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64
제63화
준마들을 부리는 마차였지만 소달구지처럼 느리게 달렸다.
흔들림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대웅과 여상구는 바닥에 좌정한 채 운공에 들었고, 고량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가린은 뒷자리를 통째로 차지하고 앉아 간간이 고통에 찬 신음성을 흘렸다. 어깻죽지가 덜 쪼개진 장작처럼 갈라진 그의 상처는 보기에도 끔찍했다.
차소영이 고량 곁에서 그를 돌보고 있었기에 진천은 두 번째 칸에서 나머지 두 여인과 동석해야 했다. 노미현이 그의 왼쪽에 착석했고 하수린은 맞은편에 앉았다.
진천이 휘장을 걷고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대로를 가득 메웠던 수만 군중은 온데간데없고 아름다운 풍광이 뒤로 느릿느릿 지나가고 있었다.
“드디어 고흥을 벗어난 모양이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하수린이 참았던 말을 꺼냈다.
“이제 엿듣는 귀를 조심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해 줄래요?”
진천은 그녀가 무엇을 요청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시치미를 뗐다.
“뭘 말이오?”
하수린의 눈썹이 갈매기를 그렸다.
“당신의 사문 말이에요.”
인형처럼 표정 변화가 없는 노미현을 흘긋 바라본 하수린이 말을 이었다.
“나는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둔하지도 않아요. 아까 보아하니 나만 빼고 다들 알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렇지 않나요?”
대답은 뒤편의 가린에게서 나왔다.
“가린은, 모른다.”
가린을 무시하려던 하수린은 생각을 바꿨다.
“당신도 알고 싶지 않나요, 가린. 이 사람이 누구한테 무공을 배웠는지.”
“가린은, 알고 싶다.”
가린을 가볍게 낚은 하수린이 진천을 압박했다.
“나와 가린은 들을 자격이 있다고 보는데, 어떤가요?”
이번에도 가린이 답했다.
“가린은, 자격이 있다.”
진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듣는 건 좋으나 다른 이들에게 말하면 안 된다, 가린.”
하수린이 반색했다. 빗장이 풀린 것이었다.
“가린은, 말하지 않는다.”
진천은 가린의 말이 늘었음을 깨달았다. 의형과 무공 수련만 한 게 아닌 듯싶었다.
호기심에 가득 찬 하수린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진천이 고백했다.
“내 사부들은 오래전 강호에서 잔귀쌍마(殘鬼雙魔)라 불렸던 이들이오.”
반사적으로 ‘거짓말!’이라고 소리치려던 하수린이 황급히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하수린은 그제야 이해 불가였던 남천도왕의 말을 납득했다.
지렁이.
과히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아니, 부족했다. 잔살광마와 귀도마의는 벌레만도 못한 자들이었다. 전자는 힘없고 죄 없는 이들을 천 명이나 무참히 살해한 악귀였고, 후자는 이만 명이 넘는 무고한 이들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악종이었다.
하수린은 손바닥을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벌어져 있는 입술은 그녀가 받은 충격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정말인가요?”
어떤 대답이 나올지 예상하면서도 하수린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소.”
하수린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창천도군은 틀렸다. 개천에서 용이 나온 게 아니라 똥통에서 금강석이 탄생한 격이었다.
“어쩌다가 그런 악…… 사람들을 사부로 두게 되었나요?”
진천은 쓰게 웃었다.
“내 뜻이 아니었소. 그분들을 만났을 땐 누군지 몰랐고 알았을 땐 이미 사제지연을 맺은 후였소.”
하수린은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고 후회했다.
“당신을 비난하려던 게 아니에요. 언짢았다면 미안해요.”
“괜찮소.”
둘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노미현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없이 고량과 차소영이 있는 앞 칸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수린은 노미현의 싸늘한 눈빛에서 불만을 읽었다. 중대한 비밀을 외인에게 선선히 털어놓는 진천의 처신이 못마땅한 것이리라. 아니면 그것을 캐내려는 외인이 꼴 보기 싫거나. 둘 다일 수도 있었다.
하수린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어떤 연유든 상관없었다. 진천이 그녀를 신뢰하는 벗으로 인정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하수린이 눈과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아무에게도 누설하지 않겠어요. 약속해요. 당신도 방금 들은 얘기를 절대로 남들한테 말하면 안 돼요, 가린.”
