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59
제58화
사십칠 년 전 마령 문가의 기재 문찬우는 정맹 제칠감찰대(第七監察隊)의 대주로서 봉천 도화각을 찾았다.
나이 서른셋에 불과한 그가 사오십 대의 대원들을 거느린 대주가 된 까닭은 용호(龍虎)였기 때문이었다. 무림에서의 서열은 무력에 의해 정해지는지라 전원이 일류 고수인 열두 명의 대원은 아무도 불만을 내색하지 못했다.
문찬우의 감찰대는 도화각의 소각주에 관한 괴담의 진위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봉천에 온 것이었다. 나흘간 도화각에 머무르는 동안, 문찬우는 조사를 대원들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꽃밭에서 뒹굴었다.
문찬우에겐 일종의 기벽이 있었다. 그는 성숙한 여인들에겐 욕정이 일지 않고 초경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소녀들에게만 끌렸다. 문찬우는 도화각의 보고(寶庫)에 눈독을 들였다. 동기(童妓)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기녀로 나서기 위한 고육을 받고 있던 열다섯 살 어림의 소기(小妓)들이었다.
그들 중 두 소녀가 단연 눈에 띄었다. 문찬우가 원하는 모든 조건을 갖춘 소녀들이었다. 예뻤고 순종적이었으며 기금서화(棋琴書畫)에도 능했다. 무엇보다 수궁사(守宮砂)를 간직한 청백지신이었다.
문찬우는 그들의 시중을 요구했다. 웬일인지 도화각의 당대 주인이었던 여하성(呂夏星)은 난색을 표했다. 이는 이상한 일이었다. 아직 원주 강가가 북천도왕을 배출하기 전이라, 당시만 해도 마령 문가는 오대세가 중 최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성세를 구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바쳐도 모자랄 판에 그런 강대문파의 초신성에게 한낱 소기 따위를 아까워하다니.
그러나 여하성은 결국 문찬우의 요구에 굴복했다. 문찬우가 등에 업은 배경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가 외동아들의 생살여탈권을 쥔 감찰대주였기 때문이었다.
두 소기가 마음에 든 문찬우는 그들을 본가로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이처(二妻)와 사첩(四妾)을 두고 있었으나 그들이 스무 살을 넘긴 이후로는 누구와도 몸을 섞지 않고 있었다.
수하들의 최종 보고를 받은 문찬우는 도화각 소각주를 무혐의로 처리했다. 미희들을 뇌물로 받아서가 아니었다. 그는 공과 사를 구별하는 인물이었다. 도화각의 후계자는 실로 못된 습성을 갖고 있었지만, 도화각이 그의 살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조달한 제물들은 하나같이 벌레만도 못한 자들이었다. 벌레를 죽였다고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문찬우는 차후부턴 자중하란 경고를 잊지 않았다. 눈빛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 도화각의 어린 살귀에게 정맹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의 위신을 세워 주려고 그랬는지 그가 봉천을 떠난 후 도화각 소각주에 관련된 괴담은 차츰 사그라졌다. 자신의 처사에 만족한 문찬우는 몇 달 지나지 않아 도화각에서의 일을 까맣게 잊었다. 기억에 간직하고 있기엔 너무나 사소한 일이었다.
* * *
그날 이후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이가 피로 쓴 절규를.
주연의 혈서를 받아 든 날 통곡하다 기어이 실신했다. 정신을 차리고는 반드시 원한을 갚아 주겠다고 두 원혼에게 맹세했다.
그 이후의 삶은 문찬우의 무력을 따라잡기 위한 여정이었다. 쉽지 않았다. 아니, 불가능한 과제였다.
무공의 토대를 닦아야 할 십 대 시절을 허송세월로 보낸 데다 상대는 오대세가 전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기재(奇才)였다. 도화각의 경영은 충복들에게 맡기고 무공 수련에만 매진했으나 문찬우와의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는 천공의 별처럼 아득한 존재였다.
좌절감은 포기를 종용했다. 하지만 굴하지 않았다.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빛바랜 혈서를 바라보며 혀를 깨물고 결의를 새롭게 다졌다.
마부작침(摩斧作針)의 노고는 보답을 받았다. 무공일도에 바친 이십 년은 절정의 관문을 열어 주었다. 마흔이 되어서 이룬 쾌거였다. 다시 이십 년이 지나고, 마침내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섰다.
