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58
제57화
점박이 노인이 가린의 정체를 폭로했으나, 반향은 의외로 적었다.
백도방 무리에서 약간의 웅성거림이 나왔을 뿐이었다. 마령 문가의 도객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일천 년 전 무림이라는 별세계가 태동하기 이전에는 요괴들이 인간들과 함께 살았었다. 물론 양자는 사이좋은 이웃이 아니라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였다. 개별적인 무력은 월등했으나, 수적으로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적었기에 요괴들은 숨어서 지내야 했다. 그러다 때때로 저자에 출몰해 사람들을 해치며 난동을 부리곤 했다.
무림이 형성되고 범인의 능력을 훌쩍 뛰어넘는 무인들이 등장한 이후로는 그마저도 어려워졌다. 요괴들은 무인들을 당해 내지 못했다.
무인들에게 밀려 중원에서 자취를 감춘 요괴들은 남방 밀림이나 북해 빙원, 혹은 해양의 고도 같은 오지로 쫓겨났다. 삼백여 년 전 전무후무한 무존(武尊)으로 추앙받는 천무대제(天武大帝) 이강(李剛)이 나오기 전까지 요괴들은 오랫동안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양념 정도로 취급받았었다.
그러다 천무대제가 반인반괴(半人半怪)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그들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호감도 또한 크게 높아졌으나, 이상하게도 요괴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일설에 따르면 천무대제 당시 그와 대립했던 몇몇 기인이사들이 사방세계 요괴들의 씨를 말린 결과라고 했다.
요괴는 종류도 다양하고 인간들과의 친소(親疏)도 제각각이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요괴들은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괴력의 소유자라는 것이었다.
문수창은 칠팔 장 전면에서 맹렬한 투기를 뿜어내는 거인을 응시했다.
오랜 연구로 인면요괴의 무력에 관해서는 정확한 분석과 평가가 이루어졌다. 그들의 최고 수준은 절정의 상(上)이었다. 고대 왕국의 군문 시절이라면 일만의 정병으로도 대적하기 힘든 괴물들이었다. 무림에 나오더라도 십대고수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초강자로 대접받을 수 있는 무력이었다.
하지만 초인들의 시대로 불리는 삼백 년 전을 제외하면, 무림사의 최절정기로 평가받는 당금 무림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고작해야 일백 위권일 터였다.
문수창은 친형인 문수영(文秀英)이 그의 상대가 인면요괴임을 상기시킨 까닭을 알고 있었다.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선 그에게 던지는 역설적 경고였다.
오촌 조카 문상진과 사촌 동생인 문수형은 무력의 차이가 아니라 심리적인 허점으로 인해 패배의 쓴맛을 봤다. 하남편봉과 철곤귀를 경시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렇게 무참히 깨질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문수창은 심호흡으로 폐에 공기를 채워 넣었다. 문수영의 불안감은 이해하나, 쓸데없는 노파심이었다. 애당초 방심 따윈 한 줌도 없었다.
빗줄기가 굵어졌다.
가린이 상체를 숙였다. 워낙 팔이 길었기에 무릎을 약간만 구부리고도 양 주먹이 땅바닥에 닿았다.
문수창도 발도했다. 그의 공력을 주입받은 도신에서 희뿌연 도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출전자들이 채비를 마치자 강찬이 비무 개시를 선언했다. 가린과 문수창은 동시에 서로에게 돌진했다.
캉!
쇠와 쇠가 부딪치는 기음과 함께 우열이 갈렸다. 오른팔을 들어 문수창의 칼을 막은 가린이 왼팔을 휘둘러 그의 머리를 노렸다. 길쭉한 손톱이 고개를 젖힌 문수창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문수창은 싹싹하게 퇴보를 밟았다. 바위만 한 쇳덩이도 무처럼 잘라 버리는 그의 칼은 가린의 팔뚝에 생채기만 남겼을 뿐이었다. 가히 괴물이라 불려 손색이 없는 요괴였다.
격돌 다음은 추격전이었다. 문수창은 후퇴하고 가린은 쫓았다. 상승의 신법으로 가린의 무지막지한 공격을 피해 내며 문수창은 끊임없이 반격을 가했다. 가린의 거대한 동체에 수십 개의 도흔이 새겨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린은 고량처럼 혈인이 되었다.
꾸어어―!
고통스러운지 가린이 괴성을 토해 내었다. 그러나 가린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문수창을 몰아붙였다. 한 번만 걸리면 작살을 내겠다는 의지가 역력했다.
문수창은 서두르지 않고 냉정하게 요괴를 파악했다.
요괴의 공격 수단은 너무나 단순했다. 발톱, 주먹질. 아무리 강력해도 예측 가능한 수법에 당하는 것은 하급 무사들이나 저지를 짓이었다.
