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62
제61화
진천은 문찬경의 칼이 일으킨 폭풍 속으로 뛰어들었다.
호신강기를 두르지 못하기에 위험천만한 시도였으나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십 초 이내에 승부를 보지 못하면 승리는 무망했다.
역천기결을 운용한 진천의 좌수에서 고드름 같은 희뿌연 기운이 돋아났다. 해일처럼 덮쳐 오는 삼엄한 도기를 현묘한 신법으로 빗겨 내며 진천은 문찬경의 이 장 앞까지 전진했다. 그러고는 문찬경이 도막(刀幕)에 강기를 싣기 전에 절멸비(絶滅匕)를 쏘았다.
진천의 손끝에서 발출된 새하얀 비수가 빛살의 속도로 날아오자 문찬경은 다급히 반월도를 틀어 넓은 면으로 방어했다. 그러고는 진심으로 놀랐다. 진천이 탄강을 구사해서가 아니라 칼에 전해지는 위력 때문이었다. 막지 않았다면 호신강기를 뚫고 그의 몸에 꽂혔을 터였다.
경적필패!
강호의 오래된 격언을 상기한 문찬경은 제대로 응전해야 함을 깨달았다. 방어벽에 이 성의 공력을 추가한 문찬경이 반격에 나섰다. 그의 도첨(刀尖)에서 세 줄기의 강선(剛線)이 뻗어 나왔다. 강선들은 저마다 다른 궤적을 그리며 진천에게 쇄도했다.
스치기만 해도 동체가 절단 날 참인지라 진천은 위로 뛰어올랐다. 유일한 활로였지만 문찬경이 놓은 덫이기도 했다. 삼등분당할 위기를 넘겼으나 공중에 뜨는 바람에 운신에 제약이 생긴 진천이 다급히 두 번째 절멸도를 날렸다. 도강을 연장해 찔러 가면 진천의 복부에 구멍을 낼 수 있을 터이지만, 문찬경은 일단 탄강을 쳐 냈다. 상대의 죽음과 그의 부상 중 후자가 더 손해였다.
반의반 호흡을 번 진천이 과감하게 사선으로 떨어지며 문찬경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무모한 승부수에 혀를 찬 문찬경이 가차 없는 응징을 가했다. 그의 칼이 뿜어낸 강기의 그물이 진천을 옭아맸다.
다음 순간 문찬경은 눈을 부릅떴다. 그물에 갇힌 진천이 연기가 되어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일수를 하려던 문찬경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공력이 부족한지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흐물흐물하던 진천의 수강(手剛)이 별안간 길어지더니 그의 왼 어깨를 찔러 왔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호신강기를 믿고 진천을 동강 낼 수도 있었으나 문찬경은 방어로 전환했다. 도박을 하기엔 느낌이 너무나 섬뜩했다.
반월도로 진천의 공격을 막아 내려던 문찬경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낫처럼 휜 진천의 수강이 그의 칼을 감더니 손목으로 흘러왔기 때문이었다. 찰나지간 갈등한 문찬경은 안전을 택했다.
칼을 놓으며 오른손을 보호한 문찬경이 왼손으로 진천에게 장공을 퍼부었다. 기이한 각도로 상체를 비틀어 곤죽이 되는 참사를 면한 진천이 훌쩍 물러섰다. 문찬경은 그를 쫓지 않고 땅에 떨어진 반월도를 집었다. 진흙이 묻은 칼을 쥔 문찬경의 홍안(紅顔)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졌다.
문찬경에게서 십여 보를 떨어진 진천은 가만히 멈춰 서서 팔을 내려뜨렸다.
여유의 과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자세였다. 짧은 순간 전력을 쏟아부었기에 손을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다. 기실 서 있는 것도 버거웠다. 십이 성의 공력으로 구사하는 두 번의 절멸비와 한 번의 절멸삭(絶滅索)은 현재의 역천기공으로 운용 가능한 최대치였다.
그나마 팔영보가 공력을 소진시키지 않는 절학이라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문찬경의 칼이 펼쳐 낸 강기의 그물에 갇혔을 때 연화(煙化)로 빠져나오지 못했을 터였다.
격탕된 기혈이 가라앉지 않았지만, 진천은 입을 벌리려 했다. 말과 함께 피가 터져 나오더라도 서둘러 패배를 선언해야 했다. 문찬경이 달려와 칼을 내리친다면 속절없이 두 쪽으로 갈릴 판이었다.
하지만 문찬경이 간발의 차이로 빨랐다.
