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55
제54화
장창(長槍)이 된 채찍이 문상진의 가슴을 찔러 갔다.
문상진은 칼로 쳐 내지 않고 위로 뛰어올랐다. 눈이 달린 듯 편두가 그를 추격했다. 채찍이 발목을 휘감을 찰나, 공중에서 한 번 더 도약하는 신기를 과시하며 문상진이 칼을 내리쳤다. 거리가 이 장이나 떨어져 있었음에도 칼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도기가 금세 하수린에게 이르렀다.
하수린은 때 이르게 선택의 기로에 섰다. 반경 일보 이내에서 도기를 흘려 내며 청사편으로 문상진의 하체에 일격을 가할 것인가. 아니면 크게 물러나서 안전을 도모할 것인가.
하수린의 선택은 후자였다. 초장부터 후퇴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목숨과 승패를 건 도박은 더더욱 내키지 않아서였다.
결과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하수린이 훌쩍 물러선 자리에 꽂힌 도기는 소멸되지 않고 안개처럼 번졌다. 문상진이 첫수에 최강수를 들고 나왔음을 깨달은 하수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짧은 보법이나 몸놀림으로 회피하려 했다간 적운에 걸려 내상을 입었을 터였다.
하수린의 가지런한 눈썹이 갈매기 모양을 이루었다. 화가 나거나 긴장할 때, 혹은 전의가 불타오를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 * *
명불허전!
삼 초의 공방 만에 문상진은 하남 무림의 어린 여인이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알아차렸다. 강호가 전하는 소문 그대로였다.
비무 개시 전 짐짓 그녀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건 일종의 미끼였다. 강호초출에 명성을 얻어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신성들은 자존심을 건드리면 성질을 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분기를 다스리지 못하는 무인은 형세 판단이 흐려지는 법이었다.
하남편봉에게 먼저 달려든 것은 누가 보더라도 당연한 행동이었다. 모든 싸움이 그러하듯 승부의 관건은 자기에게 유리한 거리의 확보였다. 채찍을 부리는 이에겐 붙어야 했다. 일 장의 범위 내에서 전권이 형성되면 승리는 확정된 것이나 진배없었다.
하남편봉도 그 사실을 알 터이기에 그녀의 공격적 저지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때 몸을 띄운 건 두 번째이자 결정적 미끼였다. 움직임이 제한되는 허공으로의 도약은 상대를 경시한다는 의사 표시였다. 하남편봉은 틀림없이 화를 낼 터였다.
하지만 확신에 가까웠던 예측은 빗나갔다. 옆으로 발을 옮겨 도기를 피하며 채찍으로 그의 다리를 갈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음에도 하남편봉은 뒤로 몸을 날렸다.
그녀가 단지 겁을 먹고 물러선 것이 아님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물러나면서도 견제를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쫓으면 날이 선 채찍에 종아리가 베일 터였기에 문상진은 기껏 줄인 거리를 다시 내주어야 했다.
“핫!”
칼로 채찍을 쳐 내며 문상진이 힘찬 기합성을 토해 냈다.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아쉽게도 문상진의 편안한 착지를 허용한 하수린은 그가 숨을 고를 겨를을 주지 않고 맹공을 퍼부었다. 삼 장 길이의 채찍이 추측 불가의 궤도를 그리며 허공에서 난무(亂舞)를 추었다.
취이익, 우우웅.
청사편이 일으킨 날카로운 기음과 적운도가 발하는 묵직한 도명이 섞여 중인의 고막을 괴롭혔다.
묘한 양상이었다. 공격을 하는 쪽은 하수린이었으나 주도권은 문상진이 쥐고 있었다. 문상진은 방어를 두텁게 하며 야금야금 거리를 먹어 들어갔다. 시나브로 밀리던 하수린은 비무장을 벗어나 어느새 방책 어림까지 몰려 있었다. 그녀의 좌우 동선을 차단하며 문상진이 한 걸음씩 전진했다. 거리가 이 장으로 좁혀지자 하수린의 입장에서 백중열세였던 형세가 급격히 비세로 바뀌었다.
노련한 사냥꾼답게 문상진은 서두르지 않고 하수린을 압박했다. 그녀는 항복 선언을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것이었다. 입을 벌리는 순간 그녀를 포위한 붉은 구름이 번개가 되어 그녀의 동체를 갈라 버릴 터이기 때문이었다.
하수린의 흔들리는 동공을 보며 문상진은 마무리를 짓기로 마음먹었다. 강찬이 승패의 판정을 내리기 전에 전리품을 챙겨야 했다.
어디가 좋을까.
