 수준으로 전해지는 문수경보다 한 수 위였다.
기실 오재현보다 확실한 우위에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마령 문가의 도호는 셋뿐이었다. 그나마도 파혼도 문수창 역시 일방적인 우세를 장담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오재현을 꺾으려면 그라도 일정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터였다.
그러니 문수경의 출전은 마령 문가의 입장에서는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모험이라기보다는 어리석은 도박이었다. 유리한 패를 가지고도 불리한 패를 쓴다는 건 서툰 도박사들도 하지 않는 짓이었다.
문수경이 나오자 당황한 판정관 강찬이 마령 문가의 의사를 다시 확인할 만큼 그들이 내민 패는 뜻밖이었다.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응수타진이 보기 좋게 성공했으나,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오재현에 대한 반신반의가 전적인 의심으로 바뀌었으니 허탈할 따름이었다.
마령 문가가 수라도를 내세웠다는 건 한 가지 사실을 의미했다. 오재현은 이미 그들과 한통속이라 보아야 했다.
물론 수라도가 오재현에게 이길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력의 차이가 크지 않기에 그가 이변을 일으킨다고 해도 수긍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승산을 고려했다면 마령 문가는 수라도와 비슷한 무위이되 방어력은 윗길이라는 철벽도(鐵壁刀)를 내세웠어야 했다.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 수라도보다는 철벽도가 암기공의 대가인 오재현에게 상성상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마령 문가는 수라도를 제일장으로 출전시켰다. 그들이 그의 승리를 확신한다는 뜻이었고, 오재현이 뒤통수를 쳤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진천은 마령 문가가 오재현을 포섭한 수단이 궁금했다. 황금 일천 관을 받고 주기적으로 받는 상납금을 대폭 올리는 선에서 봐주기로 했을까. 아니면 백도방을 공동으로 운영하며 이익을 반으로 나누자고 했을까. 그도 아니면 오재현에게 상당한 거금을 떼 주고 중립 지대의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방파를 일구도록 지원한다는 보장을 했을까.
어느 것이든 오재현의 입장에서 종내에는 공염불이 될 공산이 컸다. 허 노야에 따르면 마령 문가는 사냥이 끝난 후 개에게 보상을 주는 유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재현은 먹음직한 뼈다귀를 받기는커녕 물이 펄펄 끓는 솥에 들어가야 할 것이었다.
오재현도 바보가 아닌지라 이러한 결말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지난 한 달간 심력을 극도로 소진하며 정상적인 사고를 유지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구인결에서의 승산이 전무하다고 판단했다면 작은 것이라도 건지고 싶었을 터였다. 어쩌면 마령 문가에서 그가 수용할 만한 안전 보장을 제시했거나, 오재현 자신에게 마련이나 사벌로의 의탁 같은 대안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오재현이 마령 문가의 손아귀에 들었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구인결에서의 승리가 사실상 물 건너갔음을 의미했다. 마령 문가가 이쪽이 가진 비장의 패를 알고 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오재현과 문수경의 비무 양상은 중인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리고 진천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일수천비라는 별호에 걸맞게 오재현이 손을 휘두르자 낙낙한 소매에서 무수한 암기가 쏟아져 나왔다. 은빛인 데다 물고기 비늘을 닮아 은린(銀鱗)으로 불리는 아이 손가락 크기의 비수들이 수평으로 내리는 폭우가 되어 문수경을 덮쳤다.
관전하는 이들은 초장부터 은린폭우라는 성명절기를 뽑아 든 오재현의 우세를 점쳤다. 하지만 오재현은 개전하자마자 황소처럼 달려드는 문수경의 전진을 제지하지 못했다. 암기의 소나기를 도막(刀幕)으로 막아 내며 문수경은 순식간에 오재현과의 거리를 좁혔다. 가공스러운 도기(刀氣)가 휘몰아쳐 오자, 오재현은 맞불을 단념하고 퇴보를 밟았다.
일단 기세에서 밀리자 오재현은 금세 비세에 빠졌다. 문수경은 갈지자로 뒷걸음질 치는 오재현을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위태롭게 버티던 오재현은 칼의 궤적에 들어오자 비상수단을 꺼내 들었다.
양 소매의 은린들을 한꺼번에 떨쳐 내며 문수경의 주의를 흐트러뜨린 오재현은 입으로 섬광구(閃光球)를 쏘았다. 그와 대적했던 자들을 불귀의 객으로 만들었던 필살의 절기였다.
오재현의 어금니에 있던 콩알만 한 은구(銀球)가 빛살의 속도로 문수경에게 날아갔다. 목덜미를 스치는 섬뜩한 기운에 일순 문수경의 동작이 멎었다. 그러나 상대의 구명절초가 빗나갔음을 인지한 문수경이 노성을 터뜨리며 수직으로 칼을 내리쳤다. 재빨리 몸을 비틀어 아슬아슬하게 일도양단의 참사를 면한 오재현이 바닥을 뒹굴며 손사래를 쳤다.
“그만. 내가, 졌소.”
문수경이 오재현을 쫓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엔 승자의 쾌감이 아니라 똥을 싸고 밑을 닦지 않은 이의 찝찝함이 묻어 있었다.
오재현이 몸을 일으키자 강찬이 공식적인 판정을 내렸다.