동작들 역시 전형적이었다. 그때그때 본능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터무니없이 빨랐으나 위협적인 정도는 아니었다.
문수창은 요괴의 목적이 그를 할퀴거나 때리는 것이 아니라 붙잡는 데 있음을 알아차렸다. 어쩌자는 걸까. 나를 잡아서는 찢어 죽이기라도 할 참인가.
일순 헛웃음이 나왔지만 문수창은 바로 집중했다. 한순간의 실수는 패배, 혹은 죽음과 직결될 터였다.
요괴의 몸에 스물두 곳의 칼자국을 남긴 문수창은 결론을 내렸다. 지금의 방식으로 요괴를 쓰러뜨리려면 수백 초가 필요할 터였다. 어쩌면 일천 초 이상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요괴가 두른 갑피는 철벽이었다.
요괴의 눈에 쏜 도기가 통하지 않음을 확인한 문수창은 드디어 진짜 칼을 꺼냈다. 요괴는 단단하되 금강불괴는 아니었고, 그는 요괴에게 칼의 무서움을 보여 줄 것이었다.
“도, 도강(刀剛)이다!”
백도방의 무사들 가운데 하나가 부르짖었다.
문수창의 반월도에서 뻗어 나온 강기가 투박한 몽둥이 같은 형체를 이루었다. 그것을 본 가린이 훌쩍 뒤로 물러섰다. 가린의 동공에 서린 두려움을 인지한 문수창은 그가 강기에 당한 경험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누구였을까. 하남신룡? 태극마선?
누구였건 나중에 알아볼 일이었다. 지금은 목전의 사냥감을 잡는 데 전심전력(全心全力)을 쏟아야 할 때였다. 도강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반각 남짓에 불과했다. 그 안에 확실한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문수창은 당연히 그럴 자신이 있었다.
공세일변도였던 가린이 대항을 포기한 채 물러서기 시작하자, 진천은 조바심이 났다.
파혼도의 도강은 최상의 수준이 아니었기에 침착하게 대처한다면 반전의 기회가 올 테지만, 가린은 대웅처럼 겁을 먹은 상태였다. 파혼도가 독한 마음을 먹으면 자칫 불상사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도강이 사지나 몸통이 아니라 목에 꽂히면 매우 위험했다.
진천은 가린이 항복을 선언하거나 아니면 방책을 넘어 달아나기를 바랐다. 그리되면 강찬이 판정을 내릴 터였다. 구인결에서 패배하겠지만, 가린이 변을 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정신 차려라, 가린. 넌 할 수 있어.”
진천의 옆에서 여상구가 소리쳤다. 진천은 의형의 눈에 번들거리는 광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고는 그가 가린에게 행했다는 특훈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방책 가까이 몰렸던 가린이 등을 돌렸다.
호랑이의 앞발처럼 휘젓는 그의 양팔을 가볍게 피한 문수창이 살짝 뛰어 오르며 가린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가린이 목을 비틀었다. 강기를 머금은 문수창의 칼이 그의 머리 대신 어깻죽지에 떨어졌다.
가린의 철갑을 가르는 데는 성공했으나 문수창은 일도에 그를 양단하지는 못했다. 문수창의 칼은 통나무를 쪼개는 데 실패한 도끼처럼 가린의 어깨에 박혀 버렸다.
어깨에 일격을 허용한 찰나, 가린은 왼팔을 뻗어 문수창의 목을 잡아 갔다. 칼을 놓고 벗어나려 했으나 문수창은 간발의 차이로 가린의 손아귀에 들고 말았다. 그리고 승부는 끝이 났다.
“안 돼, 가린!”
진천의 고함에 칼잡이의 목을 몸통에서 뜯어 버리려던 가린은 그를 땅바닥에 패대기치는 것으로 대체했다. 척추가 수수깡처럼 부러졌을 터임에도 문수창은 발버둥 쳤다. 하지만 가린이 재차 내리꽂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번엔 머리부터 부딪쳤기 때문이었다. 돌바닥이었으면 두개골이 박살 났을 것이었다.
기절한 문수창을 들어 올린 가린이 외쳤다.
“가린은, 이긴다!”
짝짝짝.
난데없는 손뼉 소리가 우중의 무거운 공기를 울렸다. 박수를 친 이는 여상구였다.
“잘했다, 가린. 가르친 보람이 있구나.”
여상구가 강찬을 압박했다.
“저대로 두면 저 친구가 힘자랑을 더 할 터인데. 파혼도에게 문제가 생기면 늦은 판정으로 인한…….”
여상구의 엄포가 끝나기도 전에 강찬이 부랴부랴 판정을 내렸다.
“백도방의 승이오.”
