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65
제64화
진천은 대웅의 방에 들어섰다.
단박에 승부를 결정지었기에 격전을 치르지도 않았고 외상도 전혀 없었지만, 대웅은 가장 큰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파도천망을 구사하기 위해 모든 공력을 일시에 쏟아부은 데다 선천지기까지 쥐어짰기 때문이었다. 만약 남천도왕이 때마침 도착해 동일한 심공에서 발현된 내기를 불어넣지 않았다면 회복 불능에 처했을지도 몰랐다. 대웅으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진천은 가부좌를 틀고 운공 중인 대웅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전신에서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일각 후 대웅의 정수리에서 허연 김이 올라오더니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콧구멍으로 긴 숨을 뿜어낸 대웅이 눈을 떴다.
진천이 퉁방울눈을 끔벅거리는 대웅에게 말을 건넸다.
“좀 어떠냐?”
그제야 진천이 곁에 있음을 인지한 대웅이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깜짝 놀랐잖아. 왔으면 왔다고 얘기를 하지.”
진천은 실소했다. 운공에 든 이에게 어떻게 입실을 알린단 말인가.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대웅도 머쓱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내 의형과 하 소저는 아직 운공 중이다. 가린은 자고 있고. 차 소저와 노 소저는 고 형과 함께 있다. 고 형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래도 고비는 넘겼다. 도상(刀傷) 중 네 군데는 심각한 편이지만 중요한 근맥을 다치지는 않았으니 회복할 수 있을 거다.”
대웅이 투덜거렸다.
“제길, 나만 손해 막심이군. 이렇게 중한 내상은 평생 처음이야. 횃불로 내장을 지지는 것 같아.”
엄살이 아님을 알기에 진천은 핀잔을 삼갔다.
“나 좀 일으켜 주라, 천.”
진천이 대웅을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엉덩이에 종기가 난 사람처럼 대웅이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많이 아프냐?”
진천의 물음에 대웅이 동문서답했다.
“왜 내 이름을 부르지 않지, 천?”
진천도 반문했다.
“어떻게 부르길 바라나? 대웅? 아니면 곽웅?”
대웅이 씩씩거렸다.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대웅이지.”
진천이 부드럽게 응답했다.
“알았다, 대웅.”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대웅은 금세 풀이 죽었다.
“미안하다, 천. 비밀을 지키려고 했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너를…….”
진천이 대웅의 말을 막았다.
“사과할 것 없다. 왜 그랬는지 아니까. 오히려 네게 감사하고 있다. 네 기지 덕분에 곤경에서 벗어났으니.”
대웅의 큰 눈에 물기가 고였다.
“사람들이 다 너처럼 내 마음을 알아주면 좋을 텐데.”
“하하, 그러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지음(知音)이 되게?”
“어? 그렇구나! 그럼 곤란하지. 개나 소나 다 지음으로 둘 수는 없지. 마음이 통하는 벗은 너 하나면 족해. 너도 그렇지, 천?”
진천은 신중히 답을 골랐다.
“그래, 대웅. 하지만 폭을 넓혀도 나쁠 건 없을 테지. 개와 소를 지음으로 사귈 수는 없지만, 좋은 사람이면 얼마든지 벗으로 삼아도 되지 않으냐. 물론 벗들이 많아져도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갖는 특별한 의미는 작아지지 않을 거다. 너도 내 생각과 같으냐?”
“물론이지. 아무리 다른 사람과 친해져도 너를 소홀히 대하는 일은 없을 거야. 너는 특별하니까.”
“고맙다, 대웅.”
기분이 좋아진 대웅이 씩 웃었다. 진천도 싱긋 웃음으로 화답했다.
내상의 고통 때문인지 대웅의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웃음기를 거둔 대웅이 갑자기 침울해지자 진천은 의형에게 가 보려던 계획을 보류하고 방에 더 머무르기로 했다. 진천이 가만히 지켜만 보자 무언가를 망설이던 대웅이 불쑥 물었다.
“내가 왜 집을 나왔다고 생각해, 천?”
“글쎄.”
“그러지 말고 말해 봐. 짐작하는 바가 있을 거 아냐?”
“…….”
진천의 부답에 대웅도 침묵으로 압박했다. 진천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너한텐 동생이 있지, 대웅? 그리고 그 동생은 형제라기보다는 경쟁자로 크지 않았나?”
“……계속해 봐.”
진천이 작심한 듯 말을 쏟아 내었다.
