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60
제59화
문찬우가 비틀거렸다.
목 대신 잘려 나간 그의 우수(右手)가 거대한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팔이 붙어 있던 자리에서 피 분수가 솟구쳤다. 몸통에서 떨어졌지만 그의 손은 아직도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마령 문가 도호들은 망연자실했다. 목숨은 부지했으나 문찬우의 무인으로서의 생명은 끝났다고 보아야 했다. 칼을 부리는 손을 잃은 건 단전이 깨진 것과 다를 바 없는 치명상이었다. 이제부터 좌수도(左手刀)를 익히기엔 문찬우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
팔을 내준 대가로 문찬우가 얻은 것은 한 줌의 핏덩이였다. 탄강에 심장을 직격당한 여상구는 놀랍게도 응혈을 토했을 뿐 멀쩡했다. 일 장을 튕겨 나간 여상구가 벌떡 일어서자 주름 한 점 없는 문찬우의 면상이 애벌레의 등짝처럼 쭈글쭈글해졌다.
여상구는 호신강기만으로 문찬우가 날린 일격을 막아 낸 게 아니었다. 문찬우는 그가 왼 가슴에 특별한 보호구를 착용했음을 알아차렸다. 최후의 절초로 심장에 삭월탄(朔月彈)을 쏘리라는 것을 알고 대비했다는 뜻이었다.
여상구는 문찬우에게 달려들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광포하게 뿜어내던 살기도 갈무리한 채였다.
문찬우가 발로 땅에 떨어진 팔을 밟고 손에서 칼을 빼냈다. 여상구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고 문찬우의 행동을 지켜만 보았다. 왼손으로 도파(刀把)를 쥔 문찬우가 반월도를 앞으로 뻗었다. 칼에서 희미한 강기가 돋아났다.
여상구는 팔을 늘어뜨린 채 어떤 대응도 하지 못했다. 심장을 관통당하는 참사는 면했으나 내상이 심각하다는 반증이었다. 실성한 노인이 흘리는 침처럼 그의 입가에 선혈이 계속 흘러내렸다.
관전자들은 치열했던 격전의 최종 승리자가 문찬우가 될 것임을 알았다. 일 장의 거리이니 굳이 강기를 쓰지 않더라도 삼사 보만 전진해 칼을 그으면 끝날 것이었다.
하지만 문찬우는 중인의 예상을 거슬렀다. 착잡한 심사가 담긴 눈으로 여상구를 바라보던 그가 돌연 등을 돌리자 양편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던 문찬우가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 아이들의 일은 유감일세, 여 각주.”
여상구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진흙탕에 피를 게워 냈다.
눈치를 보던 강찬이 판정을 내리려는 순간 문찬우가 선수를 쳤다.
“이 일전은 나의 패배일세.”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강찬은 감히 토를 달 수 없었다.
진천은 가슴이 뭉클했다.
그는 당사자들을 제외하면 마지막 순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는 두 사람 중 하나였다. 화월도군의 탄강은 의형의 심장 부위에 정확하게 꽂혔다. 의형의 무사함은 그가 가슴팍에 모종의 방비를 해 두었다는 반증이었다. 천잠보의(天蠶寶衣) 같은 기물을 몇 겹 포개 놓지 않았을까.
하지만 즉사를 면했을 뿐 충격은 상당할 터였다. 강탄에 실린 막강한 내공이 의형의 흉골(胸骨)을 부수고 내부를 곤죽으로 만들었을 터였다.
진천이 감동을 받은 까닭은 의형의 자구책과 그로 인한 생존이 아니었다. 진천은 의형이 마지막 순간 목표물을 변경한 것에 가슴이 뭉클해진 것이었다.
의형은 화월도군의 목을 날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생명을 끝내는 대신 무인으로서의 목숨을 취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결단이었음을 알기에 진천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속하겠네, 아우님. 죽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음세.’
어젯밤 독대했을 때 의형이 했던 말이 진천의 귀에 쟁쟁했다.
* * *
이십여 일 전 오재현이 마령 문가와의 문제를 들고 와 도움을 요청했을 때, 진천은 반사적으로 여상구를 떠올렸다.
바로 전날 여상구의 과거사와 평생의 숙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소년 시절의 첫사랑들이 마령 문가로 떠난 이후 상심과 무력감에 젖어 술로 세월을 보내던 여상구는 사 년 후 그에게 전해진 한 통의 서신을 받고 폐인 생활을 청산하고 무인지로에 들어섰다.
서찰의 내용은 비감스러웠다. 본의에 반해 마령 문가로 가야만 했던 두 소녀가 그곳에서 겪었던 멸시와 냉대와 고난이 구구절절 적혀 있었다.
