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63
제62화
예기치 않은 기습이었으나 진천은 허리를 젖히고 상체를 휘돌리며 돌풍 같은 장공을 빗겨 냈다.
문찬경이 쌍수를 번갈아 가며 연달아 여섯 번이나 장공을 퍼부었다. 팔영보를 펼쳐 피해 낸 진천은 반격을 삼가고 뒤로 물러섰다. 바위도 부술 위력이었으나 문찬경의 장공에 살의가 담겨 있지 않음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그가 자신의 보법을 다시금 시험한 이유도 짐작하고 있었다.
손을 거둔 문찬경이 삼사 장을 떨어져 선 진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천도왕은 틀렸다.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그것이 네 사부들로부터 배운 절기라면 결코 지렁이들이라고 할 수는 없을 터.”
진천은 실소했다. 문찬경이 말을 이었다.
“그가 틀린 게 또 있다. 설사 지렁이들이 사는 개천에서 났다고 해도 너는 이무기가 아니라 용인 것을.”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진천은 잠자코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또 볼 날이 있을 게다.”
문찬경이 드디어 돌아섰다. 진천은 그의 등에 포권을 취했다.
“감사드립니다.”
무엇에 대한 감사 인사인지 알기에 문찬경은 씁쓸했다.
초상집 분위기가 된 마령 문가 진영은 문찬경을 따라 대문 쪽으로 이동했다. 진천은 그들의 대부분이 문찬경의 퇴각에 불만을 품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만약 강경파인 파혼도가 가린의 패대기질에 혼절하지 않았다면 그들을 선동해 드잡이질에 나섰을지도 몰랐다.
정문에 이른 마령 문가의 도호들은 한꺼번에 빠져나가지 않고 둘을 먼저 내보냈다. 밖에 운집한 군중에게 부상자들을 보여 주지 않으려는 조치였다. 한 사람은 벌떼처럼 몰린 호사가들을 쫓아내고, 다른 한 사람은 마차를 몰고 만수보로 돌아왔다. 네 명의 중상자를 마차에 태운 문가의 도호들은 밖으로 나가면서 아무도 안을 엿보지 못하게 문을 닫았다.
끝까지 마령 문가의 동향을 주시하던 진천은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자 몸을 돌렸다.
문가의 도호 중 일부가 창천도군의 뜻을 거슬러 돌아올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었지만 기우일 공산이 컸다. 설령 그런다고 해도 두 명의 도군을 제외하면 최강자라 할 파혼도가 빠졌으니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을 터였다.
진천은 일행이 모여 있는 전각으로 가지 않고 백도방 무리에게 다가갔다. 다들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했다. 하남 무림 출신의 신성은 한 달 전 무연곡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백도사흉보다 기껏해야 두 단계쯤 윗줄의 위상이었으나 오늘 창천도군과 치른 일전으로 방주조차도 어깨를 견주기 어려운 거물이 되어 버렸다.
진천이 시선을 피하는 오재현을 직시했다.
“이제 당신과의 거래는 끝났소.”
오재현의 면상을 덮은 흉터들이 춤을 추었다. 그러나 오재현은 진천의 일방적인 선언에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고 자중했다.
“나는 더 이상 백도방의 벗이 아니오. 설사 오늘 구인결에서 패했다고 해도 나는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참이었소. 당신이 먼저 신의를 저버렸기…….”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오재현이 받아쳤다.
“함부로 떠들지 마라. 억측일 뿐이다. 말하지 않았더냐? 내가 수라도에게 진 건 구인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무리를 하다가 팔을 다친 탓이라고. 하여 내 무력의 칠팔 할밖에 발휘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는 네가 일장으로 내보내는 바람에 심적으로 흔들린 상태였다. 평상심을 유지했다면 왼팔이 온전치 않았더라도 능히 수라도를 물리쳤을 게다. 내 패배엔 네 책임도 없지는 않단 말이다.”
구차스런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오재현은 씨도 먹히지 않음을 알았다. 목전의 어린 괴물은 무공만이 아니라 지모도 그 못지않게 출중했다. 언변으로써 구워삶을 수 있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끝까지 부인해야 했다.
진천은 책임 소재를 따지며 이전투구를 벌이려는 오재현의 수작에 말려들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당신과의 거래는 끝났지만 앞으로 백도방을 지켜보겠소. 미리 밝혀 두거니와 정도에 어긋나는 행보를 보인다면 용서치 않겠소.”