채찍을 부리는 우수(右手)를 잘라 버리는 건 너무 가혹하니 문상진은 왼손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목표물을 정한 문상진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채찍을 걷어 내며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그러고는 반사적으로 들어 올린 하수린의 손목을 가차 없이 칼로 내리그었다.
캉!
문상진은 어리둥절했다.
소리도 기이했거니와 칼에 전해지는 감촉도 이상했다. 마치 금강석에 부딪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문상진은 이상 감각의 원인을 확인하지 못했다. 납득 불가의 기성(奇聲)을 듣자마자 혼절했기 때문이었다. 승리를 목전에 둔 그가 도리어 입에서 피를 뿜으며 뒤로 날아가자, 마령 문가 진영에서 뿐만이 아니라 반대편에서도 경악성들이 터져 나왔다.
마령 문가의 누군가 신음성을 흘렸다.
“소수마공(素手魔功).”
낮은 목소리였지만 내공을 지닌 이들은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하수린의 손으로 향했다. 백분(白粉)을 바른 듯 하얗게 변한 그녀의 좌수가 중인의 시야에 들어왔다. 우중의 축축한 공기가 한겨울처럼 얼어붙었다.
하수린의 눈썹들이 두 마리의 갈매기를 만들었다.
격탕된 내기를 가라앉힐 여유도 없이 하수린이 해명에 나섰다.
“소수공은 맞지만 마공은 아니에요.”
마령 문가의 일선 중앙에 있던 육십 대 초반의 노인이 달려와 문상진의 상태를 살폈다. 정신을 잃었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음을 확인한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마령 문가 무력 서열 삼 위의 강호 파혼도 문수창이었다.
“그게 무슨 궤변이냐?”
“저는 동녀(童女)들의 순음지기를 취한 적이 없어요.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문수창의 안면에 불신의 기색이 드리우자 하수린이 소매를 걷어 팔뚝을 보여 주었다. 그녀가 힘을 주자 팔이 접히는 부위에 세 줄기 새파란 힘줄이 도드라졌다. 그것을 본 문수창의 눈빛이 굳었다.
“아시겠지만 이건 구음절맥(九陰絶脈)을 나타내는 표시 중에 하나예요.”
충분한 설명이었다.
중인이 술렁거렸다.
구음절맥은 천만인에 하나꼴로 난다는 태양신맥(太陽神脈)에 비견되는 천혜의 신체였다. 태양신맥을 타고난 사내가 무공을 익히면 천하제일인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속설이 있듯, 구음절맥의 여인 또한 일반적인 천재들은 범접치 못할 무재를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 일천 년 무림사에 등장했던 여중제일인의 태반이 구음절맥이었다는 설도 있었다.
구음절맥은 축복만은 아니었다. 양기가 지나쳐 여인을 품을 수 없다는 태양신맥처럼, 구음절맥 또한 사내와의 교합이 불가능했다. 음양기맥(陰陽奇脈)의 소유자와 몸을 섞는 이는 무공의 고하와 상관없이 염라전으로 직행해야 했다.
하수린이 구음절맥이라면 소수공은 맞되 마공이 아니라는 그녀의 주장에 일리가 있었다.
소수마공은 일백이십 년 전 강호에 혈겁을 일으켰던 소수마녀(素手魔女) 진청(珍靑)의 독문무공이었다. 원래 정파의 명문대가 출신이었으나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던 이의 배신에 한을 품은 진청은 사마(邪魔)의 길을 걸었다.
수공(手功)을 특장기로 하는 가문의 무공을 바탕으로 사십여 년에 걸쳐 희대의 마공을 완성한 진청은 복수에 나섰다. 백발의 노파가 되어 강호에 나온 진청은 그녀를 버렸던 옛 연인과 그의 처는 물론이고 그들 부부의 일가친척들까지 모조리 몰살시켰다. 그 와중에 전혀 관련이 없는 이들도 부지기수로 죽어 나갔다. 나흘간 그녀에게 학살당한 이들의 수는 물경 일천팔백에 달했다.
진청의 만행에 격분한 정파의 협사들이 마녀를 처단하러 나선 것은 당연지사였다. 진청은 달아나지 않고 옥쇄를 택했다. 그녀가 최후를 맞이했던 주화산(朱花山) 삼두곡(三頭谷)의 혈전에서 다시 육십의 협객들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세상에 나온 지 한 달도 안 돼 처참한 종말을 맞았으나, 진청이 남긴 후유증은 컸다. 무엇보다 당대 오대세가의 한 자리를 차지했던 그녀의 가문이 몰락하고 말았다.