명가의 여인들은 기루 출신의 ‘천한 계집’들을 그들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 년 동안은 그녀들을 데려갔던 화영도가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지만, 새로운 미소녀를 첩으로 들인 후 그의 관심이 시들해지자 잔인하고도 노골적인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소녀들 중 연상이었던 여인은 결국 마음의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이승을 하직하고 말았다. 죽기 전에 봉천을 방문하고 싶다는 마지막 바람도 묵살당했다.
남은 소녀는 강단이 있었다. 서로 의지하던 언니가 죽은 후, 그녀는 복수의 칼을 갈았다. 스스로 시비를 자처하는 등 온갖 굴욕을 감내하며 이 년 가까이 치밀하게 준비한 그녀는 괴롭힘의 주동이었던 여섯 여자를 독살하는 데 성공했다. 거사 전날 여상구에게 전할 혈서를 믿을 만한 이에게 맡긴 그녀는 원수들을 처치하고 남았던 독차(毒茶)를 마시고 숨을 거두었다. 먼저 간 소녀와 똑같은 방년 십팔 세의 나이였다.
여상구는 ‘무인으로서’ 진정한 원수인 화영도를 처단해 달라는 소녀의 유언을 뿌리칠 수 없었다.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였지만 백 년이 걸려도 해낼 참이었다.
열아홉에 주연의 혈서를 받은 후 사십삼 년 만에 태극선법을 대성하고 문찬우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여상구는 그와 비무를 벌일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고심했다. 단순한 요청으로는 도군(刀君)의 위명을 지닌 그가 응하지 않을 확률이 십중십(十中十)이었다.
진천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여상구는 그에게 묘수가 있을 거라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마음을 준 의제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겠다는 뜻에서 속내를 밝혔던 것이었다. 그런데 삼보장으로 돌아갔던 진천이 불과 이틀 후에 문찬우와 대결할 기회가 생길 것 같다고 알려 오자 심장이 터질 듯했다.
여상구는 운명임을 알았다. 태극선법이 극성에 이르렀을 때 난생처음으로 초면에 반한 이를 만났고, 그가 난제를 단숨에 해결해 주었다. 이것이 운명이 아니면 뭐겠는가.
남은 것은 운명이 이끄는 대로 나아가 마무리를 짓는 것뿐이었다.
진천은 진인사대천명의 원리를 다시금 확인했다.
애초의 구상대로 오인결을 했다면 지금과 같은 결과가 나왔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물론 오재현이 제대로 일을 처리했다면 보다 수월하게 승리를 가져왔을 공산이 컸다.
백도방에서 제공한 명단을 본 마령 문가는 최후의 보루로 화월도군을 내정했을 것이었다. 의형과 그의 진실한 무력을 모르는 상태에서 내릴 최고의 안전 대책이었다.
진천은 마령 문가의 출전자를 보고 오재현을 이장(二將)으로 내세울 작정이었다. 그를 백도방 진영의 최고수로 알고 있던 마령 문가는 당황하겠지만 일패(一敗) 정도는 허용해도 상관없다고 여길 터였다.
진천은 자신이 나서 다음 상대를 꺾음으로써 의형에게 화월도군과 대면할 기회를 줄 참이었다. 의형의 승부는 그에게 맡겨야 했다.
상황이 바뀌었지만 의형은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해냈다. 그가 거둔 일 승으로 구인결은 사실상 종결된 셈이었다.
왼눈 밑에 바둑돌만 한 점을 박은 문수영은 암담했다.
오숙(五淑)은 어째서 스스로 패배 선언을 하는 망발을 떨었단 말인가. 그의 승패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지 몰랐단 말인가.
이제 한 번만 지면 구인결의 승리는 물거품이 될 터였다. 백도방의 두 떨거지들은 문제가 아니었다. 하남신룡이 목구멍의 가시처럼 아픈 존재였다.
고작 소수마공을 드러내지 않은 하남편봉을 상대로 승리한 전적밖에 없지만, 문수영은 하남신룡이 강기를 구사하는 초절정 고수임을 알고 있었다. 백도방주의 보고에 따르면 어설픈 수준의 강기라고 했지만, 도화각주의 무위를 보고 나니 그자의 전언을 믿기 어려워졌다. 오늘 나온 젊은것들이 저마다 비장의 패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하남신룡 역시 예상치 못한 비기를 가지고 있으리라 보아야 했다.
형세는 절망적이었다.