“이번 비무는 나의 패배다.”
반월도를 도갑에 집어넣으며 문찬경이 말했다. 반쯤 예상했으나 막상 그 말을 듣자 진천은 혼란스러웠다. 사실상 무승부였던 의형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양보한 화월도군과 승리를 코앞에 두고 패배를 자인한 목전의 도백은 마령 문가에 대해 그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깨뜨리는 인물들이었다.
한편 진천은 문찬경이 ‘이번 비무’라는 표현을 쓴 데 주목했다. 목숨을 건 실전이었다면 결과가 달랐을 거라는 암시였고, 다음에 만나면 봐주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진천은 쓴웃음이 났다. 죽고 죽이는 싸움이었다면 그도 절멸참(絶滅斬)을 썼을 것이었다. 그랬다면 무력에서 앞선다 해도 창천도군 또한 결코 온전치 못했을 터였다.
평상시의 열 배 이상의 속도로 몸속을 내달리던 혈류가 안정되자 진천은 최소한의 활력을 회복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팔을 올려 포권을 취하며 진천이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목구멍 아래 고여 있던 응혈은 토하지 않았다.
진천은 ‘사실은 제가 졌습니다.’라며 겸양지덕을 보이지 않기로 했다. 그가 절멸삭으로 욕심을 부렸으면 손목을 자를 수도 있었음을 알기에 문찬경은 모욕으로 받아들일 터였다.
문찬경이 등을 돌려 마령 문가의 진영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진천을 응시했다. 진천은 그의 심중에 든 말을 짐작했다. 아마도 남천도왕을 의식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이리라.
하지만 괜한 배려였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곽경이 진천에게 다가와 문찬경의 의구심을 대신 풀어 주었다.
“네 이름이 진천이라고 했더냐?”
“그렇습니다.”
“본성(本姓)이더냐?”
곽경이 던진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문찬경이 눈을 빛냈다. 진천은 그들의 예상을 거스르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렇습니다.”
곽경의 동공에 불신의 기색이 어렸다.
“정말이더냐?”
“그렇습니다.”
여전히 같은 진천의 대답에 곽경이 뱀눈을 일그러뜨렸다.
“하면 네 사문은 어디더냐?”
진천은 고비임을 알았다. 남천도왕은 부답(不答)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도 버터야 했다.
“사정이 있어 밝히기 어렵습니다.”
“뭐라?”
곽경의 음성에 노여움이 묻어나자 문찬경이 끼어들었다.
“정말 네 성이 진(秦)이더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남 무림에서 무공을 익혔고?”
“그렇습니다.”
곽경이 벌써 다섯 번째 똑같은 대답을 한 진천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나를 기만했음이 판명되면 너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곽경이 발산하는 무지막지한 압기를 견디며 진천은 담담히 대꾸했다.
“그러십시오. 하지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입니다.”
진천은 남천도왕이 그의 성을 문제 삼는 까닭을 알고 있었다. 창천도군처럼 절멸도법의 뿌리를 감지한 것이었다. 워낙 변형이 심한지라 확신하진 못할 테지만 의심을 완전히 떨치기는 어려울 터였다.
진천은 정작 알아보았어야 할 이는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이에게 가서 정신 차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신경을 쓸 계제가 아니었다. 진천은 청광이 번득이는 남천도왕의 눈에서 미련을 읽었다. 그냥 넘어갈지 아니면 답을 알아낼 때까지 추궁할지를 두고 저울질하는 모양이었다. 진천은 그가 후자를 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그리되면 무력을 써서라도 토설을 강제하려 들 것이었다.
진천이 대응책을 고민하려는데, 대웅이 내상의 악화를 무릅쓰고 고함을 질렀다.
“그 친구의 사문에 관해서는 소손이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님. 나중에 소상히…….”
대웅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에게 날아간 곽경이 그의 면전에 내려섰다.
“지금 당장 고하거라!”
조부의 명을 거역지 못하고 대웅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대웅의 전음을 들은 곽경의 안색이 변했다.
“그게 정말이렷다?”
“제가 어찌 할아버님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저 친구와 저는 흉금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입니다. 서로 간에 속이거나 감추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중인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아무도 감히 곽경에게 방금 그의 손자에게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기사(奇事)로다. 지렁이만도 못한 자들이 이무기를 키우다니.”
진천이 선 곳을 바라보던 곽경이 다시 대웅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무형지기로 그를 잡아당겨 옆구리에 꼈다.