이제 때가 되었다. 문찬우를 이기기는 어렵겠지만, 그를 지옥행의 동반자로 삼을 수는 있을 것이었다.
여상구의 부채에서 뻗어 나온 청홍의 강기에 적아를 불문하고 경악성을 터뜨렸다.
파혼도가 현시했던 도강보다 선명한 선강이었다. 도화각주의 무력이 초절정의 초입 수준을 지났다는 방증이었다.
문찬우의 칼에서 솟구친 도강도 굉장했다. 뚜렷한 반월을 이룬 강기는 그가 용좌의 도백으로 손색이 없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강기와 강기의 충돌은 열 개의 벼락이 동시에 치는 듯한 굉음을 낳았다. 내공이 약한 이들은 고막을 보호하기 위해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두 강자는 다른 차원의 무력만 과시한 것이 아니었다. 앞선 어느 대결보다 흉험한 싸움이었다. 누가 봐도 비무가 아니라 생사투였다.
마령 문가 도호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가문의 기둥을 잃는다면 백도방을 취한들 아무 이득이 없었다. 화월도군의 이름값은 백도방 전체의 값어치를 능가했다.
몇몇 도객이 창천도군에게 눈을 돌렸다. 그만이 저 무시무시한 싸움에 개입해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창천도군은 굳은 낯빛으로 육촌 아우의 혈전을 지켜보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진천은 파국을 예감했다.
의형은 그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동귀어진을 감행할 작정임에 분명했다. 안타까웠지만 의형의 의사를 존중해야만 했다. 평생 기다려온 순간이니 의제(義弟)로서 그가 뜻을 이루도록 응원해야 마땅했다.
살벌한 공방전을 관전하며 간을 졸이는 진천의 뇌리에 의형에게서 들었던 가슴 아픈 사연이 스치고 지나갔다.
소년 여상구는 두 소녀와 동시에 사랑에 빠졌다.
혜령은 열여섯이고 주연은 열네 살이었다. 그와는 위아래로 한 살 터울이었다. 둘은 같은 주안 출신인 데다 비슷한 시기에 도화각에 팔려 와 서로 의지하며 지냈기에 친자매 이상으로 정이 두터웠다.
여상구와 먼저 친해진 이는 주연이었다. 귀여운 용모와는 달리 대담한 구석이 있는 그녀는 모두들 두려워하는 소각주를 어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했다. 그녀의 당돌한 모습에 반한 여상구는 신분의 차이를 무시하고 허물없이 대했다. 몇 달 후 첫 입맞춤을 기점으로 소년 소녀의 우정은 남녀 간의 연정으로 발전했다.
여상구와 연분이 싹튼 주연은 그에게 혜령을 소개했다. 팔 남매의 맏이로서 나이에 비해 훨씬 성숙한 면모를 지녔던 혜령은 어린 시절 모친을 여의어 모성애에 굶주렸던 여상구의 갈애를 채워 주웠다. 여상구는 혜령과도 연인지연을 맺었다.
두 소녀는 먼지 한 톨만큼의 질투도 없이 이전보다 더 서로를 아끼고 챙겼다. 그녀들과의 사랑은 여상구에게 극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사랑하는 이들의 끈질긴 간청에 못 이긴 여상구는 이 년 가까이 즐기던 살인의 도락을 중단하기로 약속했다. 공교롭게도 정맹의 감찰대가 도화각을 방문하기 하루 전날의 일이었다.
비극은 불시에 찾아들었다.
정맹 감찰대가 온 다음 날, 부친이 찾아와 혜령과 주연에게 감찰대주의 시중을 들게 할 거라고 알리자 여상구는 길길이 날뛰었다. 부친은 단지 금을 뜯고 술을 따르게 할 뿐이라고 여상구를 달랬다. 감찰대주의 요구를 거절했다간 어떤 앙갚음을 당할지 몰랐기에 여상구는 참아야 했다. 강자존(强者存)은 무림의 제일 철칙이고 약자는 죄인에 다름 아니었다.