문수영은 수읽기를 포기했다. 너무 간단해 머리를 쓸 것도 없었다. 하남신룡은 칠병귀나 초검 중 한 놈을 칠장(七將)으로 내보낼 것이었다. 그들에게 일 승을 챙긴들 무슨 소용인가. 그다음은 이쪽에서 먼저 출전자를 알려야 했다. 창천도군을 내면 하남신룡이 피할 것이고 다른 이를 내면 그가 나올 것이었다.
창천도군 말고 누가 있어 하남신룡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겠는가. 문수영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비무장으로 달려간 진천이 여상구를 부축했다.
입을 벌리면 피가 나올 터이기에 여상구가 눈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이 우형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네, 아우님.’
진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형님.”
여상구의 면상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말이 없어도 뜻이 통하는 의제와의 교감이 기꺼웠다.
여상구는 다시 한번 시도했다. 의제는 이번에도 알아들을 것인가.
‘이제 아우님에게 달렸네. 기적을 일으켜 주게나.’
진천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여상구는 의제의 결정을 기다렸다. 진천이 입술을 깨물었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상구의 이마를 가로지른 굵은 주름이 물결치듯 움직였다. 아주 기분이 좋거나 몹시 불쾌할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지금은 당연히 전자였다.
‘고마우이. 아우님만 믿겠네.’
여상구를 일행이 있는 전각의 처마 밑까지 데리고 간 진천은 홀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 노릇을 하고 있던 백도방 무리가 그의 눈길을 받고는 움찔거렸다. 다음 출전자로 누가 나서건 마령 문가 도호의 칼에 분풀이를 당할 터였다.
구인결에서의 최종 승리를 목전에 두었음에도 전전긍긍하는 오재현을 일별한 진천은 고개를 돌려 강찬을 보았다. 그러고는 모두의 귀를 의심케 하는 일성을 뱉어 냈다.
“이편의 칠장은 접니다.”
장내가 충격의 도가니로 변한 가운데 멀리서 누군가 소리쳤다.
“멋져요!”
하남편봉 하수린이었다.
* * *
하수린의 돌발적인 외침은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가라앉았다. 묵직한 침묵이 만수보 경내를 내리눌렀다.
모두를 비무장으로 걸어가는 하남 무림의 초신성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평범한 키, 평범한 체격, 너무나 평범한 얼굴.
그러나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제는 다들 그가 백도방 측에서 나온 괴물들을 이끄는 실질적인 수장임을 알고 있었다. 그의 출전 선언은 마령 문가의 일인자를 향한 도발이었다. 만용이든 자신감이든 그 자체로 향후 대륙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 도전이기도 했다.
하늘도 놀란 듯 폭우가 쏟아졌다. 세차게 퍼붓는 빗줄기를 뚫고 비무장까지 걸어간 진천이 마령 문가 진영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삼보장의 식객으로 있는 진천이라고 합니다. 제가 백도방의 칠장입니다.”
담담한 음성이었고 정중한 태도였다.
마령 문가 도호들의 고개가 일제히 앞줄 맨 오른쪽에 서 있는 백염홍안의 노인에게로 돌아갔다. 기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진천을 주시하던 노인, 문찬경이 서서히 앞으로 나섰다. 이십 보를 걸어 나온 그가 비무장 가장자리에 멈추자 진천이 다시 왼손바닥으로 오른 주먹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진천이 창천도군을 뵙습니다. 감히 가르침을 청하옵니다.”
문찬경은 답례하지 않고 조용히 칼을 뽑을 따름이었다.
중인은 숨을 죽였다. 반 시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대진이었다. 아무리 근자에 중원 전체를 아우르는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고 하나, 약관 전후의 후기지수가 삼사십 년간 정파 무림을 대표했던 거두를 상대로 일전을 펼친다는 건 꿈속에서도 나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지금의 일이 알려지면 백이면 백, 천이면 천이 황당한 헛소리로 치부할 터였다.
하지만 마령 문가의 도호들과 백도방 무리는 등골이 조이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오늘 백도방이 거둔 사 승은 하나같이 예상을 뒤엎은 이변들이었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하남신룡이 창천도군을 이긴다면, 그전의 이변들을 전부 합친 것보다 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었다. 이곳에 없는 강호인들은 차라리 계란으로 바위를 깼다는 소리를 믿을 거라며 비웃을 게 뻔했다.
사십 인의 관전자들은 두 눈을 부릅떴다. 폭우로 인해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한순간도 놓칠 수 없는 일전이었다.
다섯 호흡을 기다렸지만 문찬경이 끝내 입을 열지 않자, 강찬이 드디어 비무 개시를 알렸다.
“시작하시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엄청난 사태가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