가린이 즉시 응답했다.
“가린은, 말하지 않는다.”
* * *
정오가 되기 전에 만수보를 출발했던 마차는 자정이 지나 축시(丑時)에 임박해서야 삼보장에 도착했다.
고흥에 갈 때보다 세 배 이상 걸린 까닭은 속도를 늦춰서이기도 했지만 요동을 줄이기 위해 잘 닦인 길로만 골라서 달리느라 이리저리 우회한 탓도 컸다. 장시간의 여정으로 무공을 익히지 않은 노미현과 오랜 영어(囹圄) 생활로 몸이 쇠약해진 차소영은 탈진지경이 되었다. 그녀들과 고량을 와옥으로 데려다준 진천은 반대편 와옥으로 건너왔다.
하수린도 그녀에게 배정된 방에서 운공에 들었기에 진천은 노덕과 둘만 남았다. 노덕은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자네도 피곤할 테니 가서 좀 쉬게나.”
속에 없는 소리를 하는 노덕을 보며 진천은 고소를 머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대인.”
노덕이 겸연쩍게 웃었다.
“이렇게 붙잡아서 미안하구먼. 너무 궁금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네.”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덕은 구인결의 결과를 알고 있을 터였다. 고흥까지는 오백여 리 장도지만 여섯 시진은 전서구가 세 번은 왕복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이 아니었고 몸을 사린 백도방주가 방도들에게 함구령을 내렸을 터이기에 자세한 사정은 모르고 있을 공산이 컸다.
노덕이 단도직입했다.
“오늘, 아니 벌써 어제구먼, 아무튼 오후 늦게 주안에 전해진 소식에 따르면 백도방이 이겼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허어, 어찌 그런 일이.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창천도군과 화월도군도 만수보에 들어갔다고 하던데 그들은 출전하지 않은 모양일세, 그려?”
“그분들도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에게서 오 승을 거두었다는 겐가? 그것도 쉽지는 않았을 텐데 수순을 기가 막히게 짰었구먼.”
진천은 괜히 난감했다.
“수순에 운이 따랐던 것은 맞습니다, 대인. 처음부터 상세히 말씀드리지요.”
진천은 백도방주 오재현과 수라도 문수경이 치렀던 제일전(第一戰)부터 그와 창천도군 간의 마지막 대결까지 차근차근 복기했다. 그의 설명이 이어지는 내내 끊임없이 탄성을 터뜨리던 노덕이 종내는 넋이 나간 듯 멍한 얼굴이 되었다.
진천의 이야기가 끝났지만 노덕은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겨우 충격을 추스른 노덕이 남천도왕 곽경이 만수보를 떠나기 직전 남긴 것과 동일한 감상을 내놓았다.
“이 내용이 알려지면 온 대륙이 발칵 뒤집히겠구먼.”
마령 문가의 출전자들은 결코 약자가 아니었다. 약자이기는커녕 그야말로 초호화 진용이었다. 그들 중 단 한 명만 나서도 하남 무림이나 산서 무림 같은 변방 무림을 초토화시킬 수 있을 터였다. 그런 도호들을 상대로 진천을 비롯한 삼보장의 빈객(賓客)들이 오 승을 거두었다니. 이건 단순한 쾌거가 아니라 서산 일출만큼이나 믿기 어려운 기적이었다.
노덕은 기쁘기보다는 더럭 겁이 났다. 마령 문가는 강호 최고(最古)의 전통을 자랑하는 가문이었다. 정파의 오대세가와 사파칠문, 그리고 마도의 제 유파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일원들을 교체해 왔다. 하지만 마령 문가만큼은 붙박이었다. 팔백 년 전 파사현정의 기치를 내걸고 태동한 마령 문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오대세가에서 탈락하지 않고 성세를 이어 왔다. 정파 무림을 통틀어 오직 마령 문가만이 보유하고 있는 기록이었다.
마령 문가는 최고일뿐더러 최고(最高)인 적도 많았다. 그들이 배출한 천하제일인은 열 명이 넘었다. 이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기록이었다. 그들은 오늘날에도 북천도왕이 나온 원주 강가에만 밀릴 뿐, 정맹 내에서 최강의 위세를 자랑했다. 가히 정파 무림의 태산북두였다. 그런 거대 가문이 최정예를 내세우고도 패했으니 천하경동은 필연지사였다.