진천의 단호한 발언에 오재현의 면상 위에서 시체 속의 구더기처럼 꿈틀거리던 흉터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평생을 도박판에서 굴러먹은 오재현은 판돈을 걸고 패를 뒤집어야 할 순간임을 직감했다. 까 보지도 않고 물러서면 개평이나 받아먹는 처지로 전락할 게 뻔했다.
오재현은 피아의 전력을 분석했다. 상대는 하남 무림의 두 연놈뿐이고 이쪽은 그와 삼흉, 그리고 일류 무사 열이었다. 이대십사(二對十四)이니 수적으로는 압도했다.
질적으로도 밀릴 게 없었다. 칠병귀와 초검, 그리고 삼안호리는 혼자서는 하남편봉에게 상대도 안 되겠지만 셋이 뭉치면 얼마든지 그녀를 염왕에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러다 그들도 그녀와 저승길에 동행할 가능성이 크지만 알 바 아니었다.
아직 회복이 덜 됐음에 분명한 금강권의 계집과 주안일화를 인질로 잡아 활용할 수 있다는 것도 호재였다. 무사 넷만 보내면 그녀들과 나머지 부상자들을 어렵지 않게 확보할 수 있을 터였다.
아니, 그럴 게 아니라 직접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도리를 따지고 정리에 연연해하는 하남신룡은 의형을 비롯한 친인들의 생살여탈권을 쥔 자신에게 꼼짝없이 항복할 테고 그리되면 그와 부딪치지 않고도…….
바삐 굴러가던 오재현의 머리가 바퀴 빠진 수레처럼 심하게 덜컹거리더니 멈췄다. 불현듯 자신이 하남신룡과의 충돌을 극히 꺼리고 있음을 깨달은 오재현은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아이처럼 도리질을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오히려 내면의 두려움이 증폭되었다.
오재현은 혀로 좌우의 어금니를 더듬었다. 아직 섬광구가 세 개나 남아 있었다. 제아무리 신법의 대가라도 일 장 이내에서는 결코 피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리고 하남신룡은 예닐곱 걸음이 아니라 삼사 보 정도만 떨어져 있었다.
꿀꺽.
오재현이 마른침을 억지로 삼켰다. 이지는 즉각적인 결단을 촉구했으나, 본능이 강력하게 말렸다. 섬광구를 쏘아 낸 순간 하남신룡의 기이한 수강(手剛)에 목이 떨어질 것 같은 공포감이 엄습했다.
오재현은 진천의 처진 눈을 훔쳐보듯 흘깃거렸다.
적의나 살기가 아닌 냉엄함이 담긴 눈.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 현유한 빛을 발산하는 눈.
결국 그 눈에 굴복한 오재현이 뒤늦게 진천의 경고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자네의 오해가 심히 유감스럽네만, 나는 약속을 지킬 참일세. 삼보장주의 선업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겠거니와 앞으로 배수 일대의 민초들에게도 자네와 합의한 대로 선정을 베풀 걸세. 믿어 주게나. 내가 제 몫을 못 해 면목은 없네만, 우리는 마령 문가의 횡포에 맞서 함께 싸운 동지가 아닌가. 차후로도 자네와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고 싶으이.”
오재현은 자신의 말투가 바뀐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
방주의 저자세에 백도방 무리는 비감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이해난망이었다. 방주는 어째서 한 수 아래인 수라도에게 무너져 이런 굴욕을 감수한단 말인가. 금강권을 필두로 한 삼보장의 인사들처럼 맹렬한 투혼을 보였더라면 그렇게 무기력하게 패배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왜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버티지 않았단 말인가. 더군다나 남의 행사가 아니라 방의 존망이 걸린 대사였지 않은가.
수하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의식한 오재현이 진천의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명을 내렸다.
“방으로 돌아가자.”
오재현과 백도방도들이 쫓기듯 대문으로 몰려가자 진천은 좌수에 주입했던 공력을 거둬들였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오재현이 어떤 선택을 내릴지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았기에 긴장을 풀지 못했다.