“제일전은 마령 문가의 승리요.”
방주의 패배에 백도방도들은 망연자실했다. 진천의 묘수 덕분에 일승을 거두리라 기대했던 삼보장 용병들도 사기가 떨어졌다.
진천이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자 오재현이 변명을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은린이 다 떨어진 데다 최후의 수단까지 무위로 돌아갔으니. 그리고 이제야 말이지만 나는 왼팔이 온전치 않은 상태였다. 구인결을 앞두고 너무 과하게 수련을 하는 바람에 손목을 다쳤더랬다. 더욱이…….”
진천이 오재현의 장광설을 끊었다.
“됐소.”
진천의 말투가 바뀌자 오재현이 사나운 안광을 폭사시켰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다. 최선을 다했으나 오늘은 운과 실력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수라도에게 패배했다고, 지금 네놈이 나를 무시하는 게냐?”
진천은 경멸의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방주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소. 부인할 셈이오?”
오재현이 답변하기 전에 여상구가 끼어들었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했더니, 이 너구리. 무슨 수작을 부린 게냐?”
여상구의 전신에서 살기가 돋아나자 진천이 황급히 만류했다. 여상구의 진정한 무위는 이미 오재현의 입을 통해 마령 문가에 전해졌겠지만 또 다른 무기가 노출되어서는 곤란했다.
“진정하십시오, 형님. 제게 맡겨 주십시오.”
오재현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면서도 여상구가 살기를 갈무리하며 물러섰다.
이편에서 내분이 일어나는 동안, 마령 문가는 벌써 다음 출전자를 내보냈다. 강찬이 백도방 측의 이장(二將)을 요구했다.
여상구를 의식한 듯 오재현이 시시비비를 따지는 언쟁을 회피하고 백도방 무리로 들어가 버리자, 진천이 일행을 둘러보았다.
“백도방주는 신의를 저버렸소. 그러니 우리는…….”
대웅이 진천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나도 저 노인네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단지 졌다는 이유만으로 신의를 저버렸다고 단정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냐, 천?”
다른 이들도 대웅의 지적에 동감하는 기색이었다.
“설명은 나중에 하마, 대웅. 지금은 구인결을 계속할 건지 말 건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고량이 진천의 말을 받았다.
“나를 내보내다오.”
진천은 고량의 눈길을 따라 마령 문가에서 나온 도객을 바라보았다.
묵월도(墨月刀) 문상제(文尙齊).
올해 마흔 줄에 들어선 것으로 알려진 문상제는 마령 문가의 허리를 책임지는 중견 강호였다. 그들이 보유한 십이 인의 용호 중에서는 서열 팔구 위에 해당하는 자였다. 객관적인 전력상 고량보다 윗길의 강자라는 뜻이었다.
기실 고량이 우위를 보일 거라 장담할 수 있는 용호는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마령 문가가 제공한 명단이 오른 이들 중 최약체로 알려진 풍뢰도 문상현만에게만 대등하거나 약간 우세하리라는 것이 사전 분석의 결론이었다.
진천은 고량에게 눈을 돌렸다.
고량의 동공 깊숙한 곳에서 일렁이는 불꽃을 본 진천은 말리려던 생각을 접고 그의 의지를 존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고량은 버거운 도호를 상대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참이었다. 구인결에 참여한 자체로 마령 문가의 눈 밖에 났으니 어차피 용호단 입단은 무망했다. 하지만 용호가 될 자격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고량에게 한 걸음 다가간 진천이 손을 뻗어 그의 무쇠 같은 팔뚝을 잡았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고량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진천의 의중을 헤아린 고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천과 무언의 대화를 나눈 고량이 등을 돌렸다.
비무장으로 정해진 공간에 나가며 고량이 차소영을 일별했다. 정인의 출전에 긴장한 차소영은 미소로 응원하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분간이 안 가는 이상한 표정을 지은 그녀에게 고량이 둘만 아는 신호를 보냈다. 그가 주먹 쥔 손을 안쪽으로 꺾으며 엄지만 펴자, 차소영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정선차가칠십이환권(晶鮮車家七十二幻拳) 제사십사식(第四十四式) 제일초 연지(緣指)는 필승의 각오와 구애의 함의를 동시에 담고 있었다.
이는 차소영의 고조부이자 이 초식의 창시자였던 차종열(車宗列)이 강적과의 생사투를 앞두고 심중에 품었던 여인에게 그가 대결에서 죽지 않으면 자기의 연정을 받아 달라고 청했던 일화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당시 차종열은 만만치 않은 상대인 육지파객(六指跛客) 조춘(趙春)과의 혈전 끝에 엄지로 그의 목에 구멍을 냄으로써 치열했던 승부의 종지부를 찍었다.
여인은 목숨을 걸고 그녀의 일가를 몰살시킨 원수를 처단한 권사(拳士)와 기꺼이 부부지연을 맺었다. 그 이후 차가의 후예들은 연지의 기초 동작을 생사대적과의 결전에 임하는 필사의 결의나 청혼의 표시로 사용해 왔다.
고량의 주먹에서 빠져나온 엄지를 본 차소영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설레서가 아니라 불길한 예감 때문에.
그녀의 불안한 심사를 대변하듯,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