“문으로 돌아가자. 자세한 내용은 가면서 듣겠다.”
대웅이 발버둥 쳤다.
“제발, 저 친구와 더불어 수련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할아버님. 소손, 반드시 강해져서 돌아가겠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곽경이 대웅을 내려놓았다. 대웅이 얼른 엎드렸다.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조만간 사람을 보낼 것이다. 그에게 네가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상세히 전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할아버님.”
대웅의 빈약한 등을 내려다보던 곽경이 진천과 문찬경에게로 돌아갔다.
* * *
진천을 뜯어보던 곽경이 문찬경과 시선을 맞추었다.
“자네가 그럴 위인이 아님을 아네만, 행여나 내가 마령 문가의 행사를 방해했다고 우기지 말게, 창천. 내가 여기 온 건 어디까지나 철없는 손자 녀석의 안위 때문일세. 마령 문가의 실패는 전적으로 자네들 자신의 책임이야.”
문찬경의 백미가 꿈틀거렸다. 굳게 다문 입술은 부들부들 떨렸다. 더는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곽경이 장내를 휘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오늘의 일이 알려지면 무림이 발칵 뒤집히겠군.”
마지막으로 진천을 일별한 곽경이 신형을 띄웠다. 공중으로 솟구친 사벌의 지존은 흑점으로 화하더니 이내 중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오재현을 비롯한 열네 명의 백도방 무리가 하나둘 진창에서 몸을 일으켰다.
존재감만으로도 숨을 죽이게 만들었던 사파 무림의 절대자가 떠나자, 백도방도들은 새삼스럽게 조금 전에 끝난 일전의 결과를 떠올리고는 진저리를 쳤다. 남천도왕의 말마따나 향후 온 대륙이 타작당하는 멍석처럼 들썩거릴 것이었다.
변방 출신의 신성이 중원의 거성을 꺾은 건 그야말로 일대 사건이었다. 사패 체제가 성립된 지난 반백 년 이래 최대의 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팔대무왕이라 해도 약관에 창천도군 정도의 강자를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그 나이에 그만한 무력을 현시했던 이는 일천 년 무림사를 통틀어 천무대제 이강이 유일했다.
백도방의 무리는 그들이 미래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단순한 일인자가 아니었다. 팔대무왕은 누구라도 다른 시대에 났으면 능히 무림의 최정상에 올랐을 초인들이었다. 그들을 능가한다는 것은 영세제일인으로 불리는 천무대제의 바로 아랫자리를 차지할 거라는 뜻이었다.
신흥 무존(武尊)의 역사적인 첫걸음을 목도하는 영광을 누렸지만, 백도방도들은 뭔가 개운치 않았다. 남천도왕의 위압감에 눌려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한 데다 하남신룡과 창천도군 간의 대결이 번갯불에 콩을 볶듯 순식간에 끝나는 바람에 비무 과정을 정확히 관전하지 못해서였다.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선 오재현조차도 막판에 창천도군이 칼을 떨어뜨렸다 집는 장면만 포착했을 뿐이었다.
비무 시작과 동시에 잠시 거대한 도풍이 휘몰아치긴 했으나, 강력하고 화려한 강기의 공방이 오갔던 화월도군과 도화각주의 격돌과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비무터가 도강이나 수강으로 인해 엉망이 되지도 않았고 둘 모두 중상은커녕 작은 외상을 당하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창천도군은 본연의 무력을 오롯이 펼치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었다. 더욱이 당사자가 스스로 패배를 인정했는데 제삼자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었다.
백도방 무리는 아직도 이 장의 거리를 격하고 묵묵히 마주 서 있는 하남신룡과 창천도군을 주시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어쩌면 창천도군이 경솔했던 패배 선언을 철회하고 재대결을 요구할지도 몰랐다. 납득하기 어려운 그의 실수는 남천도왕을 지나치게 의식한 탓이었으리라.
침묵의 대치가 길어지자 백도방도들은 창천도군이 명예 회복에 나서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기대를 배반했다.
“최종적인 판정을 내리게.”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강찬이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도군, 그리되면…….”
“내가 책임을 지겠네. 자네는 자네 소임을 다하게나.”
문찬경의 엄한 시선에 강찬이 마지못해 선언했다.
“금번 구인결은 백도방의 승리로 하겠소.”
마령 문가에서 탄식이 나왔지만, 삼보장이나 백도방에서 환호성을 지르는 이는 없었다.
문찬경과 남모르는 심리전을 치렀던 진천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문찬경이 발한 장공이 진천의 머리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