진천은 오재현이 도박을 감행하면 절멸참(絶滅斬)으로 그의 양손을 자르고 단전을 폐할 작정이었다. 삼사 보는 암기공을 발하기에만 유리한 거리가 아니었다. 손을 뻗으면 바로 절멸도가 오재현에게 닿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진천은 오재현이 지닌 비장의 패를 알고 있었다. 수라도와의 대결에서 오재현은 비기를 스스로 노출했다. 수라도에게 자기가 진정한 상수임을 주지시키려는 일수일 수도 있었고, 패배 이후 ‘최선’ 운운하기 위한 밑밥일지도 몰랐다. 의도가 무엇이었건 결과적으로 괜한 사족이 되었다. 진천은 그의 입술에 집중함으로써 암습에 대비할 수 있었다.
급전이 벌어지면 오재현을 단숨에 무력화시킨 후 철구를 날릴 계획이었다. 삼흉을 한 번에 쓰러뜨리기는 어렵겠지만, 무사들은 일거에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설혹 삼흉 중 누군가 전권을 빠져나가 전각의 일행들에게 달려간다고 해도 든든한 우군이 있으니 문제없었다. 하수린의 채찍은 동료들을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었다.
마령 문가에 이어 백도방도 떠났지만 아직 남은 이가 있었다.
진천은 친인들이 기다리는 전각으로 가지 않고 정방형의 비무장 귀퉁이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노인에게 걸어갔다. 그가 지척에 이르자 압박감을 느낀 듯 강찬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고소를 지은 진천이 포권하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공정하고 정확한 판정에 감사드립니다.”
진심이었다. 강찬의 신속한 승패 선언이 아니었더라면 고량은 묵월도의 칼에 의해 불귀의 객이 되었을 터였다.
뒷걸음질 친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강찬이 헛기침을 했다.
“내 소임이었을 뿐일세. 자네도 수고 많았네.”
강찬은 진천을 하대하지 못했다. 새카만 무림말 학이었으나 금후 그와는 비교 불가의 무명을 얻을 신성에게 말을 놓을 수는 없었다. 하남신룡이 예를 갖춰 공대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 마차로 숙소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땅이 질어 가시기 불편할 듯싶습니다.”
강찬은 향후 천하의 중심인물로 떠오를 젊은이와 친분을 쌓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으나, 구인결이 끝난 직후 그와 어울리다간 구설수에 오를 게 빤한지라 친절을 거절했다.
“말은 고맙네만, 밖에 내 친지들이 있네. 그들과 함께 돌아갈 터이니 걱정하지 말게.”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거기까지만 배웅해 드릴까요? 저도 어차피 마차를 가지러 나가야 합니다.”
“허엄, 그럴 필요는 없네만 굳이 원한다면 그렇게 하게.”
하수린에게 상황을 알린 후 진천이 앞장을 서자 강찬이 뒤를 따랐다.
대문을 연 진천의 시야에 멀찌감치 떨어져 불룩한 호를 그리고 있는 군중이 들어왔다.
진천은 절로 쓴웃음이 났다. 수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마령 문가의 도호 한 명이 발한 경고성에 묶여 만수보로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진천과 강찬이 나오자 군중이 웅성거렸다. 눈썰미 좋은 몇몇이 진천을 알아보고는 ‘하남신룡이다!’를 외치자 술렁거림이 더 커졌다.
그에게 쏟아지는 수천, 수만 쌍의 시선을 견디며 진천은 강찬이 가리키는 좌측의 대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화각의 마차를 세워 둔 느티나무와는 반대 방향이었지만 배웅을 해 주기로 했으니 강찬의 일행이 있는 곳까지 갈 참이었다.
군중에 섞여 있던 원주 강가의 인사들이 강찬을 맞으러 앞으로 나왔다. 열 명 남짓했다. 그들이 오기 전에 진천이 강찬에게 포권을 취하며 작별을 고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먼 길, 부디 편안히 가십시오.”
진천을 지그시 바라보던 강찬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이 손바닥 크기의 오각 금패(金牌)였다. 두 자루의 칼을 엇갈린 문양이 중앙의 원 안에 양각되어 있었다. 원주 강가를 상징하는 쌍도결(雙刀結)이었다. 아래쪽엔 조그맣게 찬(燦)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내 신물일세. 언제고 강가를 찾아주게나. 이것도 인연인데, 십 년 넘게 아껴 두었던 설산삼주(雪山蔘酒)를 대접함세.”
“고맙습니다, 어르신.”
진천은 강찬이 건네는 금패를 기꺼이 받아 들었다. 매우 유용한 물건이었다. 그 금패를 소지하면 원주뿐만이 아니라 정맹의 영토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을 터였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진천은 심중에 품었던 복안을 앞당겨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