“자라는 내내 둘이 벽력도문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치열하지 다투었을 성싶다. 아마 네 동생은 너와는 성정이 사뭇 다를 게다. 너보다 훨씬 독할 것 같은데, 어떠냐? 너는 갈수록 동생의 사나운 기에 움츠러들어 나중엔 그를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곤 했을 테지. 무력이 엇비슷하거나 차이가 크지 않음에도 비무에서 일방적으로 밀렸을 테고. 경쟁은 진즉 포기했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또 다른 두려움이 생기지 않았을까? 무재만 따지면 너는 동생에게 그다지 뒤지지 않을 거다. 그 사실을 너도 알고 동생도 알겠지. 네 동생은 혹시 네가 심약함의 껍질을 깨고 강인한 무인으로 탈바꿈할까 봐 특단의 조치를 취하려 들지 않았을까? 그리고 너는 그걸 알아차렸고. 그 상황에서 너에겐 세 가지 선택이 있었을 듯싶구나. 동생에게 맞서 싸우든가, 주위에 보호를 요청하든가, 아니면 화를 피해 달아나거나. 앞의 두 가지가 여의치 않았기에 세 번째를 택했을 거라 본다만.”
“어떻게…….”
대웅이 진천을 귀신 보듯이 했다.
“그 녀석 이름은 건(建)이야. 나하고는 두 살 터울이고. 네 말마따나 독종이야. 그냥 독한 게 아니라 무지하게 독해. 오금이 저릴 거라고 했는데, 그 정도가 아니었어. 그놈 앞에만 서면 하늘이 노래지고 다리가 후들거렸어. 그 녀석이 노려보기라도 할라치면…… 제길, 창피하지만 오줌을 지리곤 했어. 심한 경우엔 주저앉았고. 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처음부터 그 자식한테 그렇게 쩔쩔맨 건 아냐. 열여섯 살 때까진 내 무위가 더 높았어. 돌이켜보면 꿈같은 시절이었지. 그때까지만 해도 그놈은 내 비위를 맞추려고 강아지 꼬랑지처럼 살랑거렸거든. 하지만 그 무렵부터 평수를 이루더니 일 년 후엔 나를 추월하기 시작했어. 그러면서 점점 본색을 드러내더라고.
비무는 더 이상 겨루기가 아니었어. 그놈은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덤볐어.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와 싸우듯. 자칫 잘못하다간 정말로 큰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었기에 나는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어. 조부는 그 자식을 꾸짖기는커녕 나를 야단쳤어. 기개가 부족하다며. 억울했지만 조부에게 대들 순 없었기에 꾹 참아야 했어.
내가 더 강했을 땐 나는 행여나 그놈이 다칠까 봐 손속에 사정을 두곤 했어. 그 덕에 그놈은 나와의 비무에선 팔다리가 부러진 적도 없어. 하지만 나는 열일곱 살 이후 석 달마다 한 번씩 조부 앞에서 치른 정규 비무가 끝날 때면 항상 중상을 입었어. 그놈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내 몸에 칼을 쑤셔 박았거든.
악순환의 연속이었어. 겨우 나으면 다시 붙어야 하고 그러면 또 깨졌으니까. 반년 넘게 회복되지 않아 정규 비무를 중단한 적도 있어. 그놈과 싸우지 않아도 돼서 얼마나 안심했는지 몰라.
그래, 나는 겁쟁이가 되었어, 천. 언젠가부터 그놈만이 아니라 누구와 붙어도 얼어붙었어. 아무리 용기를 내려 해도 손과 발이 말을 듣지 않았어. 다들 쉬쉬했지만 내 괴질에 대한 소문이 문내에 파다하게 퍼졌어. 조부의 엄명으로 담장 밖으로는 새어 나가지 않았지만.
그렇게 나는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종손에서 천덕꾸러기로 전락했어. 시종 같은 천한 것들조차 비웃는. 그 끔찍한 시간 동안 나를 감싸 준 이들은 어머니와 누이들뿐이었어.”
대웅의 큰 눈에서 실지렁이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진천은 일 사부를 떠올렸다. 대웅과 일 사부는 다른 듯 닮았고 닮은 듯 달랐다.
꼬챙이처럼 앙상한 팔뚝으로 눈물을 훔친 대웅이 마무리에 들어갔다.
“이 년 전, 그놈은 무기한 폐관수련에 들어갔어. 초절정 경지에 들기 전에는 나오지 않을 거라 선언하면서. 부끄럽지만 적어도 칠팔 년간은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나는 희희낙락했어. 어쩌면 십 년, 아니면 십오 년이 될 수도 있었고. 초절정이 뉘 집 개 이름은 아니잖아.
한데 그놈은 불과 이 년 만에 나왔어. 틀림없이 조부가 주기적으로 들러 손수 가르쳤을 거야. 진귀한 영약들도 복용했을 테고. 그놈이 천재긴 하지만 그런 뒷받침 없이 그렇게 단기간에 절정 하(下)에서 초절정으로 치솟는 건 불가능해.