풍을 맞은 노인처럼 노덕의 입가가 부르르 떨렸다.
“자네도 알 테지만 마령 문가는 북해에 떠돈다는 빙산과 비슷한 존재일세. 그들의 진정으로 무서운 점은 드러난 것보다 감춰진 힘이 더 크다는 데 있다네. 솔직히 두렵구먼. 체면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그들이 차후 어떻게 나올는지. 칼을 놓고 물러앉은 노호(老虎)들이 나 몰라라 하며 구경만 하고 있을 성싶진 않으이.”
진천은 노덕의 우려에 공감했다.
기실 창천도군과의 대결에 앞서 그 부분에 관해 고심했었다. 백도방주의 배신으로 구인결에서의 승리가 간절해진 상황이 아니었기에 적당히 시늉만 하다가 물러설 수도 있었다. 그러면 후유증은 남더라도 후환을 염려하지는 않아도 될 것이었다.
그것이 현명한 선택임을 알면서도 진천은 창천도군을 맞아 승리를 목표로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호승심이나 명예욕의 발로가 아니었다.
진천은 고량을 필두로 한 동료들의 분전을 아름답게 마무리 짓고 싶었다. 모두들 합심해 애써 용을 그렸는데 마지막 남은 눈알을 빠뜨리면 두고두고 원성을 들을 터였다.
험난한 강호에서 오래 살아남고자 한다면 실력의 삼 푼은 감추어야 한다는 격언을 모르지 않았지만, 진천은 다른 동료들처럼 비기를 아낌없이 드러내었다. 가진 바 패를 다 내보이고도 이길 수 있어야 진짜 강자였다. 누구나 팔대무왕의 수를 알지만 아무도 그들을 당해 내지 못하는 것처럼. 진천의 목표는 팔대무왕 너머에 있었다.
진천이 노덕을 달랬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대인. 그들은 체면 때문에라도 가볍게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게 두어 가지 생각해 둔 바가 있습니다.”
“허어, 그럴 줄 알았네. 자네가 아무 대비책 없이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지. 알겠네. 자네만 믿고 마음을 탁 놓음세.”
진천은 쓴웃음이 났다. 노덕은 그를 너무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보다 당부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대인.”
“뭔가? 말해 보게나.”
“혹시 누군가 대인께 접근해 저에 대해 묻거든 아는 대로 말해 주십시오. 제 사문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아, 허 노야에 대해서는 빼고요.”
노덕은 말귀를 알아들었다.
“마령 문가에서 자네 신상 내력을 캐기 위해 나를 납치해 토설을 강요할 거란 말인가?”
“꼭 거기만이 아니더라도 대인을 찾아올 세력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들이 누구더라도 저항하지 마시고 있는 그대로 알려 주시길 바랍니다.”
노덕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진천이 몇 마디를 덧붙였다.
“대인뿐만이 아니라 삼보장의 모든 식구들에게도 같은 얘기를 할 참입니다. 실은 창인을 떠나올 때 그곳의 친인들에게도 비슷한 당부를 남겼습니다. 언젠가 제가 무명(武名)을 얻으면 필히 여러 곳에서 제 뿌리에 관심을 둘 거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때는 이렇게 빨리, 이렇게 크게 유명해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지만요.”
노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자네 말에 따르겠네. 내일부터 시작되는 대공사를 감독해야 하니 당분간은 아예 삼보장 밖에 나가지 않음세. 바깥에 벌여 놓은 사업은 믿을 만한 이들에게 맡기면 되네. 아마 서로들 하겠다고 달려들 걸세.”
대웅의 요구에 따라 노덕은 죽림 지하에 이천 평 규모의 대형 연무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대공사’는 그 일을 의미했다.
“그나저나 한낱 주안의 상가(商家)에 지나지 않았던 삼보장이 자네가 온 지 한 달여 만에 용담호혈이 되었구먼. 일전에 찾아왔던 성주 성가의 후예나 포성 무림 대회 우승자 정도는 이제 도전은 고사하고 자네 근처에 얼씬도 못 할 걸세.”
진천은 그저 쓰게 웃었다.
“그런데 자네가 좀 전에 말한 대비책 말이네만. 하나만 귀띔해 줄 텐가?”
대비책이란 표현을 쓴 적이 없었지만 진천은 바로잡지 않고 노덕의 청에 응했다.
“제 외가를 찾아갈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