장평 진가(珍家)는 단순히 마녀를 배출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마공을 이루는 과정에서 저지른 천인공노할 짓을 지원한 혐의로 만인의 규탄을 받았다.
진청은 소수공의 위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초경을 치르지 않은 어린 여아들의 순음지기를 취했다. 나중에 조사된 바로는 확인된 숫자만 삼백을 넘었다. 장평 진가는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을 했지만, 워낙 장기간에 걸쳐 대규모로 진행되었기에 곳곳에 증거가 남아 있었다. 궁지에 몰리자 희생된 여아들이 죄다 가축보다 못한 천민 출신이고, 진청이 신공을 창안하는 진정한 목적을 알지 못했다는 너절한 변명만 일삼던 장평 진가는 결국 사태에 책임을 지고 십 년 봉문을 선언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파혼도 문수창이 장조카를 안아 들었다.
“네가 정당한 수단으로 그 마공을 익혔는지는 따로 따져 볼 날이 있을 것이다.”
일단은 구인결을 지속하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하수린을 쏘아본 문수창이 문상진을 안고서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하수린이 강찬을 보았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강찬이 마지못해 판정을 내렸다.
“제삼전은 백도방의 승리다.”
하수린은 천천히 삼보장 일행에게로 걸어갔다. 그녀를 맞이하는 동료들의 눈빛은 제각각이었다. 하수린의 신경은 진천에게만 쏠려 있었다. 그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비기(秘技)의 노출과 비밀의 공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출전을 자원하며 하수린은 내심 풍뢰도 문상현이 그녀의 상대로 나오기를 바랐다. 풍뢰도라면 비장의 패를 쓰지 않더라도 물리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마령 문가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고 적운도를 내보냈다. 적운도는 편법(鞭法)으로만 대응하기엔 버거운 인물이었다. 따라서 비무가 시작되기 전에 결정을 해야만 했다. 드러낼 것인가 말 것인가.
하수린은 전자를 택했다. 어차피 본격적으로 강호행에 나선 이상 소수공의 초현은 시간문제였다. 적운도라면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상대였다. 그는 정파 무림을 통틀어 삼사십 위권으로 평가받는 강호였다. 그를 꺾으면 배전의 무명(武名)을 얻게 될 터였다.
소수공을 구현하기로 작심했으나 하수린은 일단 편공으로 버텨 볼 심산이었다. 일백 초가 목표였다. 하지만 오십 초도 지나지 않아 욕심을 접어야 했다. 공력과 기교, 그리고 경험치 모두에서 적운도에 비해 한 수 아래였다.
무림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는 명가의 저력을 절감한 하수린은 적운도의 몰이에 순응해 방책으로 붙었다. 막다른 벽에 몰리지 않고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 좀 더 초수를 늘릴 수 있었으나, 구차스러운 몸부림에 불과했다.
그녀의 퇴로가 없어졌다고 여긴 적운도가 승부를 매조지하려는 일도를 날렸을 때, 하수린은 찰나지간 갈등했다. 그의 칼은 노골적으로 단수(斷手)를 노리고 있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상대가 팔을 자르려 든다면 그녀도 응당한 대가를 요구해야 했다. 그녀에겐 적운도의 어깨를 박살 내 그를 불구로 만들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하수린은 마지막 순간 자중했다. 그러고는 소수에 칼이 가로막혀 당황한 적운도의 명치에 우권(右拳)으로 일격을 가하는 정도에 그쳤다. 주먹으로 치지 않고 수도(手刀)로 찔렀다면 적운도는 즉사를 면치 못했을 터였다.
손속에 사정을 봐준 것은 마령 문가와 원수가 될 까닭이 없다는 계산의 발로가 아니었다. 출전하기 전 생사투가 아님을 주지시키던 진천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그녀의 부상을 염려해 무리를 하지 말라는 당부임을 알고 있었으나, 그의 순후한 정심은 상대방인 적운도에게도 적용될 터였다.
진천을 응시하며 하수린은 그의 속을 읽으려 애썼다.
평소의 담백한 눈빛과는 달리 복잡한 심사가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하수린은 그가 그녀의 비기 때문에 충격을 받았는지 아니면 육체적인 정을 나눌 수 없는 몸임을 알게 되어 놀란 건지 궁금했다. 그도 아니면 소수마녀라는 희대의 악녀의 유진(遺塵)을 이은 것이 역겨운 걸까.
하수린이 빤히 바라보자 진천의 입술에서 무미건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수고했소, 하 소저.”
하수린은 실망했다. 그리고 언제 혼란스러웠냐는 듯 평정을 되찾은 진천이 얄미웠다. 하수린의 심중에서 그를 흔들고 싶은 충동이 분수처럼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