정작 충격적인 일은 그로부터 사흘 후에 터졌다. 심야에 그의 처소에 들른 주연과 혜령이 감찰대주를 따라가겠다고 선언하자 여상구는 귀를 의심했다. 강압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 본인들이 노력해서 쟁취한 행운이라는 주연의 말이 여상구의 심장을 찢었다. 배신감에 치를 떨며 여상구는 두 소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살려 달라고 비는 대신 주연은 후환이 두렵지 않으냐며 겁박했다. 그 순간 과도한 노화로 인해 심맥(心脈)이 터진 여상구는 피를 토하며 혼절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모든 일이 끝난 후였다.
부친의 고백을 들은 것은 보름이 지나서였다.
식음을 전폐하고 해골처럼 사위어 가는 여상구의 모습을 보다 못한 부친이 전후 사정을 털어놓았다. 혜령과 주연의 냉혹한 이별 통보는 소주의 미래를 위해 확실히 정을 끊어야 한다는 부친의 설득과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감찰대주를 구워삶지 못하면 여상구의 생명이 위태로워진다는 각주의 말에 최선을 다했던 두 소녀는 그를 흡족하게 만드는 정도를 넘어 홀리고 말았다. 감찰대주는 그녀들을 첩으로 삼고 싶어 했다. 감찰대주를 따라가라는 각주의 명을 자결로써 거역하려던 두 소녀는 그리되면 여상구에게 피해를 미치게 될 거라는 그의 애원에 눈물을 머금고 사랑하는 이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야 했다.
부친을 원망하며 여상구는 혜령과 주연을 되찾기 위해 온갖 애를 썼다. 하지만 흘러간 강물이 돌아오지 않듯, 이미 보내 버린 연인들을 도로 데리고 올 방도는 없었다. 마령 문가는 도화각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절대 세력이었다. 그들이 두 명의 용호만 보내도 도화각은 하루아침에 멸문지화를 당할 터였다.
여상구는 실의에 빠졌다. 몇 번이나 마령으로 가서 사랑하는 이들을 몰래 빼 오려고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마령 문가는 알량한 무력을 지닌 소년에겐 철옹성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월이 약이라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상구의 심상(心傷)은 조금씩 아물었다. 여상구는 술과 여색과 노름으로 십 대의 후반을 탕진했다. 하지만 살인은 광기에 젖은 날을 제외하곤 최대한 삼갔다. 혜령과 주연이 도화각을 떠나가며 자기들이 없더라도 ‘약속’을 지켜 줄 것을 신신당부했다는 부친의 전언 때문이었다.
연인들과 작별하고 사 년 후, 주연이 보낸 서찰을 받았을 때 여상구는 독주(毒酒)와 미약(迷藥)에 찌들어 폐인이나 진배없는 상태였다.
* * *
비무, 아니 생사투는 진천의 예상대로 전개되었다.
객관적인 무위에서는 문찬우가 반 뼘이라도 위였다. 하지만 여상구에겐 무력의 열세를 상쇄시키는 무기가 있었다. 다름 아닌 천생살기였다.
여상구가 살기를 온전히 개방하자 백도방도들은 뱀의 눈을 접한 쥐처럼 얼어붙었다. 멀리 떨어진 그들이 그럴진대 면전에서 감당해야 하는 문찬우의 부담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었다. 문찬우가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살기만으로도 손발이 어지러워졌을 터였다.
그러나 문찬우는 정파 무림의 십대고수에 꼽히는 초강자였다. 일세를 풍미한 도백답게 소름 끼치는 살기를 견디며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여상구의 태극강기를 맞받아치는 기백을 과시했다.
밀리는 자가 패배하기라도 하는 양, 두 강호는 최초로 충돌한 지점에서 반경 일 장의 원을 벗어나지 않으며 공방을 주고받았다. 양자 모두 호신강기를 둘렀지만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도강과 선강에 무사하기란 불가능했다. 삼십 초도 지나지 않아 각각 옆구리와 왼 어깨가 갈라진 여상구와 문찬우의 동작이 무거워졌다.
관전자들은 숨을 죽였다. 이제 곧 승패와 생사가 판가름 날 것이었다.
일순 문찬우의 칼끝이 쏘아 낸 탄강이 여상구의 심장을 찔렀다. 그와 동시에 문찬우를 휘감았던 태극선강(太極扇剛) 중 붉은 강기가 그의 목을 베어 갔다.
양인은 각자의 필살기를 성공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