문수창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가린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어깨에 박힌 칼을 뽑았다. 칼이 나온 자리에서 피가 콸콸 솟구쳤다. 칼을 부러뜨리려던 가린은 비명을 질렀다. 오른팔에 힘을 쓰다 격통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문수창의 반월도를 내동댕이친 가린이 동료들에게로 돌아왔다. 진천이 전각 처마로 가서 금창약이라도 바르라고 했지만 가린은 딴소리를 했다.
“가린은, 본다.”
가린의 신체가 지닌 경이로운 회복력을 알지만 출혈이 너무 심하기에 진천은 억지로 그를 끌고 처마로 갔다. 어지러운지 가린이 비틀거렸다. 처마에 이른 진천은 그세 정신이 혼미해진 가린을 눕히고 응급 처치를 했다. 상처가 매우 깊었지만 다행히 지혈분(止血粉)이 들어 피가 멎었다.
진천은 하수린을 불렀다. 부상병동이 된 동료들을 보호할 이가 필요해서였다. 하수린은 관전이 불편한 곳에 가는 게 싫었으나 진천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일행을 하수린에게 맡긴 진천은 여상구에게로 돌아왔다. 마령 문가의 다음 출전자를 보고는 흥분을 억누르고 있던 여상구가 긴 날숨을 내쉬었다.
“나는 준비됐네, 아우님.”
할 말이 많았지만 진천은 세 마디만 내뱉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형님.”
마령 문가의 육장(六將)은 진천이 예언한 대로 화월도군(花月刀君) 문찬우였다.
기실 점박이 노인으로서도 이제는 외길 수순이었다. 파혼도의 패배로 여유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중견 도호를 내보냈다가 진천이나 여상구에게 일 패를 당하면 대번에 구인결에서의 승리가 날아갈 판이었다. 창천도군이라는 절대 패를 쥐고 있다고 해도 아직 세 판이 남았기에 삼보장 측은 그를 피해 진천이든 여상구든 내보내면 그만이었다. 마령 문가의 입장에서는 둘 중 하나를 반드시 잡아야 했다.
문찬우가 산보라도 나온 듯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비무장으로 향하자 여상구가 출전을 알리고는 그의 맞은편에 가서 섰다. 마령 문가의 이인자가 칠팔 장을 격하고 선 여상구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군, 여 각주. 사십오 년 만인가?”
여상구가 정정했다.
“사십칠 년하고도 두 달이오, 화영도(花影刀).”
중인은 도화각주의 비상한 기억력에 감탄했다. 그러면서 그가 화월도군을 옛 별호로 부른 연유를 궁금해했다. 젊은 날 문찬우는 칼을 휘두를 때마다 일곱 송이의 꽃 그림자를 만드는 기예로 유명했다. 도화각주는 지난날의 친분을 상기시키려는 걸까.
“허어, 자네를 본 지 반백 년이나 흘렀다니. 그런데 세월의 발톱은 나만 할퀴고 지나갔군그려. 자네는 아직도 그날의 앳된 소년 같구먼.”
여상구가 환갑을 지난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동안의 소유자이긴 했지만, 문찬우 역시 범상한 외양이 아니었다. 여든 줄에 접어들었음에도 피부는 팽팽했고 눈빛은 형형했다. 백발과 백염이 아니었다면 중년이라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당신도 옛 모습 그대로요. 특히 그 눈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소.”
문찬우가 비에 젖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런가? 자네 눈도 마찬가지일세. 솔직히 의외구먼. 간간이 자네 소식을 듣곤 했는데, 나는 자네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했다네. 그런데 지금 보니 예전의 그 눈빛 그대로구먼.”
“어떤 눈빛 말이오? 살귀의 눈빛?”
“부인하진 않겠네.”
두 명사가 비무에 앞서 가벼운 담소를 나누는 줄 알고 있던 중인은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긴장했다.
문찬우의 감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상구의 눈에서 가공스러운 살기가 폭사되었다. 문찬우는 눈살만 살짝 찌푸렸을 뿐 평온한 신색을 유지했다.
여상구가 품에서 부채를 꺼냈다.
“오늘의 일전은 혜령(惠玲)과 주연(姝燕)에게 바칠 거요.”
문찬우의 양안에 이채가 서렸다.
“그 아이들의 이름이 혜령과 주연이었던가? 가물가물했는데 이름을 들으니 얼굴도 떠오르는구먼. 참으로 고운 아이들이었지.”
여상구의 전신에서 살기가 돋아났다.
“칼을 뽑아라, 화영도.”
여상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문찬우가 묵묵히 발도했다.
행여나 그를 건너뛰고 진행될세라, 강찬이 급히 비무 개시를 알렸다.
“시작하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