실은 나는 그놈이 나온 줄도 몰랐어. 개인 연무장에서 수련에 땀을 쏟고 있는데, 한순간 목덜미가 서늘한 거야. 이상한 느낌에 둘러보니 건이, 그놈이 석실 문 옆에 서 있지 뭐야. 너무 놀라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
하필 그날 나는 오 년이나 공을 들였던 파천뢰(破天雷)의 초현에 성공했어. 그 자식은 그걸 지켜보았고. 그놈과 눈을 마주친 순간 나는 깨달았어. 그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불안에 떨며 며칠 동안 한잠도 자지 못한 나는 정월 초하루 전날 새벽 어머니께 드리는 서찰을 침상에 두고 문을 빠져나왔어. 그러고는 두 달 반 동안 강호를 하릴없이 배회했어. 그러다 중립 지대의 빼어난 신성들이 자웅을 겨룬다는 무림 대회를 친견하러 포성에 갔더랬지.”
진천을 바라보는 대웅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은 것 같아, 천. 거기서 너를 만났으니.”
진천은 묵묵히 미소만 지어 보였다.
느닷없이 대웅이 주먹을 불끈 쥐고는 공중에 내질렀다.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천. 조부의 명을 거역한 건 태어나서 처음이야. 이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어. 건이 놈한테도 맞설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천?”
흥분한 탓인지 아니면 심혼에 새겨진 두려움 때문인지 대웅의 주먹이 떨리기 시작했다. 진천이 그 주먹을 두 손으로 포겠다.
“물론이다, 대웅. 너는 해일도(海溢刀)를 일 초에 박살 낸 절대 고수야. 초절정의 고수라 해도 불가능한 위업이잖아.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져도 돼.”
대웅이 진천의 손들을 마주 잡았다.
“내 병이 완치될 때까지 함께해 줄 거지, 천?”
“그럼.”
진천의 즉답에 대웅의 떨림이 가라앉았다.
대웅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후련할 줄 알았다면 진작 털어놓을걸. 아니지.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었으니 나만 바보가 된 거잖아. 이런 능구렁이 같으니. 그러기야?”
답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진천은 잠자코 있었다. 대웅이 왕방울 눈을 찡그렸다.
“다른 사람들도 눈치챘을까, 천? 예컨대 노 소저 말이야.”
“모르겠다.”
“네가 모르는 게 어디 있어? 그러지 말고 말해 봐. 알아차렸겠지?”
“그렇진 않을 거다.”
“너만 알고 다른 사람한텐 절대로 말하지 마.”
“알았다.”
“가만, 그러고 보니 불공평한데. 나만 속을 홀라당 까뒤집은 셈이잖아. 안 그래?”
“…….”
“도대체 너는 어떤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은 거냐? 서안(西安) 진가가 득세했던 오백 년 전이라면 모를까 내가 알기론 당금 무림에서 진(秦)씨 가문 중 명망가는 하나도 없는데. 이상하잖아. 네 이름이 본명이라며.”
“조금만 참아라, 대웅. 조만간 알게 될 테니까.”
“조만간? 그럴 거면 지금 말해 줘도 되잖아.”
“어머니와의 약속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분의 뜻을 많이 어겨 왔다. 이것만이라도 지키고 싶구나.”
“제길, 편리하군.”
“꼭 듣고 싶냐?”
“당연하지. 받으면 주는 게 상도의야. 우리가 상인 나부랭이는 아니지만…….”
“알았다. 말해 주마. 나는…….”
“잠깐!”
“……?”
“지금 말고 나중에.”
“……!”
진천은 대웅의 속을 헤아렸다. 대웅은 남천도왕이 보낼 사자에게 그의 신상 내력을 전한 후에 ‘비밀’을 들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 줘야 해.”
“그래.”
“혹시 도화각주는 이미 다 아는 거 아냐?”
“…….”
“역시, 그렇군. 배신자.”
“형님이 모르는 것도 있다, 대웅.”
“흥, 거짓말.”
그 순간 문이 열리더니 여상구가 들어섰다. 아내 험담을 하다가 들킨 공처가처럼 대웅이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진천은 의형이 방 밖에 와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담담하게 반응했다.
진천은 의형이 대웅과의 유치한 입씨름을 끝내 주길 바랐다. 여상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거짓말이 아닐세. 기실 나도 아우님에 관해 모르는 것투성이일세. 하나 자네와 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잖은가?”
“아!”
탄성을 발한 대웅이 과장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작 진천은 답을 알지 못했다.